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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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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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린카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년 6월 1일 ~ 1857년 2월 15일)




◈ 사진
윗 사진 / 52세 때의 사진
아래 사진 / 30대의 글린카. 야넨코(Yanenko)가 그린 초상화

◈ 음악듣기
Ruslan and Lyudmila, Overture
Orchestre de Paris, Paavo Järvi
http://youtu.be/r-NDks9cunU


국제적으로 처음 인정을 받은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러시아 국민악파의 창시자. 오페라 <루슬
란과 류드밀라(Ruslan and Lyudmila)>로 유명하다.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A Life for
the Tsar)>도 러시아를 중심으로 종종 상연되고 있고, 러시아 혼례 음악을 주제로 한 관현악
환상곡 <카마린스카야(Kamarinskaya)>도 콘서트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1804년 6월 1일, 노보스파스코예(Novospasskoye)서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까지 할
머니 손에서 길러졌고, 10살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3살엔 상트페테
르부르크로 가서 귀족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기숙학교에 들어가 6년간 학교생활을 보냈다. 이
학교에서 영어, 페르시아어, 라틴어, 수학, 동물학 등 다양한 교육을 받는 한편, 피아노와 작
곡법을 당시 러시아에서 평판이 높던 아일랜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녹턴>이
라는 피아노 소품 장르를 창시한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에게 배웠고, 살롱 음악의
작곡도 시도하였다. 20살 때 철도성에 취직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25살 때까
지 피아니스트와 가수로서도 활동했다.      

26살 때 친구이자 테너 가수인 이바노프(Nikolai Kuzmich Ivanov)와 여행에 나서서 독일과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멘델스존, 베를리오즈, 벨리니,
도니제티 등 여러 저명한 음악가들을 만났고, 밀라노 음악원에서 바질리(Francesco Basili)에
게 작곡법을 배웠다. 특히 벨리니와 도니제티가 이탈리아의 민족성을 강조하는 작품들을 쓰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기도 러시아로 돌아가서 러시아적인 음악을 해야 하겠다는 각성을 하게 되
었고, 이를 실천에 옮겨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의 시조가 될 수 있었다.

글린카는 밀라노를 떠나 귀국 길에 올라 알프스를 넘어 베를린으로 가서 5개월간 지그프리트
덴(Siegfried Dehn)에게 제대로 된 작곡 수업을 받았다. 덴이 워낙 뛰어난 교수여서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울 작정이었지만 아버지가 별세했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귀국했다. 이 무렵 그
는 러시아 주제에 의한 카프리치오(피아노 두오를 위한 작품)와 역시 러시아 민요를 주제로
삼은 미완성의 교향곡 을 작곡했고, 매력적인 여가수에게 <콘트랄토를 위한 6개의 연습곡>을
써서 헌정한 작은 연애사건도 있었다. 글린카는 아버지 장례를 마치면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이 가수와 재회할 계획이었지만 함께 국경을 넘기로 했던 누이동생의 독일인 하녀가 국경 통
과에 필요한 서류를 가져오지 않는 바람에 그녀와의 재회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글린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리아 이바노바(Maria Petrovna Ivanova)를 만나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리아는 남편의 음악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도무지 눈치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요령부득의 여인이었다. 게다가 늘 불평과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결국 둘은 이혼했고 마리아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고 글린카는 어머니와 누이동
생 세스타코바(Lyudmila Shestakova)와 살았다.

32살 때 그의 첫 오페라인 <이반 수사닌>을 완성했다. 17세기의 농부이자 애국적 영웅인 이
반 수사닌(Ivan Susanin)이 폴란드가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적
사건을 내용으로 한 오페라인데, 작곡 과정부터 이 오페라에 관심을 가졌던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오페라 제목을 <황제에게 바친 목숨>이라고 고칠 것을 요구해서 그 요청에
따라 변경했다. 이 오페라는 황제가 임석한 궁정극장에서 초연됐다. 황제는 크게 만족했고 많
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 결과 1837년 1월 1일자(33세)로 제실성가대(帝室聖歌隊, 현재의 상
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합창단) 악장에 임명되었고 생활도 안정을 얻었다(연봉 2만5천루불).
이어서 두 번째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완성했지만 흥행엔 실패했고, 40살 때 파리로
가서 베를리오즈와 친분을 맺었고, 이어서 스페인 등을 여행한다. 44살엔 바르샤바에 머물면
서 <카마린스카야>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으로 차이코프스키와 러시아 5인조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후대에 받았다. 그 후에 다시 파리로 갔다가 선생님이었던 덴을 만나러 베를
린으로 갔다가 1857년 2월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글린카는 러시아 음악사상 최초로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방향과 길을 열었다. 러시아 국민주
의의 길을 연 것이다. 그가 가져다 쓴 오페라 형식은 유럽 스타일이었지만 그 속에 담은 것은
러시아의 역사와 러시아의 음악이었고, 이것이 당시 큰 영향력을 지녔던 평론가 세로프
(Alexander Serov)와 스타소프(Vladimir Stasov)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고, 이들의 적극적인
지도로 5명의 젊은 작곡가들(5인조, 힘센 소수)이 글린카가 개척한 국민주의 음악의 길에 동
행하면서 러시아 국민주의음악이 당시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민주의 음악의 가장 중요
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
  
◈ 주요 작품
♣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제목이 화근이 돼 공연이 금지됐다가 72년만인 1989년에 다시 공연할
수 있게 됐다. 이 작품의 수난은 공연금지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탈린 정권 하인 1939년에
는 고로데츠키의 왜곡된 대본에 의해 <이반 수사닌>이란 이름의 개정판이 등장했다. 이 개정
판에 대해 훗날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회상록에서 “러시아 농민이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데
대해 스탈린이 흥미를 보인 것은 자신을 위해 인민이 희생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비판한
바 있었다. 이 오페라 중 아리아 <솟아오르는 태양>은 단독 가곡으로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 관현악곡
서곡 D장조, 서곡 G단조, 안단데 칸타빌레와 론도 D단조, 왈츠 환상곡 B단조
스페인 서곡 1번, 스페인 서곡 2번

♣ 실내악
7중주 E플랫 장조, 현악 4중주 D장조, 현악 4중주 F장조, 비올라 소나타 D단조 (미완성)
그랜드 피아노 6중주 E플랫 장조

♣ 피아노곡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 F장조, 마주르카 G장조, 녹턴 E플랫 장조
핀란드 노래 D장조, 이별의 왈츠 G장조, 3개의 푸가, 왈츠 B플랫 장조
그랜드 왈츠 G장조, 폴로네즈 E장조, 폴카 D단조

♣ 성악곡
합창곡 '러시아 노래', 다수의 가곡, 합창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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