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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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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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오르프 (Carl Orff, 작곡가, 1895-1982)


◈ 생애
1895년 7월 10일 뮌헨에서 파울라와 하인리히 오르프 사이에서 테어났다. 그의 가문은 바이
에른 토박이였고 남자들은 대부분 황실 육군에서 근무한 군인집안이었다. 아버지 하인리히 역
시 육군 장교였고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5살 때 피아노, 오르간, 첼로 등 여러 악기들을 연
주할 수 있었다고 하니 영재형 음악가라 하겠다. 심지어는 어렸을 때 인형극 음악을 작곡했을
정도로 조숙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오르프 작품의 첫 출판이 16살 때였으니 이 역시 대단한 기록이다. 그 시절의 작품은 대부분
독일어 가사에 곡을 붙인 노래들이었고, 대체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풍을 모방했으면서
도 이미 이 작품들 속엔 후일 나타나게 되는 그의 특별한 경향도 엿보이는 작품들이라는 평가
를 받는다. 그리고 이 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텍스트로 삼아서 바리톤
독창, 3개의 남성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상당한 규모의 작품을 썼는데 완성하지는 못했다
고 한다. 이듬해엔 드뷔시의 음악에 자극받아서 18세기 일본 에도 시대에 공연되기 시작한 가
부키(歌舞伎)와 닌교조루리(人形浄瑠璃) 장르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데라코야>(寺子屋 서당,
마을학교라는 뜻)를 토대로 한 음악극 <희생 犠牲 Gisei>을 썼다. 이 작품에서 오르프는 이전
의 오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오케스트라 용법을 도입해서 주목 받았다. 이 오페라는
당시에도 지금도 썩 환영받는 작품은 아니지만, 지난 2010년에 한때 오르프가 활동했었던 다
름슈타트 극장에서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이 작품을 세계 최초로 무대에 올렸다.

1914년, 뮌헨음악학교(현 뮌헨 국립음악대학교) 재학 중에 1차 대전이 발발하자 군대에 징집
된 오르프는 전선에서 여러 번 부상을 입었다. 제대 후 뮌헨에 돌아와 하인리히 카민스키
(Heinrich Kaminski)를 사사했고, 그 영향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음악에 흥미를 가졌다. 졸
업후에 뮌헨, 만하임, 다름슈타트에서 지휘를 했다. 만하임에서 활동하던 1920년대 중반에 스
트라빈스키의 <결혼>을 듣고 자극을 받아 음악의 기본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고, 그 결과물로
1607년에 몬테베르디가 발표했던 오페라 <올페오>의 독일어 버전을 만들어서 이를 1925년에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연출해서 무대에 올렸지만 부정적 평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
이 후일 극장음악에 대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1924년 뮌헨으로 가서 무용가 도로시 귄터(Dorothee Günther)에게 음악교육학을 배우고 그
녀와 함께 귄터 학교를 설립하면서 무용과 음악의 조화를 통한 음악교육 방법을 창안하고 카
를 맨들러(Karl Maendler)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타악기들을 어린이 신체에 맞는 사이즈로
<오르프 악기>를 만들어낸다. 1930년엔 교육용 악곡들(Schulwerk)을 작곡했고, 오르프 악기
를 사용하는 학생 합주단을 이끌고 전국 순회공연을 하는 등 음악교육의 보급을 위해 힘썼다.

