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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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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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로 본 종교음악사 / 초국민적이고 통일적인 신앙고백


종교음악은 그것이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서 2개의 부분으로 대별된다. 하
나는 전례(典禮, liturgia)음악이며, 다른 하나는 라우다(lauda)와 같은 대중적
인 종교가요에서 오라토리오 등 대규모의 예술작품에 이르는 비전례음악이
다. 전례음악은 종교단체나 교파에 따라서 또다시 세분되고, 비전례음악도 매
우 다양한 분류가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교회음악은 초국민적이고 통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신·구교
를 합해 약 10억 명 이상에 달하는 방대한 신도수와 5대양 6대주에 걸쳐 광범
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공간적 측면에서 교회는 당연히 초국민적이다. 또한 하
나의 신앙고백이라는 신학적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교회는 당연히 통일적인 존
재인 것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 국민적·지방적 전통을 존중하는 경향이 뚜렷
해지고 이에 따라서 교회음악에도 상당한 변화가 밀려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
지만 적어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를 개최하기
이전까지의 교회음악은 초국민적·통일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티칸 공
의회는 모든 전례를 각 나라가 자국어로 하도록 결정했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처가 음악에도 대단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의 세계로 진출하면서 대단한 박
해를 받았다. 그러나 4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이 이 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함
에 따라 급격한 교세의 확장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지
고 교회도 동서로 나뉘어지는 운명에 처한다. 서방의 로마교회는 ‘공번된 교회’
라는 의미를 지니는 가톨릭(catholic)이라는 이름을 짓고 로마 교황이 베드로
의 후계자라는 ‘교의’를 선포하며, 동방교회는 ‘정교회’(正敎會)라는 이름으로
주로 비잔티움 문화권을 중심으로 그들 고유의 종교문화를 계승하기에 이른
다.

로마교회와 동방교회는 공히 전례를 중시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교리에 따라
예배형식의 보편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모든 전례는 공적 행위로 인식되었다.
개인적 신앙 내용의 차이는 인정되지 않았던 셈이다. 따라서 모든 신도들은 교
회가 정한 공식적인 기도문, 찬양에 평균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
다. 로마교회의 미사를 비롯한 성무일과(聖務日課), 동방교회의 성체예의(聖
體禮儀)등 시과(時課)가 대표적인 전례이다. 로마교회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교회음악의 기본으로 삼았다. 단선율, 무반주로 노래되는 그레고리오 성가는
훈련된 성가대에 의해서 불려졌다. 전례가 극도로 복잡해짐에 따라서 일반 신
도들의 참여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레고리오 성가 역시 노래하기가 쉬
운 것이 아니었기에 전문적 집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일반
신도들은 교송(交誦)이나 응창(應唱)을 통해서 극히 제한적인 음악활동에 동
참할 뿐이었다.

♣ 이탈리아의 작곡가들-팔레스트리나·알레그리·스카를라티·로시니
교회음악 역사에 있어서 이탈리아는 단연코 중심적 역할을 맡아온 국가였다.
그리스도 교회가 최초로 공인되어 국교로 정착된 곳이 로마였고, 사상 최초의
교회음악 전문가를 육성하는 교육기관(스콜라 칸토룸)이 세워진 곳도 로마였
다. 암브로시오 성가와 그레고리오 성가 등 단선율 시대를 거쳐 중세기의 다성
음악기에 정량기보법이 정착되는 등 이른바 아르스 노바(ars nova, 신예술)시
대에 이탈리아 음악은 점차 논리적 기틀을 잡아간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팔레스트리나의 노력으로 순수하고 청징한 합창음악의 세계를 구축하여 가톨
릭 음악에 결정적으로 공헌하고 바야흐로 이탈리아는 유럽 음악문화의 중심지
로 떠오르게 된다.

팔레스트리나는 102곡의 미사곡, 모테트와 기타 예전음악 450곡 정도, 이탈리
아어로 쓴 종교적 마드리갈 56곡 등 주로 종교음악을 썼다. 물론 그의 작품목
록에는 83곡의 세속적 마드리갈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만년에 이르
러 불경스러운 사랑을 주제로 음악을 쓴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마음 아파했
다”고 술회했다. 팔레스트리나의 종교음악은 대부분 대위법적인 양식에 의해
작곡되었다. 리듬은 독립되어 있고 서로 다른 몇 개의 성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주로 4성부를 썼다). 그러나 그 역시 호모포니적이거나 화현적(和絃的)
인 기법을 이따금 채용하기도 했다. 2중창인 ‘스타바트 마테르’(성모애가)는 완
전히 호모포니적이고 ‘비탄의 교송’은 화현적인 작품이다.

