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범 (CD, DVD)
차이콥스키 : 교향곡 제5번 마단조 작품 64
지휘 :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악단 :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키스트라
제작 : 東芝 EMI, WVO-3510
컬러, 모노, 1982년 녹음(실황)
CD / Erato
◈ 유튜브 듣기
Tchaikovsky : Symphony No.5 in E minor Op.64
지휘 : Evgeny Mravinsky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http://youtu.be/GyJIJfOKzKY?si=WQlFkR-Wu2S0W5qe
<러시아의 거인>으로 불려지는 예브게니 므라빈스키(1903-1988).
차이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해석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며, 러시
아와 소련 음악의 영광의 시대를 이루어낸 최고의 지휘자라는 칭송을 받았던 음악가였다.
1988년 1월, 므라빈스키의 부음이 세계에 타전되면서 신문들은 "큰 별이 떨어졌다"고 썼다. 흔
히 정치적 거물들의 사망기사에 인용되었던 이 표현이 므라빈스키에게 적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도 그의 예술적 위상은 충분히 설명되는 것이리라. 실제로 당시 세계 음악계는 므라빈스키의 죽
음을 <한 시대의 종언(終焉)>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공산혁명이 발발하기 14년 전 1903년에 태어나 약관 35세의 젊은 나이로 소련 최고의 교향악
단인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발탁되어 85년간의 향년을 이어가면서 세계
음악의 거인으로 자신을 성장시킨 그의 음악생애는 20세기의 전형(典型)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
의 음악을 통해서 20세기의 기초를 다진 토스카니니의 격렬한 힘을 느끼게 되고, 또한 그의 예
술을 접촉하면서 슬라브적 기질의 진수(眞髓)를 실감한다. 최근의 러시아 음악이 서구적 취향으
로의 경도되는 현상을 대비시켜보면 므라빈스키의 죽음이 왜 한 시대의 종언인가를 새삼 확인하
게 된다.
므라빈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이다. 17세 때, 레닌그라드(공산 혁명 후 도시 이름이 이 이
름으로 변경됐다)대학에 입학해서 생물학을 전공하다가 2년 뒤에 중퇴하고 마린스키 극장의 무
대 요원으로 일했다. 이 일을 하면서 새삼 음악세계에 눈뜨게 된다. 극장에서 당시의 명가수 샬
리아핀, 알체프스키, 에르쇼프의 뛰어난 노래를 들었고, 지휘자들이 무용수들과 함께 연습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삼촌의 강력한 추천으로 전액장학금을 받고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들어가 작곡과 지휘법을 배웠
다. 이 학교에서 거둔또 하나의 귀중한 결실은 쇼스타코비치를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193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全소련 지휘자 콩쿠르에 응모해서 우승했다. 소련 정부는 전격적으
로 콩쿠르 우승자를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발탁한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기용이었다.
고참 단원들은 젊은 이 지휘자를 <오케스트라 학생>이라고 빈정댔다. 그러나 므라빈스키가 이
악단을 맡았을 때 그들의 연주 수준은 밑바닥이었다. 단원들은 의욕마저도 없었다. 므라빈스키의
조련 스타일은 혹독했다. 그렇게 악단의 연주기량은 놀라운 속도로 향상되었다.
1946년, 소련 정부는 그에게 <레닌 상> <사회주의 노동영웅> <소련연방 인민예술가> <레닌그라
드 음악원장>등의 칭호와 영예를 그에게 몰아주었다. 므라빈스키는 소련 음악계의 살아있는 국보
였다.
므라빈스키는 아주 독특한 측면이 있다. 다른 지휘자들과는 달리 교향곡을 비롯한 관혁악곡 부문
연주에만 치중했다. 협주곡 레퍼토리와 디스코그래피가 아주 적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
가운데도 딱 하나 예외가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프와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
브 리히터와는 협주곡을 함께 연주했다. 같은 핏줄을 나눈 동족이라는 특별한 유대의식의 결과이
기도 하겠지만, 위대한 예술가들과의 음악적 교감이 각별해서였다.
이 앨범에 수록된 연주는 1982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대연주 홀에서 모스크바 국영방송 프로
그램을 위해서 가졌던 연주실황이다. TV 프로그램의 오디오 사정에 맞춘 탓인지 음원은 모노다.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 디스크는 두 가지 이색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철저하게
므라빈스키 중심의 연출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휘봉 없이 시종 맨손으로
지휘하는 색다른 모습이다. 카메라는 일관해서 지휘자의 표정과 손을 따라 다니고 있다. 어떤 경
우에도 이처럼 철저하게 지휘자만을 좇는 연출은 없었다. 므라빈스키의 표정은 제3악장에서 잠
시 가느다란 미소를 띄었을 뿐 거의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지휘봉을 들지 않은 그의 두 손은 다양한 표정으로 감상자를 압도한다. 그 풍부하고도
예리한 표정의 손을 통해서 오케스트라는 통제되고 있다. 풍부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그의 손은
과장법이 없다. <운명의 주제>로 불려지는 제1악장의 주제에서나, 용장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1,
2악장의 비애를 일순에 씻어내는 제4악장의 저 유명한 개선(凱旋)의 주제에서도 그의 손 표정은
중용의 설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현과 관의 절묘한 대비에서도 그의 손은 미묘한 표정으로 일
관할 뿐 호사스러운 과장을 배격하고 있다. 참으로 찬탄을 금할 수 없는 지휘가 아닌가!
1973년, 일본 연주여행을 가면서 비행기를 피하고 나호트카 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상륙한 므
라빈스키의 일화는 그가 무대에서 얼마나 강한 지휘자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레닌그라드에서
나호트카 항 까지의 긴 여행만 해도 지쳐 떨어질 지경인데 다시 배를 타고 요꼬하마까지 건너가
서 또다시 자동차로 도쿄까지 달려가 곧장 무대에 섰으니 그 피로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을
텐데도 그 누구도 그가 그렇게 긴 여행 끝에 무대에 선 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지휘가 너무도
역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디스크에서 우리가 만나는 므라빈스키는 79세의 노인이다. 평상복의 므라빈스키는 의자에 앉
아서 지휘한다. 그러나 그의 손이 보여주는 표정이나 음악에서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가 보고 듣는 것은 그의 늙지 않는 예술혼이다.
차이콥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잠들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찍이 표토르대제에 의해 러시아 예술의 요람지로 조성된 그곳.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 역에서 한밤에 출발한 특급 침대열차 <붉은 화살>이 이튿날 이른 아침
레닌그라드의 모스크바 역에 도착하면 하얀 눈으로 덮인 넓은 대로와 털외투와 모자로 겨울을
사는 행인들, 안나 카레리나가 오르내린 네바 강의 다정한 모습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女帝 에카
테리나의 겨울 궁에 진열된 화려한 컬렉션들, 문화의 거리 <예브게니 오네긴>과 <라스코리니코프
가>들. 이런 모습들을 연상시키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므라빈스키.
이 앨범은 평생 차이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에 봉사한 위대한 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만
년의 모습을 꾸밈없는 화면으로 보여주고 들려준다. 오리지널 사운드는 모노지만 디지털 음향으
로 재녹음되고 있다. 색상이나 음향이 만족스럽지 못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므라빈스키의
풍부한 손 표정과 차이콥스키의 <운명>과 <개선>이 이를 충분히 보상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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