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반
타이틀 . 음악의 병사
워싱턴 국립 교향악단
영상 제작 : 수전 프렘크(Susan Froemke) 등
제작 : Sony Class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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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11일 일요일, 서방세계로 망명한지 16년, 이제는 미국 시민으로 신분이
바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꿈에서도 잊지 못하고 있었던 조국 러시아를 방
문했다. 이 감격스러운 여행의 동반자는 그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워싱톤 국립교향악단
과 그의 아내 가리나 비쉬네브스카야(Galina Vichnevskaya), 딸 올가(Olga), 그리고
일단(一團)의 다큐멘터리 제작 팀 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로스트로포비치를 슬라바(Slava)라고 불렀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애
칭이다. 그의 세례명 므스티슬라프인데, 그 중에서 두 번째 음절인 슬라프를 취해서 슬
라바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의미는 러시아어 Slava 자체에 있다.
<명예> <가치> <명성>이라는 뜻의 단어다. 러시아인들은 로스트로포비치를 그들의 명
예와 가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 예술인에게 이 이상의 영광이 어디에 있
겠는가? 지금까지 슬라바라는 애칭으로 불려진 인물로는 제정 러시아의 차르 황제와
성모 마리아 정도였으니 그에게 붙여진 이 칭호가 얼마나 대단한 존경이 담겨진 것인
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이러한 존경과 사랑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러시아 출신 음악인으로는 로스트로포비치의 명성을 오히려 능가하는 인물들이 많다.
유명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다비드 오이스트라프, 칼 리히터, 게나디 로제스트
벤스키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슬라바라는 칭호는
붙이지 않았다.
비밀경찰을 앞세운 공포정치로 국민을 휘어잡고 있던 구소련 체제에서 인권탄압에 대
한 공개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던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로스트로포비치였다.
소련 정부가 골치를 썩이고 있었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
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인물이 로스트로포비치였다. 이 때문에 소련 당
국은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를 볼쇼이 극장에서 축출하고 레닌그라드의 한촌으로 유배를
보냈다. 여기엔 사하로프와 솔제니친도 함께 유배되는데, 그 중에서도 솔제니친은 함께
기거하는 사이가 된다.
정부의 탄압으로 무대를 잃었고, 그래서 더욱 더 무대로 복귀하는 걸 열망했지만 로스
트로포비치 부부는 정부의 어떤 회유책에도 굴하지 않았다. 솔제니친과 사하로프의 반
체제 운동을 반박하는 성명에 서명하면 즉각 볼쇼이로 복귀시켜 주겠다는 제의가 있었
지만 단호하게 거절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탄압하는 KGB를 고발하는 편지를 여러
언론매체에 보내는 일도 감행한다. 그 편지들 가운데는 KGB가 교통사고를 가장해서
솔제니친을 죽이려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결국 이런 저항은 이들 부부가 서방으
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 1974년,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망
명했고, 1978년에 소련 정부는 이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무대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는 모스크바 음악원 강당에 다시 돌아 왔을 때,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으로 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6년 만에
조국에 돌아 온 그가 ’죽어도 좋다‘고 울먹인 것에서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16
년간의 한을 읽을 수 있다.
이 디스크는 망명 후 16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로스트로포비치를 수행하는 형식을 빌
어서 그의 반체제 활동 등 구소련 시대의 회고,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펼쳐진지 3년
뒤 러시아의 상황들, 로스트로포비치의 음악 약력 등 매우 광범위한 소재들을 담은 전
형적인 다큐멘터리다.
디스크의 타이틀은 <음악의 병사 Soldier of Music>다. 이런 의미심장한 타이틀이 붙
게 된 데는 언젠가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들려주었다고 하는 다음과 같은 쇼스타코비치
의 말에서 연유된다.
“슬라바, 우리들 모두는 음악의 병사들일세.
우리들 가운데는 장군이 없지.
만일 사람들이 자네에게 돌팔매질을 하더라도 무대를 떠나지 말게.