화성적 음악이 싹트는 16세기에 교회 칸타타가 창시되고, 대화풍의 ‘라우다’라
는 종교극 음악이 등장하여 오라토리오의 기초를 만들기에 이른다. 18세기에
피아노가 발명되고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수많은 새로운 교회음악을 발표했
다. 바흐와 헨델이 태어난 1685년에 태어난 스카를라티에 관한 기록들은 매우
제한된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들에 관한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형편
이다. 아마도 이러한 것은 1755년, 리스본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서 그가
지니고 있던 자료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존하는 그의 교회음악은 2
곡의 미제레레, 마니피카트 D단조, 4성 미사 G단조, 성모애가, 살베 레지나,
찬가(신앙선언과 고백) 등이다.

로맨티시즘이 개화하는 19세기의 이탈리아는 온통 오페라로 휩싸인다. 간간
이 교회음악이 발표되지만 이 역시 주로 오페라 전문 작곡가들의 사적인 또는
특별한 동기에 의하거나 여기(餘技)에 속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예로 로시니와 베르디의 작품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를 통해서 가장 뛰어난 오페라 부파 작곡가로 존경받고 있는 로시니의
오페라 작품은 무려 39곡을 헤아린다. 그 대부분은 타고난 뛰어난 재능과 극장
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어우러진 우수한 작품들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
다. 이로써 그는 명성과 부를 동시에 획득했고이탈리아의 오페라 전통에 또 하
나의 위대한 금자탑을 세웠다. 그러나 로시니는 38세 때 ‘윌리엄 텔’을 완성한
뒤 다시는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 그후 약 40여 년의 후반 생애를 통해서는 ‘성
모애가’(1832) ‘사울’(1834) ‘성모애가’의 개작(1842), ‘작은 장엄미사’(1863) 등
의 종교음악과 ‘민중의 찬가’(1864) 등 합창곡, 몇 곡의 성악곡들, 피아노와 각
종 악기를 위한 ‘늘그막의 과오’(1857∼1868) 등을 썼을 뿐이다. 여느 작곡가
의 경우에서는 찾기 어려운 특이한 작곡가의 삶을 그는 영위했다.

그의 교회음악은 위의 작품 이외에 ‘세 개의 종교적 합창곡’(신앙·희망·사랑)이
있다. 대체로 그의 교회음악은 세속적이라고 할 만큼 밝은 표정의 분위기, 아
름답고도 친근감 주는 선율, 색채적 감각과 감정의 기복이 심한 오케스트레이
션으로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그의 교회음악은 대단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종교음악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 / 하슬러·쉬츠·바흐·베토벤·브람스·하이든·모차르

중세 이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음악문화는 이탈리아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
하고 있었다. 로마로부터 선교된 독일인들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배웠지만 이
탈리아적인 취향이 강한 것에 저항을 느꼈는지 그것을 멜리스마 방법을 써서
독일적인 스타일로 바꾸는 시도를 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외래음악을 독일
화했던 것이다.

로마 멸망 후, 로마인들이 독일로 들어오고 그들에 의해서 음유시인들이 발생
했다. 그러나 그들이 치중했던 장르는 세속가곡이었지 교회음악이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 이전까지 독일의 교회음악은 거의 외래적인 것으로 보는 것
이다. 종교개혁 이후, 합창음악이 발달하고, 이것이 독일음악의 건실한 기초
가 된다. 오라토리오와 칸타타에도 합창이 중심을 차지했고, 미사와 모테트에
도 같은 경향이 밀고 들어갔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하슬러에 의해서 기초
가 마련되었다. 하슬러는 이탈리아의 감미로움과 독일의 중후함을 결합시켜
이탈리아 음악의 나쁜 영향을 배제시키고 독일적인 새로운 전통을 확립시키
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이룩했다. 그의 칸초나와 마드리갈은 섬세한 선법으로
작곡되었고, 다성합창양식에서조차 그는 독일적인 전통의 확립을 의식하고 있
었다. 그의 종교음악을 대표하는 저 유명한 수난 곡 ‘피 흐르는 주님의 머리’는
바흐가 특히 사랑했던 작품으로 그의 ‘마태 수난곡’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에서 인용할 정도였다.

