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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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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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카잘스의 인생 소묘(素描)

  
진실과 아름다움과 평화를 위한 생애  

"나는 카탈라니아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스페인의 한 지방입니다만, 카탈로니
아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 였습니다. 나는 카탈로니아의 짤막한 민
요 한 곡을 연주 하겠습니다. 이 민요는 [새의 노래]라고 불려지는 것인데, 하
늘을 나는 새가 <평화! 평화! 평화!> 라고 노래 합니다. 이 노래는 바하나 베토
벤의 음악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이 노래엔 나의 조국 카탈로니아의 혼(魂)이
깃들어 있습니다."

1971년, 당시 95세의 카잘스는 국제연합이 주는 [평화상]을 받으면서 전세계
의 대표들을 향하여 위와 같은 인상적인 메시지(Message)를 전하고, 운신(運
身)마저 어려운 노구(老軀)를 움직여서,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힘있게 첼로를
부둥켜안고 카탈로니아의 민요 [새의 노래]를 연주한다. 일찍이 음악가가 평
화상을 받는 예도 드문 일이었거니와 그처럼 투철한 애국심으로 전 생애를 일
관했던 예인(藝人)도 흔치 않았기에 유엔(UN)본부 단상에서 울먹이는 음성으
로 토해낸 그의 수상연설은 어느 정치가의 연설도 미칠 수 없는 강렬한 감동으
로 다가선다.

영국 BBC 방송이 옴니버스로 제작한 이 레이저디스크는 [새의 노래(Song of
the Bieds)]라는 타이틀과 [파블로 카잘스의 초상(A Portrait of Pablo
Casals)]이라는 부제로 발표된 것이다.

음반의 처음은 카잘스의 노년·청년·유년의 초상(肖像)이 오버랩 되면서 시작된
다. 이어서 국제연합 사무총장이 그에게 평화상을 수여하면서 "돈 파블로, 귀
하는 전 생애를 진실과 아름다움과 평화를 위해 헌신 하셨습니다"라는 수상 이
유를 밝히는 당시의 화면이 인서트 된다.

카잘스의 전기(傳記)를 쓴 로버트 발토크(Robert Baldock)가 첫 번째 증언자
로 나와서 카잘스가 바르셀로나 악보점에서 발견한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
곡]의 악보를 연구하고, 상세한 연주법을 예시(例示)함으로써 첼로 연주사에
눈부신 금자탑을 쌓았던 일을 소개한다.

이 음반에 수록된 내용은 카잘스의 예술과 인간, 그의 정치관, 그의 아내들(3
명)에 관한 기록과 증언들이 그가 평생을 통해서 녹음한 명연주들을 배경 삼아
서 파노라마처럼 엮어진다. 옴니버스의 양식을 빌린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BBC는 카잘스의 생애를 찾아 나서는 것을 열차의 궤도(軌道)로 상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궤도가 등장할 때마다 카잘스의 생애는 또 한번 다른
단계로 옮겨 가 있는 것이다.

이번엔 카잘스 본인의 회상(回想)이다. 스페인 내란의 와중에서 카탈로니아의
비극이 벌어지고, 파리에서 이러한 비극적 소식에 접한 카잘스는 심각한 신경
증(神經症)에 걸려 빛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때 한 사람이
찾아와서 "카탈로니아로 가자"고 권한다. 그가 말한 카탈로니아는 스페인의 그
의 조국 땅이 아니고 카탈로니아를 닮은 프랑스의 <프라도>를 말하는 것이었
다. 이런 연유로 카잘스는 프라도 지방에서 오랜 기간 거주한다. 많은 사람들
이 미국으로의 이민을 권했지만 카탈로니아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프랑
코 총독의 스페인을 승인했기 때문에 절대로 미국에 이민하지 않겠다고 다짐
한다.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또는 Pau Casals)는 1876년 12월 29일, 카탈로
니아 지방의 벤트레르에서 태어나서 1973년 10월 22일, 푸에리토 리코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일 뿐 아니라 휴머
니스트로 알려진 인물이다.

