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범은 DVD
타이틀 : 스타니슬라브 부닌 도쿄 연주실황(1987년, 산토리 홀)
수록곡 :
쇼팽 : 녹턴 제 8번,
드뷔시 : 영상 제1집,
프랑크 : 토카타 등
제작 : CBS Sony, CSLM 922, Stereo LD
◈ 유튜브 듣기
Debussy: Images Livre I
피아노 : Stanislav Bunin
Suntory Hall, Tokyo (Japan)
http://youtu.be/Drrql9gqvSQ?si=1N07BFt9GqjYdZVJ
1985년에 실시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부터 <부닌 현상>이라고(이 현상은 일본이
특히 심했다) 불려질 만큼 놀라운 인기를 모았던 피아니스트가 스타니슬라브 부닌이다.
자고 일어나니까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 졌다고 하듯 부닌이야말로 콩쿠르 우승 하나로 하
루아침에 피아노의 우상이 된 인물이다. 그의 놀라운 인기는 미국의 밴 클라이번이 1958
년,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와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1962년, 뮌헨 국
제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에 입상했을때의 열기를 상기시킨다.
1967년,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부닌은 전형적인 음악 혈통을 이어 받았다. 할아버지는 스
비아토슬라브 리히터(S. Richter)와 에밀 길렐스(E. Gilelis)를 대가로 키운 겐리히 네이가
우스(G. Neugaus)이며, 아버지는 스타니슬라브 네이가우스 교수, 어머니는 모스크바 음악
원 출신의 뛰어난 피아노 교수이니 부닌에게 베풀어진 음악교육의 질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닌이 16살 때인 1983년,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 중앙음악학교 재학 시절, 파리에서 개최
된 <롱-티보 국제 콩쿠르>에 응모해서 이 콩쿠르 역사상 최연소라는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해서 화제를 모았다. 그후 모스크바 음악원 명교수 드렌스키에게 사사하던 중 1958년
의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면서 그의 이름이 명인 대열에 섰다. 이때 나이가 18세
이었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피아노만을 단일 종목으로 하는 경연대회로 5년에 한 번씩 열
린다. 물론 이 콩쿠르는 세계 최고라는 권위를 자랑하고 있고 대회가 열릴 때마다 늘 풍
성한 화제를 낳고 있다. 과제 곡은 쇼팽의 작품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도 다른 콩쿠르에
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쇼팽 전문 연주가를 배출시키겠다는 확고한 이상을 읽을 수 있
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배출된 상위 입상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타입으로 구분된다. 첫째 타입은 이 콩
쿠르에서 입상해서 비로소 유명해진 피아니스트들이다. 아담 하라시에비치, 크리스티안 치
머만, 당 타이손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타입은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확고한 홀로 서기
에 성공한 상태에서 이 콩쿠르에 도전해서 입상한 경우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마우리
찌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 우치타 미츠코 등이 이 타입에 속한다.
부닌은 후자에 속한다. 쇼팽 콩쿠르에 도전하기 2년 전인 1983년, 당시16세의 부닌은 쇼
팽 콩쿠르 못지않은 롱-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해서 이미 명성은 어느 정도 확고한 것이었
다. 거기에 더해 부닌은 다른 연주자들과 확연하게 차별되는 개성으로 쇼팽 콩쿠르가 진행
되는 기간을 통해 남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그의 연주를 들은 일본의 평론가
와타나베(渡邊學而)는 "그가 연주한 왈츠는 일반적인 쇼팽의 스타일과 매우 달랐다. 그의
연주는 강한 개성이 수반된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폭넓은 음악성과 뛰어난 재능에
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했다"라고 술회했다.
부닌이 범상치 않은 개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쇼팽 콩쿠르의 마지막에 열리는 수상 기념
연주회에서 청중의 앙코르에 답해서 연주한 작품이 하이든의 소나타였다는 데서도 발견된
다. 쇼팽 콩쿠르에서 쇼팽 이외의 작품이 연주된 것은 이것이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지금까지 많은 평론가들이 보낸 찬사들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획인 할 수 있겠다. 잘 알려져 있듯 쇼팽은 연주의 명인이
었다. 물론 그 시대에 쇼팽과 견줄만한 피아니스트도 여럿 있었다. 쇼팽이나 다른 사람이
나 한결 같이 그들이 작품을 쓸 때는 연주를 통해서 얻은 영감을 주요 재료로 삼았다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그러나 쇼팽만큼 "과연 무엇이 가장 피아니스틱한 것인가?"를 고뇌하
고 연구한 피아노 전문 작곡가는 흔하지 않다.
피아노 곡을 오케스트라나 다른 악기로 바꿔서 연주했을 때 대게는 그 악곡이 지니고 있
는 근본적인 악상은 유지된다. 그러나 쇼팽의 피아노 곡은 다르다. <바람의 정령 Les
Sylphides>이라는 발레음악으로 편곡된 그의 피아노 작품들을 들어보면 대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원곡의 독특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피아노 음악이 갖고 있는 미묘
한 음감과 정서, 인간의 원초적 감성에까지 이르는 불균형을 과감히 도입하고 있는 미학은
어떤 악기로도 대신할 수 없는 독특한 세계이자 상황인 것이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니시무라(西村郞)는 "피아노의 음이란 색의 배합 가능성을 위해 무수히
많은 물감이 준비된 파레트다"라고 말했다. 적어도 이 말이 쇼팽의 음색을 연구하는 피아
니스트들에겐 얼마나 상징적으로 들려지겠는가?
부닌의 연주는 그의 훤칠한 키와 부드러운 미소처럼 확고한 인상으로 들려지고, 또한 그의
표현 속에는 쇼팽의 미묘한 감각세계가 아주 독특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연주 도중 그의 시선은 허공을 향했다. 그것도 빈번하게. 그것은 버릇일 수도 있겠으나 오
히려 그가 깊은 사유를 갖는 연주자라는 인상이 더 강했다.
부닌은 콩쿠르이후 각고(刻苦)의 길을 걸었다.
그 첫 번째의 성과를 이 앨범에서 만나게 된다. 7곡의 쇼팽을 연주하고 난 뒤, 부닌은 드
뷔시의 <영상 제1집>과 프랑크(C. Franck)의 <토카타>(앙코르 곡)를 연주한다.
쇼팽의 피아니즘의 세계가 긴장과 이완, 균형과 불균형을 교묘히 오가며 그 속에 무한한
감성의 지평을 연 것이라고 한다면 드뷔시의 음악은 인상주의라고 하는 일종의 점묘적 묘
사법을 통해서 피아노로 하여금 훨씬 새로운 감각에 눈뜨게 하는 독특한 세계를 갖는 것
일 게다. 부닌은 이러한 서로 다른 두 세계에 놀랄만한 응답으로 청중에게 어필한다. 한
음 한 음에 새겨지는 시적 감성과 아티큘레이션, 플레이징의 본능적 설정이 감상자를 사로
잡는다. 쇼팽의 달인이랄 수 있는 루빈스타인이나 상송 프랑소와(Samson Francos) 연주
에서 만날 수 없었던 강렬한 쇼패니즘(Chopanism)을 부닌은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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