하슬러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쉬츠에 의해서 다성적 교회음악이 마련된다. 바
흐보다 100년 앞서 태어나 활약한 17세기 독일 최대의 작곡가인 쉬츠는 13세
때 헤센 변경 백작 모리츠 밑에서 소년 성가대원으로 있었고, 악장 게오르크
오토(마르틴 루터의 음악적 협력자인 발터의 동역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베네
치아에서는 화려한 복합창의 대가인 조반니 가브리엘리를 사사했다. 가브리엘
리는 쉬츠를 특별히 사랑하여 그를 성심성의껏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임종시엔
반지를 유품으로 주기도 했다.

그는 1619년에 가브리엘리의 가르침을 기념하는 복합창 양식의 ‘다윗 시편곡
집’을 출판했다. 1623년, 독일 오라토리오의 최초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부활
제 오라토리오’(작품 3), 다음해엔 4성부 종교 합창곡인 ‘신성 가곡집’(작품 4)
을 잇따라 출판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밖에 쉬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신성 교향곡집’ ‘십자가 위의 7가지 말씀’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3곡의 수난
곡 (누가, 요한, 마태)이 있다.

하슬러와 쉬츠의 음악은 바흐에 의해서 완성되고 승화되기에 이른다. 바흐는
루터 교회를 신봉했던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종교음악의 대부분이 루터교의
예전(禮典)을 위해서 작곡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미사곡들과 모테
트를 씀으로써 종파의 벽을 넘어서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하슬러 이래 독
일 작곡가들의 전통이었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칸
토르(음악감독)에 취임했는데, 그의 종교음악은 주로 이 무렵에 집중적으로 작
곡되었다. 대작 B단조 미사와 약 3백곡에 이르는 칸타타가 이때의 수확이다.
특히 칸타타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장르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작
품을 통해서 독일 코랄의 전통을 확립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코랄은 일종
의 음악적인 설교였다. 이밖에 4개의 미사곡과 7곡의 모테트, 마니피카트, 마
태·요한 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부활제 오라토리오, 다수 종교가곡들
이 있다. 모두가 주옥 같고 경건한 바흐 신앙심의 유산이다.

고전시대엔 하이든에 의해서 고전양식에 의거한 오라토리오와 미사가 완성되
었다. 1791년 5월 23일부터 6월 1일까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
델 음악제가 열렸다. 1천여 명의 연주자들이 참가한 이 연주회에 ‘자도크 신부’
등 헨델의 저명한 작품들이 소개됐는데, 그 가운데는 ‘메시아’도 있었다. 객석
엔 영국 방문을 통해 눈부신 성공을 거둔 하이든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로
부터 8년 뒤, 하이든은 대형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초연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그를 깊이 감동시킨 헨델의 ‘메시아’가 ‘천지창조’를 쓰도록 했던
것이다. 1798년 4월에 초연된 이후 10년 만에 ‘천지창조’는 하이든의 어떤 작품
보다도 유명한 작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밖에 하이든의 작품으로는 12곡의
미사, 2곡의 테 데움, 2곡의 살베 레지나, 성모애가, 2곡의 봉헌송 등의 교회음
악이 있다.