카잘스의 아버지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였다. 카잘스는 11살 때부터 피아노,
오르간, 바이얼린을 공부하다가 첼로로 전공을 바꿨다. 소년 시절부터 바하의
음악에 경도(傾倒)되어 매일 아침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연주했다
고 전해진다. 이러한 습관은 평생토록 변하지 않았다.

첼로 연주에 자신이 붙자 카잘스는 카지노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바르셀로나
의 카지노는 단순한 도박장이 아니고 연극, 음악, 춤을 공연하는 장소로도 이
용되었기 때문에 카잘스가 이곳에서 연주하게 됐던 것이다. 이때 그의 연주에
대한 평판이 얼마나 높았던지 "카잘스가 연주한 뒤 콘서트 홀이 대성당으로 변
했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할 정도 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카잘스는 스페인의 황
태후(皇太后)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주목을 끌어 그녀의 초대를 받게 되었고,
이어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카잘스의 명성을 전해 듣고 그를 어전연주(御前
演奏)에 초대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의 출발은 이렇게 화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 1차세계대전에서 대학살이 자행되는 현실에 직면한 카잘스는 한때
자살을 생각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카잘스는 [파우
카잘스 관현악단]을 창설하고 지휘를 시작했다.

저 비극의 스페인 시민전쟁 때 카잘스는 열렬한 왕당파(王黨派)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남불(南佛)에 있는 프라도로 망명하고, 이곳을 근거지로해서 스페
인 난민을 돕는 일에 팔을 걷고 나선다. 그리고, 1947년, 그는 "프랑코가 스페
인을 지배하는 한 공개적인 연주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무대를 떠난
다.  뿐만 아니라 프랑코 총독의 스페인을 승인한 국가에서도 연주하지 않겠다
고 선언한다.

카잘스가 다시 공개적인 음악세계로 돌아온 것은 바하 사망 200주년에 해당되
었던 1950년이었다. 부다페스트 4중주단의 제 2 바이얼리니스트로 활동하던
알랙산더 슈나이더가 프라도에서 [바하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카잘스에게 이
음악제에 참가해 주기를 간청한 결과 였다. 슈나이더의 끈질긴 설득에 카잘스
의 고집이 꺾인 것이다. 이 음악제엔 당시의 거장들인 요제프 시게티, 아이작
스턴, 루돌프 제르킨 등이 참가해서 큰 화제가 되었다. 특히, 카잘스는 이 음악
제에 참가한 청소년들에게 그가 연구한 새로운 연주기법을 소개하여 첼로 주
법의 개선에 획기적인 지평을 열게된다.

카잘스의 생애엔 4사람의 여성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카잘스의 음악적 재능
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아들을 위해 헌신한 그의 어머니이며, 또 한 사람은 그
의 첫 번째 아내이자 첼리스트인 폴투갈 출신의 길헤르미나 쓰지아, 그리고 카
잘스의 두 번째 아내인 수전 메트카프이다. 첫 번째 아내와는 1906년에 결혼해
서 1912년에 헤어졌고, 두 번째 아내와는 1914년에 결혼해서 1957년에 이혼했
다. 첫번 이혼의 사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두 번째의 이별은 수전이 사회주
의 운동에 지나치게 열중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회 프라도 음악제에 참가했던 푸에리토 리코 출신의 아름다운 첼리스트 마
르타 몬테스가 그의 세 번째 여인이다. 푸에리토 리코는 그의 어머니의 향리
(鄕里)여서 카잘스에겐 잊을 수 없는 사모(思慕)의 땅 이었다. 카잘스는 회고
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나는 순간 망명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의 옛고향을
생각했다." 카잘스는 그녀가 마치 자기의 일족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1956년 12월, 마르타의 고향 푸에리토 리코로 이주했다. 그녀와 1957년 8월 3
일, 산 후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하여 80세의 카잘스와 20세의 마르타
는 산 후안 교외에 그림 같은 아름다운 집에서 신혼에 들어갔다. 1973년 10월
22일, 산 후안의 한 병원에서 36세의 아내를 남겨두고 96세의 생애를 마쳤다.
임종을 앞둔 카잘스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악은 마르타의 청에 의해서 생전
에 그가 "나의 아들"이라고 끔찍이 사랑했던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
Eugene Istomin>이 연주하는 바하의 음악이었다.

