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
20세기에 활약한 지휘자들 가운데 매체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충분히 활
용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의 사후에 잇달아
발표되고 있는 레이저 디스크들 가운데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바
로 그가 생전에 직·간접으로 제작에 관여한 영상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소니(SONY) 레이블로 발표되고 있는 레이저 디스크들(베토벤/바이올린 협주곡, 모
차르트/대관식 미사, 모차르트/레퀴엠 등)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오히려 그의 생전의 정도를 능
가하는 것으로 보아질 정도다. 여기에 소개하는 디스크도 이러한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인 동시
에 연주의 질에 있어서나 스타일에서 또한 음질과 영상미학 이라는 기준에서도 기념할만한 뛰어
난 작품이다.
카라얀이 최초로 레코딩에 나선 것은 1938년이다. 그해 9월과 10월,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 지
휘자로 데뷔한 카라얀에게는 <기적의 카라얀>이라는 별호가 붙여졌다. 그의 데뷔에 대한 반응이
그만큼 대단했다. 세계 굴지의 레코드 메이커 도이치 그라모폰(DG)이 녹음을 제의했다. 12월 9
일, 베를린의 DG 스튜디오에서 그의 첫 녹음이 진행되었다. 파트너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오케
스트라였고, 작품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요술 피리> 서곡이었다. 이 녹음 이후 카라얀은 음반
역사의 숱한 신기록들을 세워 나갔다.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을 7번이나 녹음했고, 요한 슈
트라우스의 <박쥐> 서곡과 <집시남작> 서곡을 각각 7번씩 녹음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을 네 번 녹음했는데, 모노로 1번, 스테레오로 2번, 컴펙트 디스크로 1번이
었다. 이러한 기록은 카라얀流의 완전주의를 실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니커의 종신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것은 1955년이다. 빌헬름 푸루트벵글러
의 바톤을 이어받은 첫 작업으로 전임자의 음악적 체취를 없애는 것에 집중했고, 이 작업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게 되자 비로소 본격적인 레코딩에 나섰다.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되고나서 3
년 뒤인 1958년에야 비로소 DG와 장기 계약을 맺은 사실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한다.
1958년이라는 해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해에 스테레오가 처음으로 상업화에
나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시대를 레코드史와 연결시켜보면 LP 스테레오,
LP 디지털, 컴펙트 디스크, 비디오카세트, 레이저디스크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카라얀은
레코드라는 매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를 능동적으로 이용하였던 인
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휘자들과 구분된다. 새로운 기술이나 매체가 개발됐을 때 이를 가장 먼
저 활용하였고 그리고 성공했다. 스테레오가 개발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를
녹음했다.
그런가하면 영상에도 남달리 일찍 눈을 떠서 1948년에 에른스트 마리쉬카 감독과 공동으로 <마
태오 수난곡>을 영화로 제작했고, 1960년엔 <장미의 기사>가 잘츠부르크 대극장 낙성 기념 작품
으로 상연될 때 이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해서 경험을 쌓았다. 프랑스의 명감독 앙리 조르주
크르조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슈만의 교향곡 제4번을 콘서트 필름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매체가 등장하자 1965년에 TV 영화회사 <코스모 텔>을 설립하고 비제의 <카르멘>을
TV영화로 제작해서 성공랬다. 이때만 해도 TV의 기술적 수준이 초보적 단계여서 시행착오와 이
에 따른 위험부담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TV영화 제작에 나선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첨단 매
체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이에 머물지 않고 1983년엔 영상 소프트(Soft) 회사 <텔레몬디알>을 설립하고 그가 운명할 때까
지 모두 50개 타이틀을 제작하는 의욕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갖
고 있었던 사람들은 카라얀이 지나치게 오디오나 비디오의 매체적 효과에만 매달려 있다는 비난
을 퍼부어 댔다. 그러나 매체의 속성과 그 파급 효과에 대한 철저한 신봉자로 자임한 그의 입장
에서 현대 전자문명은 그의 예술적 성과를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다중들에게 보여주고 들려
주는 최선의 길(道)이었다. 또한 이를 통해서 그는 현대문화의 상징적 인물로 자신을 형상화시킬
수 있었다.
일본의 전문 월간지 <레코드 예술>은 카라얀이 운명한 1989년 현재의 시점에서 그의 음반 판매
량을 1억 1,550만장으로 집계한바 있었다. 카라얀은 3개의 메이저 음반 메이커 및 또 다른 몇
개의 마이너 레이블과 녹음을 했는데, DG가 53%, EMI가 41%, LONDON 및 기타가 6%로 분
석됐다.