하이든의 고전양식은 다시 모차르트에 의해서 세련미를 더하게 되며, 베토벤
에 의해서 확대되고 심화된다. 이로써 독일은 세계음악을 제패한다. 베토벤은
20세 때 두 곡의 칸타타를 썼고, 33세 때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37세에 ‘미사 C장조’, 54세 때 ‘장엄미사’를 써서 종교음악 부문에서도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베토벤 스스로가 “나의 최대의 작품이다”라고 자신감을 보였
던 ‘장엄미사’는 바흐의 ‘B단조 미사’와 더불어 고금을 통해 가장 위대한 미사
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악곡의 스케일이나 길고 복잡한 음악적 구성 때문
에 이 ‘미사곡’이 비록 교회의 전통에 속하지 않는다 해도 ‘진정한 교회음악’이
라는 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가 하면 모차르트의 종교음악은 소수의 몇 곡을 제외하면 일반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숫적으로 꽤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20여 곡의 미사
곡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처음으로 가졌던 직업은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대주
교에게 전속되어 교회가 요구하는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에
쓴 미사곡 가운데 ‘대관식 미사’ ‘장엄미사 K.337’ ‘작은 미사 K.192’와 모테트
‘춤춰라, 기뻐하라, 행복한 영혼이여’는 특히 유명하다.

로맨티시즘의 시대에도 독일은 종교음악에 있어서 종주국이었다. 슈베르트·브
람스·멘델스존·리스트·바그너·브루크너 등이 이 시대의 거장들이다. 브람스의
모테트는 모두 7곡에 달한다. 작품 29가 2곡, 작품 74가 역시 2곡, 작품 110이 3
곡으로 되어있다. 이들 모테트들은 비록 작곡된 시기는 다르지만 거의 예외없
이 대위법을 사용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모테트라는 종교음악이 대단히 오랜
전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악파와 베네치아의 대위법 작곡가
들, 특히 바흐의 모테트가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역사성과 계보성을 생각했
기 때문에 브람스 역시 대위법을 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브람스의 모테
트들은 16세기로부터 연유된 모테트의 오랜 전통을 계승한 작품이라는 해석
이 가능한 것이다.

또 하나, 그의 최대의 예술적 교회음악으로 평가되는 ‘독일 레퀴엠’이 있다. 전
통적으로 레퀴엠은 라틴어 가사를 사용하지만 브람스는 독일어를 썼고, 교회
의 전례용이 아닌 연주용으로 썼다는 점만으로도 크게 주목받는 작품이다.

♣ 영국의 작곡가들-버드·헨델
영국 종교음악의 역사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생전에 성가가 영국 캔터베
리 대주교에 의해 소개됨으로써 시작되었다. 10세기에 이미 400개의 파이프를
갖는 오르간이 교회에 설치되었고, 14세기엔 카논 수법을 발전시켰다. 종교개
혁 시대에 토마스 탈리스가 쓴 송가(頌歌, Anthem)를 비롯한 교회음악은 유
럽 최고의 수준이었고, 이것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큰 영향을 주기에 이른
다. 17세기엔 윌리엄 버드와 기번스 같은 뛰어난 작곡가들이 세련미 넘치는 작
품들을 무수히 발표하였다. 버드의 음악 속에는 본질적으로 영국적인 성악성
이 가득 차 있어서 신선한 느낌을 받게 한다. 버드의 양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좋은 예는 그의 모테트 ‘나는 살아 있는 빵이다’와 그라듀알레 제2권
의 제37번인 ‘너희를 내버려두지 않으리라’이다. 특히 두 번째의 작품은 최초
의 음에서부터 웅장한 환희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게 치솟아오르는 기독
교적인 즐거움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이 곡을 따를 만한 것이 없을 정
도이다.

버드의 교회음악은 다양한 장르에 걸쳐서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는데, 미사곡
13곡, 모테트 120곡, 그라듀알레 109곡, 앤덤 62곡 등이 현존한다. 특히 그의
미사곡은 영국인이 쓴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버드가 세상을 떠난 이래 1670년 무렵부터 영국은 이탈리아 음악의 결정적 영
향 밑으로 들어간다. 영국적인 음악은 자취를 감추고 이러한 현상은 고전시대
에까지 미친다. 영국은 단지 대륙음악의 소비처로 전락하는 것이다. 근대와 현
대에 와서 벤자민 브리튼이나 본 윌리엄스 같은 천재에 의해서 영국 창작계가
간신히 체면을 되찾기에 이르고, 브리튼이 발표한 ‘전쟁 레퀴엠’이 거의 유일
한 영국 교회음악의 수확으로 치부되는 형편이다. 만일 헨델이 조국 독일을 떠
나 영국에 귀화하지 않았다면 바로크 시대마저도 교회음악에서조차 소비국 신
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헨델의 종교음악은 오라토리오에 집중되고 있다. 다른 작곡가들의 경우처럼
미사곡 등 다양한 장르를 선택하지 않고 오라토리오와 앤덤에만 집중하고 있
는 것이다. 그는 모두 20곡의 오라토리오를 썼다. 그런데 이들 오라토리오는
대체로 세 가지 종류로 나뉘어진다. ‘합창 오페라’ ‘합창 칸타타’ ‘합창 드라마’
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합창 드라마가 예술적 교회음악에 속하는 것이
며, 대본의 내용은 대부분 구약성서에서 가져와 이 작곡가의 개성에 의해 웅대
한 양식에 담음으로써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극적인 개성을 갖고 있다.

