음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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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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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자민 브리튼(Britten) / 전쟁 레퀴엠(War Rwquiem)


◈ 음반
독창 : 피터 피어스, 가리나 비쉬네프스카야,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합창 : 바흐 코럴, 런던 교향악단 합창단,
하이게이트 국민학교 합창단(Highgate Schoolchoir)
지휘 : 벤자민 브리튼
런던 교향악단 실내악  
멜로스 앙상블(Melos Ensemble)
오르간 : 사이몬 프레스톤(Simon Preston)
녹음 : 1964년

◈ 영상
지휘 : 벤자민 브리튼
독창자 : Galina Vishnevskaya (소프라노), 피터 피어스 (테너),
        Dietrich Fischer-Dieskau (베이스)
London Symphony Orchestra, Melos Ensemble
London Symphony Orchestra Chorus, Highgate School Choir
The Bach Choir
오르간 : Simon Preston
1964년 8월 4일
http://youtu.be/rsSMCq7pl_k?si=KSIlFGQ3f4LX1rCv

전쟁의 참혹함을 통해서 인류의 화해를 희구한 레퀴엠이다.

<영국의 모차르트>로 불려지며 영국 현대음악사를 대표하는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은
<행동하는 평화주의자>였다.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그의 생애를 일관하게 된 데는 어린
시절의 스승 프랭크 브릿지(Frank Bridge)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브릿지는 1차 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이 빚어내는 학살과 엄청난 피해를 목격하면서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
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자신의 사상을 어린 제자에게 심어 주었다.

후일, 브리튼은 스승을 일러서 <온화한 평화주의자>로 불렀는데, 이에 비해서 그 자신은
<행동하는 적극적인 평화주의자>의 입장이었다고 했다. 평화에 대한 그의 사상을 처음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15세 때인 1915년에 쓴 수필이 있다.

동물을 죽이는 사냥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전쟁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잔혹행위를 공
격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수필이 주변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곧 메어(Walter de
la Mare)의 시를 텍스트로 삼은 가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한 노래는 덫을 놓는
사냥 감시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1936년(23세), 그의 최초의 걸작 관현악곡으로 평가되는 작품 <우리들 사냥의
조상들 Our Hunting Fathers>을 썼다. 새와 짐승들에게는 물론 사람들에게 잔혹행위
를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오든(W.H.Auden)의 작품을 주제로 삼은 관현악곡이었다.
이 작품은 동시에 유대인을 부당하게 다루는 나치독일에 대한 명백한 경고이기도 하였
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과 작품 활동을 상기한다면 1942년(29세), 브리튼과 피터 피어스
(Peter Pears)가 미국에서 3년간을 보내고(1939년, 시인이자 친구인 오든이 미국으로
귀화하자 브리튼도 유럽의 불안한 정세를 피해서 피어스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
국에 돌아와서 참전을 거부하고 그 대가로 법정에 서게 되는 일련의 사건은 당연한 귀
결이라고 이해된다.

브리튼이 참전거부 의사를 명백하게 밝히자 영국 정부는 그에게 <왕립 공군 음악감독>
으로 취임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고 브리튼이 이를 수락하자 참전문제로 야기된 이 사
건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또한 영국 법정은 브리튼과 피어스가 군대를 위한 연주회
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군복무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
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우리는 벤자민 브리튼이 <행동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을 확
인하게 된다. 음악학자 한스 켈러(Hans Keller)는 브리튼을 <적극적 평화주의자>로 불
렀다.

그의 행동하는 평화주의는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6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무기를 드느니 차라리 아랍의 탱크 앞에 드러눕는 것이 낫다"고 이 전쟁을 비난한데서
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오라토리오와 같은 웅대한 규모의 합창음악을 써야 하겠다는 구상은 오랫동안 브리튼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32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
시인 로널드 던컨(Ronald Duncan)의 협력을 얻어 오라토리오 <내 탓이로소이다 Mea
Culpa>를 썼다.