이 디스크에 수록된 연주 실황은 베를린 필이 전통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신년전야 음악회 NEW
YEAR'S EVE CONCERT> 1984년 판이다. 초빙된 연주자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안느 조피 무
터(Anne-SophieE Mutter)와 RIAS 실내 합창단이다. 카라얀에게 있어서 이 연주회는 특별한 의
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 해가 베를린 필 감독에 취임한지 30년에 해당되는 시기였고, 2년 전인
1982년에 자비네 마이어라는 여류 클라리넷 주자를 베를린 필의 단원으로 입단 시킨 것이 화근
이 되어 단원들과 심각한 마찰이 있었고, 그 마찰의 앙금이 말끔히 가셔지지 않은 상태에서 베를
린의 가장 큰 문화행사인 이 연주회의 바톤을 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카라얀은 바흐의 작품을 이 날의 곡목으로 선택하였다. 다음 해인 1985년이 바흐 탄생 300주년
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흐의 작품을 선택한 그의 또 하나의 의도는 이 연주회를 통해서 단
원들과 진정어린 화해가 있기를 희망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지휘봉을 쓰지 않았다. 지휘대도
치웠다. 대신에 쳄발로 앞에 앉았다. 바로크 시대의 관습을 도입한 것이지만 그의 의도는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휘와 제2 쳄발리스트의 역할을 맡으면서 음악의 흐름이 지극히 민주적으로 흐르도록 돕
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의 손은 단원들에게 군림하거나 요구하는 표정을 갖지 않았다. 일상의 다
른 공연에서 항용 감겨 있기만 하던 그의 눈도 이 날 만은 시종 정다운 표정으로 열려 있었다.
그로써 단원들과의 화해는 이룩되는 분위기였다. 자기의 결정에 불복하면 사퇴도 불사하겠다던
그의 고집도 여기에선 찾아지지 않는다. 높다란 지휘대 대신에 쳄발로 의자에 앉아 단원들과의
높이를 평등하게 조절한 그의 숨은 의도는 바흐의 음악과 더불어 아름답게 단원들의 가슴에 용해
됐으리라.
안느 조피 무터는 스위스 태생의 아름다운 바이올리니스트이다. 1978년 2월, 베를린 필의 연주
회에서 카라얀의 소개로 빈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 연주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의 자리로 올라선
행운의 여인이다. 한국에도 그녀의 음반들은 수 없이 소개되었고, 1984년 5월, 서울 공연에서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이 디스크에 등장한 그녀는 훨씬 뚱뚱해진 모습이다. 그에 못지않게 그의
음악도 여간 풍요해진 게 아니다.
특히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의 제2악장에서 들려주는 놀라운 서정미는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참으로 기분 좋은 체험을 그녀가 제공했다. <천재 소녀>가 아닌 놀랍게 성장한 한 예술
가로서의 무터를 여기에서 우리는 만난다. 자신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세계적 연주가로 성장한 무
터를 대하는 마에스트로의 눈길도 예사로운 게 아니다. 두 사람의 음악적 파트너십은 바하의 협
주곡을 너무도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다. 둘의 음악적 결과는 디오니서스적인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여 가장 아폴론적인 미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작품은 바흐의 <마니피카트>이다. 1723년, 라이프치히의 크리스마스 만과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장차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은 성모 마리
아의 찬가(루가 복음 제1장 46절∼55절)를 텍스트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카라얀의 이날 해석은
악기의 색체를 보다 풍요롭게 하는데 치중하는 인상이다.
트럼펫과 플루트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아마도 바흐가 의도한 본래적 음악에 근접코자 하는
생각과 바로크의 원형적 재현이라는 틀을 통해서 청중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찌됐든 그러한 그의 시도와 해석은 커다란 기쁨과 빛남으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프레데리카
폰 스타데를 비롯한 독창자들과 합창단의 연주도 넉넉한 여유와 아름다움으로 오케스트라와 화답
하고 어우러져 있다.
이 한 장의 디스크를 통해서 우리는 카라얀의 또 다른 모습과 만나는 체험을 갖게 되며, 과연 음
악을 통한 참 감동이 무엇인가를 나누게 된다. 흠 잡을 데 없는 깔끔하고 풍요한 음향, 베를린
필하모니 홀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 음악적 흐름에 유연하게 몸을 맡기는 카메라 워킹
등도 보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 음반
1984년도 베를린 필하모닉 새해 전야 음악회 실황
지휘 : 해르베르트 폰 카라얀
독주 : 안느 조피 무터
독창 : 주디스 브레겐(소프라노), 헬가 뮐러(메조 소프하노),
모리나리(테너)로버트 홀(바)
베를린 필,
RIAS 실내 합창단(지휘/우베 그로노스타이)
제작 : SONY 1990년.
레코드 번호 : SLV45 983
DIGITAL STEREO, LD
◈ 수록된 작품들
J.S. BACH (1685-1750)
Concerto No. 2 for Violin, Strings and Continuo in E major, BWV 1042
Magnificat, BWV 243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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