단단히 무대에 서서 끝까지 연주해야하네.“
슬라바가 도착한 모스크바 공항엔 누이동생을 비롯한 친척들, 이웃들(23년간 이웃이었
던 한 시인 포함), 보도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부인 가리나가 숙소로 향하
는 차 속에서 “도무지 누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자동
차가 차이콥스키 홀 앞을 지나가자 슬라바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추억의 장소 였던가!
기자회견이 시작된다. 슬라바 부부는 16년만의 고국 방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소감을
말하면서 그들이 솔제니친을 옹호하다가 시민권을 박탈당했다는 과거사를 설명한다. 이
어서 누이동생이 정성껏 마련한 환영 파티. 이 자리에서 친척들은 러시아의 오랜 관습
대로 천사상(天使像)이 그려진 액자를 선물한다.
슬라바는 그의 음악회에 반드시 초대해야 할 친지들에게 골고루 초대권이 돌아가지 않
은 사실을 알고 비서에게 “만일 그들에게 초대권을 주지 않으면 음악회를 취소하겠다”
고 으름장을 놓는다. 친척을 일일이 챙기는 그의 모습에서 따뜻한 인간미를 느낀다.
워싱턴 국립교향악단의 리허설은 공개리에 진행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제8번 교향곡
이다. 슬라바의 지휘는 열정의 덩어리처럼 뜨겁다.
슬라바의 아내 가리나, 그녀는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초연 때 독창자로 초대
될 만큼 러시아를 대표하는 명 소프라노였다. 남편이 리허설을 하는 동안 딸과 함께
볼쇼이 극장 앞을 찾아간다. 25살 젊은 시절, 베토벤의 <피델리오>에서 레오노라 역으
로 볼쇼이에 데뷔한 이래 오랜 세월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추억 어린 장소를 찾아 온
것이다. 직원들 가운데 몇몇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이 장면에서 가리나의
화려했던 한 시절의 스틸 사진들과 그녀가 부른 <어떤 개인 날>이 파노라마처럼 인서
트 된다. 딸이 묻는다. “어머니, 왜 극장 안으로 안 들어가세요?”. 가리나는 고개를 젓
는다.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대답이다.
모스크바 첫 공연엔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이 들어 있다. 이 작품은 그가 망명하
기 직전 그의 조국에서 최후로 지휘했던 작품이었다. 귀향 첫 연주회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그래서 더 특별한 감회가 서렸다.
제1악장을 지휘하는 슬라바의 액션은 오히려 레니(Leonard Bernstein)보다도 그 폭이
크고 열정적이다. 현(絃) 위에서 영창(詠唱)되는 비창의 주제가 비감 어린 음조로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놀라운 명연(名演)이다. 그런데 이 공연에서 작은 소동 하나가
벌어진다. 웬 여성 청중 하나가 악장 사이사이에 “슬라바는 신이다”라고 외쳐댔다. 지
휘자는 이 외침이 못마땅했다. 결국 그 여인은 쫓겨난다.
슬라바가 그토록 옹호했던 러시아의 저명한 핵물리학자이고 반체체 인사였던 사하로프
는 이미 고인이 됐다. 16년만의 귀향 나들이에서 슬라바가 제일 먼저 찾은 묘소는 사
하로프의 유택이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으로 둘러싸인 그의 유택에서 페레스트로이카
가 몰고 온 러시아의 변화를 실감한다. 사하로프의 유택 앞에서 선 슬라바는 눈물을
흘린다. 그의 가슴에 고인에 대한 추억이 새삼 몰려 온 탓이리라.
우인(友人)의 묘택을 떠나 잡지사 오고니오크(Ogonyok)를 방문한 일행은 과거 소련
당국이 사하로프에게 가한 탄압을 강한 톤으로 비난하는 회견을 한다. 비록 지금의 러
시아가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타고는 있지만 과거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단호
한 의지가 피력되는 순간이다. 아울러 과거 소련 언론들이 양심적 반체제 인사들을 일
제히 매도했던 일도 상기시킨다. 그 자신도 언론에 의해서 인민의 적이 되었다고 회고
하면서.