이어서 1948년 1월, 라틴어로 된 레퀴엠 미사를 일부 변형시키는 독특한 형태의 진혼
곡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에 들어갔다. 이러한 구상의 동기는 거의 성자(聖者)처럼 철저
한 무저항 운동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추진하고 있었던 간디(Mahatma Gandhi)의
암살에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본은 에릭 크로차이어(Eric Crozier)가 맡
았는데 가능한 간디의 연설문에서 발췌하여 골격을 삼는다는 계획이었다. 징용 병사이자
시인인 오웬(Wilfred Owen)의 시에 곡을 붙인 최초의 작곡가는 브리스(Arthur Bliss)
였다.

1930년에 <놀위치 축제 Norwich Festival)>에서 초연된 연설자, 합창,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아침 영웅들 Morning Heros>이다. 이 작품은 1916년의 솜전투(Somme
battle)에서 전사한 브리스의 동생 캔나드(Kennard)와 제1차 대전에서 숨진 모든 병사
들에게 헌정 되었다. 이 작품에서 오웬의 시는 마지막 악장 바로 앞에서 내레이션 형식
으로 채택되고 있는데 시의 제목은 <춘계 공세 Spring Offence>였다. 한편, 브리튼이
오웬의 시를 텍스트로 삼은 최초의 작품은 1958년에 작곡된 <녹턴>이었다. 가사는 <친
절한 유령 The Kind Ghost>에서 취했다.

같은 해, BBC에서 역시 오웬의 시 <이상한 만남 Strange Meeting>을 발표했다. 브리
튼이 레퀴엠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위에서 밝힌 여러 가지 이유 말고도 공식적인
요청에서도 찾아 진다. 그 경위는 이러하다.

잉글랜드 중부 와리크샤 주 코벤트리 대성당은 5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성당이
었다. 그런데 이 성당이 1941년에 독일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 복
원 되지 못하고 있다가 1962년 5월에 드디어 새로 지은 대성당의 헌당식을 갖게 되었
다. 이 역사적인 헌당식을 위한 축제도 함께 마련 됐는데, 그 축제를 위해 신작을 작곡
해 주기를 브리튼에게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브리튼은 이 축제야말로 평소 자신이 품고 있었던 평화주의를 표현하는 대
규모의 합창음악을 발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인류의 화해를
위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독창자의 선정을 2차 대전의 당사국들 영국, 러시아, 독일
인으로 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러시아 소프라노 가리나 비쉬네프스카야(Galina Vichnevskaya),
영국 피터 피어스(Peter Pears),
독일 피셔 디스카우(D.F.Dieskau)가 독창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가리나의 출연을 러시아 정부가 반대했기 때문에 그 대신 영국의 소프라노 히더
하퍼(Heather Harper)가 초연의 영광을 누렸다.

앞에서도 기술한 것처럼 군대에 입대하기를 거절할 만큼 철저한 평화주의자인 브리튼이
오웬의 시 가운데서도 그가 휴전 1주일 전까지(오웬은 휴전 1주일 전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실제로 겪었던 전쟁의 무시무시한 상황들과 전장(戰場)에서 들리는 소리들(총
알이 나는 소리, 총신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신호 나팔소리 등)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사실은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들과 표현들은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
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브리튼은 <전쟁 레퀴엠>의 모토를 악보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이 역시 오웬의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의 주제는 전쟁과 전쟁의 슬픔이다.
시는 전쟁의 슬픔 속에 있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오늘의 모든 일은 경고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초연에 앞서 The Times紙의 음악평론가 윌리엄 만(William Mann)에 의해
서 브리튼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았다. 또한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어
서 이 작품의 음반이 발표되자마자 불과 5개월 만에 20만장이 팔려 나갈 정도였다.

1962년 5월 30일, 코벤트리 대성당에서 있었던 초연은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
으켰는데, 현장에 있었던 청중보다는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었던 청취자의 경우가 더 강
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브리튼이 의도했던 데로 음악이 갖는 강렬한 치료효과
를 통해서 인류의 화해를 성취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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