세기의 거장 카잘스가 쓰던 첼로는 18세기의 명장 카를로 베르곤찌의 작품이
다. "지나치게 개성이 강해서"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잘스가 별세한 이후 마르타와 이스토민 사이에 애정이 싹터 두 사람은 1975
년 2월, 결혼식을 올렸다. 때문에 이 음반에 출연해서 남편 카잘스를 회상하는
마르타의 이름이 <마르타 카잘스 이스토민>으로 소개되고 있다.

유진 이스토민은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의 문하에서 피아노 수업을 받
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스승과 비슷한 연배에 있는 많은 거장들의 사랑
을 받는 행운을 만날 수 있었다. 브루노 발터, 프릿츠 라이너, 레오폴드 스토코
프스키는 이스토민이 프로페셔널 아티스트로 자리잡는데 결정적 후원자가 되
어 주었고, 거장 파블로 카잘스는 이스토민에게 부친과 같은 애정을 쏟아주었
다.

이스토민과 카잘스가 최초로 만난 때는 1950년이었다. 카잘스는 <프라드 페스
티벌>의 창설 공연에 당시 25살의 청년 이스토민을 독주자로 초청했었다. 당
시 카잘스는 80세 였고 그의 아내 마르타는 20세의 앳된 소녀 신부였다. 지휘
자와 독주자로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이후 카잘스는 넘치는 사랑으로 이스토
민의 후원자이자 스승이 됐고 마르타 역시 허물없는 사이로 남편의 제자를 대
했다. 카잘스와 마르타는 이스토민과 처음 만난 때로부터 17년을 더 살았다.
카잘스의 향년은 96세 였다. 스승은 운명하기 얼마전 제자를 불러 "마르타를
행복하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42세였던 이스토민은 독신이었다.
물론 마르타와 결혼할 꿍심이 있어서 독신을 지키고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노스승께서 느닷없이 "내 아내를 맡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스토민
은 이 제의를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제자에게 맡기는 스승의 신뢰와
그 제의를 받아들인 제자의 공경(恭敬)은 음악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이 음반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감동은 옛시대의 세계 음악계를 풍미했었던 거
장(巨匠)들의 연주 모습을 보는 것이다. 피아노의 거장 알프레도 코르도, 바이
얼린의 귀재 쟉 티보, 지휘계의 거물 조지 셀, 카잘스가 이끌었던 [말보로 축
제 관현악단], 지금도 노익장을 보여주는 바이얼리니스트 유디 메뉴인, 카잘스
와 4중주를 연주하는 아이작 스턴, 알랙산더 슈나이더, 밀튼 게팀즈, 피아니스
트 미에치슬라브 호르조브스키의 모습들은 대부분 흑백사진의 아련한 우리들
추억의 페이지에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는 명인들이다.

** 수록된 작품들

1. 바흐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3 번 중 부레  * 1970년, 홀랜드 예술가 스튜디
오에서
2. 바하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1번
3. 슈베르트 : 피아노 트리오 제1번 중 제2악장
4. 카탈로니아 민요 : 새의 노래
5. 드보르작 : 첼로 협주곡 나단조 작품104 중 제1악장
6. 바하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3번
7. 카잘스 : 오라토리오
8. 브람스 : 피아노 5중주곡 작품 34
9. 버클리 마스터 클라스 장면
10. 바하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1번 중 전주곡
11. 슈베르트 : 피아노 트리오 제1번 중 제 1악장
12. 브람스 : 현악 6중주곡 제1번 중 제4악장
13. 랄로 : 첼로 협주곡 중 제2악장
14. 바흐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5번 중 전주곡
15. 슈베르트 : 피아노 트리오 제1번 중 제3악장
16. 드보르작 : 첼로 협주곡 중 제2악장
17. 슈베르트 : 피아노 트리오 제1번 중 제2악장
18. 카탈로니아 민요 : 새의 노래 * 1971년, 국제연합 콘서트 실황

**** 관련 사이트
    http://www.cello.org/casals/page2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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