한편, 이 세 가지의 어느 종류에도 속하지 않는 작품이 있다. 다름 아닌 ‘메시
아’이다. 메시아는 일련의 합창 드라마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이나 ‘마카베우스의 유다’같이 드라마로서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감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누구에게나
이 작품은 직접적인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독특한 작품인 것이다.

♣ 프랑스의 작곡가들-조스캥 데 프레·풀랑
프랑스 음악의 역사도 성가로부터 시작된다. 9세기까지는 ‘갈리아 성가’라고
불려지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변종(變種)이 불려졌는데, 사실은 그레고리오성
가의 발전에 프랑스가 기여한 사실은 대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메츠의
네우마’로 유명한 메츠, 세쿠엔티아의 발생지로 알려진 지미에지 수도원과 생
마르샬 수도원은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 낯익다. 생 마르샬 수도원은 후일 폴리
포니 음악과 결부되어 사상 최초의 악파로 등장하기도 한다.

12세기에서 13세기에 활동한 트루바두르와 미네징거들은 라틴어에 의한 종교
적인 음악극을 활발하게 연주했다. 이 시대에 폴리포니 음악의 중심은 파리로
옮겨지고 노트르담 악파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들에 의해서 모테트가 시도
되고 아르스 안티콰(ars antiqua, 옛예술) 음악이 완성된다. 14세기에 프랑스
에도 아르스 노바 시대가 열리고 프랑스 악파의 거장 기욤 드 마쇼라는 위대
한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이들에 의해 미사곡이 만들어지고 모테트가 왕성하
게 발표되는데, 그것들은 모두 새로운 리듬의 원리에 기초한 시도였다.

르네상스에 들어서자 부르고뉴 악파와 플랑드르 악파가 등장하여 프랑스의 음
악을 구체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조스캥 데 프레와 기욤 뒤파이의 이름
은 이 시대의 가장 출중한 종교음악가들로 기록되고 있다. ‘음악의 군주’로 불
려질 만큼 유명했던 조스캥 데 프레는 20여 곡의 미사곡, 95곡의 모테트 등 많
은 교회음악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미사곡인 ‘라솔파레미’는 1502
년에, ‘팡제 링구아’는 그의 사후인 1539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이 가운데 ‘팡
제 링구아’는 대단히 널리 알려진 미사곡으로서, 흔히 ‘단성으로 노래되는 환상
곡’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질 만큼 자유로운 형식으로 씌어진 대작이다.

프랑스 음악은 바로크시대에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다. 교회음악은 부르봉 왕
조의 궁정 예배당을 중심으로 육성되는데, 협주양식에 기초한 모테트가 이 시
대의 값진 수확이다. 미사곡 또한 이 시대의 작품들이 오늘에까지 높은 평가
를 받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음악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기세에 눌
린 일종의 쇠퇴기를 보낸다. 오직 베를리오즈라는 인물이 교회음악에서 프랑
스의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가 되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그의 후배에 속하는 구
노와 라모·포레에 이르러 다시 부흥의 기회를 잡는다. 포레의 레퀴엠은 그래
서 더욱 값진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 프랑스는 풀랑크와 메시앙이라는 보배를 배출함으로써 종교
음악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느낌이다. 풀랑크의 작품 세계에서 종교음악이 상
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과연 어
떤 동기로 인해서 그가 종교음악에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별다른 조명이 되지 않았던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 월간 <객석>에 1998년에 기고한 원고
** 사진 / 이탈리아의 종교음악 작곡가 Gregorio Allegri(1582 – 1652)

** 이 글을 퍼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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