화면은 다시 공연 장면으로 이어지고 슬라바와 워싱턴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차이
콥스키의 <로코코 변주곡> 실황을 들려준다.
이번엔 슬라바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헤르첸 가의 생가를 찾는다. 이 장면에서 그의
유년기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진들이 인서트 되고, 본인이 회고하는 학창시절 이야
기들이 배경으로 깔린다. 생가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
2월 16일과 17일로 예정된 레닌그라드 공연을 위해서 일행은 모스크바 역에서 기차를
탄다. 부인 가리나는 5살 때부터 자신이 살았던 아파트를 방문한다. 이 아파트에 살면
서 겪은 2차 대전의 참상을 회고한다. 이번에도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추
억의 장소를 샅샅이 찾아보는 슬라바와 대조를 보이는 장면이다.
한 기자가 슬라바에게 묻는다. “공연 작품을 모두 러시아 작곡가들, 특히 프로코피에프
와 쇼스타코비치, 차이콥스키의 것으로 선정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쇼스타코비
치와 프로코피에프는 나의 우상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이번 공연을 바치고 싶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의 공연실황이 소개되고, 이번엔 그들이 유배되어 솔제니
친과 살았던 한촌을 방문한다. 여기서도 슬라바는 소련의 KGB가 솔제니친에게 가했던
박해를 설명하며 언성을 높인다. 그들이 솔제니친을 쫓아내면서 그가 집필하던 책상을
치우던 일을 부인이 회고한다. 책상이 있었던 위치를 일러주면서.
드디어 러시아를 떠날 시간이다. 1주간의 고국 체재. 꿈처럼 지나간 시간들. 그래서 슬
라바는 “한 주간이 일 년 같았다.”고 감격한다. 수행했던 매니저가 소감을 묻자 “서구
인들은 러시아인 마음속에 얼마나 강렬한 힘(열정)을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고 응답한다. 이 디스크를 보고 있는 시청자도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러시아의 열정>이란 무엇일까? 슬라바가 그의 지휘와 연주에서 들려주는 강렬함,
수많은 그의 친지들이 보여준 열렬한 환대,
슬라바를 “신”이라고 외쳐댄 여인의 외침 ----
이런 걸 의미하는 것일까?
소련 당국의 유형무형 탄압 속에서도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쳤던
쇼스타코비치, 한때는 소련 정부의 보배 같은 존재였던 사하로프가 인권운동가로 변신
하면서 보여준 드높은 용기, 전 세계에 소련 KGB의 인권 탄압을 고발한 솔제니친의
결의,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의 틀을 깨고 새롭게 탈바꿈하는 러시아의 변화. 아마도 이
런 여러 상황들을 직접 겪고 보면서 느꼈던 감회가 그러한 표현으로 설명되었으리라.
이 디스크는 한 예술인의 족적을 소개하는데서 그치는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로스트로포비치라는 한 음악가의 귀향을 모티브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빚어 낸 한
시대의 비극을 부각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이념이 고매한 인격이나 예술혼을
결코 파괴하지 못한다는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감동을 받는다. 오히려, 음악은 들러리를 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
서 그 역할이 미미한 것도 아니다. 적절하게 음악적 감동의 계기도 제공하면서 한 예
술가가 살았던 불행했던 시대를 감동적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 수록된 컨텐츠
러시아 텔레비전과 인터뷰
Barber : 현을 위한 아다지오
Tchaikovsky : Symphony No.6 전악장
Shostakovich : Symphony No.5 전악장
J. Strauss : Vergnügungszug Polka 유람열차 폴카
Grieg : 오제의 죽음, Peer Gynt 중
Prokofiev : Tybalt's Death (티발트의 죽음) Romeo and Juliet 중
Gershwin : Walking The Dog From The Film "Shall We Dance"
J. P. Sousa : The Stars and Stripes Fore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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