1937년, 그의 대표작 <카르미나 부라나, Carmina Burana>를 작곡하여 그만의 독특한 작풍
을 보였다. 당시는 나치당이 독일을 통치할 때였는데,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개성의 <카르미나 부라나>에 나치 당국이 크게 주목하고 고무되어서 그들의 정치선전
에 이 작품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나치당 기관지인 <푈키셔 베오바흐터 Völkischer
Beobachter 민중의 감찰자)>에 "방해받을 수 없는 생명 본능의 힘을 찬미하는" 작품이라면서
그 간명한 리듬과 멜로디는 “민중의, 언제나 파괴당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힘”을 묘사한 것
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어서 "이것은 명확하고 질풍 같으며 정련된 음악이다. 즉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유대인 작곡가 멘델스존을 경멸했던 나치가 오르프에게 멘델스존을 대체할 수 있는 <한 여름
밤의 꿈>을 써 달라는 의뢰를 하기도 했다. 당시 나치 치하 독일 음악계의 수장이었던 리하르
트 슈트라우스도 같은 주문을 받았지만 거절했는데 오르프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카
르미나 부라나>에 대한 나치 수뇌부의 호감은 나치즘의 핵심 이념과도 닮은 점이 많았다. 유
대인을 극도로 혐오했던 나치는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이어진 동방 종교로 의식하고 있었
는데, 그리스도교 전래 이전의 다신교나 이교적인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서 그들과의 동질성
을 발견했고 그래서 이 작품을 엄청 높이 평가했다. <헬레나와 비너스>를 찬미하는 <카르미나
부라나>는 나치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리스 연극과 중세 신비극의 영향을 받은 다른 작품들이 뒤이어 등장했
다. 1943년 <카툴리 카르미나, Catulli carmina>를 발표하고 이후 <안티고네, Antigone>,
<아프로디테의 승리, Trionfo di Afrodite> 등 그리스 비극을 제재로 한 많은 작품을 썼다.
그중 <카툴루스의 노래>(1943), <아프로디테의 승리>(1953)가 대표적이고, 이들은 <카르미나
부라나>와 더불어 그의 3대 세속 칸타타로 불려진다. <카르미나 3부작(Carmina Trilogy)>,
또는 <트리온피, Trionfi 승리> 3부작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당연히 오르프에게 나치 부역 의혹이 제기되었다, 오르프는 나치 지지자도
아니었지만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어중간한 스탠스를 유지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유
리한 상황들을 이용했다. 오르프 음악의 스타일은 나치의 입장에서 보면 대중선동을 위해 안
성맞춤이었고, 그래서 나치는 그들의 선동 수단으로 오르프의 음악을 이용했다. 그 결과 오르
프 자신도 제법 큰 이득을 누렸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음악가로서 활동했다. 이런 태
도 때문에 전후에 나치 부역 문제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본인은 줄기차게 반나치주의자였다
고 주장하고 다녔다. 게다가 1954년에 결혼한 세 번째 부인이 <생의 한가운데>를 쓴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인데, 루이제 린저 역시 나치 부역 문제로 공격을 받아 오르프를 괴롭혔
다. 루이제 역시 자기는 친나치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구체적인 증거와 증언들이 쏟아지면
서 많은 비난을 당했다.

오늘날 제3제국 시대 연구자들의 시각은 “오르프는 나치와 좌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기회주
의자였다”고 설명한다. 오르프가 나치 당적을 갖지는 않았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나이
들어 퇴직하고 나치가 유럽을 정복하면 제국 음악의 최고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의식
했다는 것이다.

◈ 나치시대의 일화 하나
1943년 2월 27일 밤,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의 심리학 교수 쿠르트 후버(Kurt
Huber)가 자택에서 게슈타포에게 연행되었다. 뮌헨 대학생들로 구성된 반체제 저항조직 <백
장미 Weiße Rose>와의 연계가 발각돼서 였다. <백장미> 조직 자체는 젊은 대학생들이 중심
이었다. 후버는 이들에게 조언을 하며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뮌헨에서 활동
한 한국인 망명 학자 이미륵도 당시 후버 및 ‘백장미’ 멤버들과 절친했다. 이미륵은 소설 ‘낙
동강은 흐른다’의 작가이기도 하다). 연행 다음날, 후버 교수와 절친했던 오르프는 늘 하던 대
로 아침에 후버 교수의 집에 들렀다. 사색이 된 후버 교수의 부인 클라라가 오르프에게 “남편
이 백장미와 관련이 없다고 나치 당국에 증언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오르프는 굳은 표
정으로 돌아 나왔다. 구명의 시도는 하지 않았다. 후버 교수는 고문을 당하고 백장미 핵심 멤
버인 숄 남매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나치 독일이 패전하고 뮌헨이 미군에게 점령되자 오르프는 미군에게 소환되었다. 수사당국이
보기에 오르프는 서류상 나치 인사가 아니었다. 나치나 그 정책을 찬양하는 작품을 작곡한 일
도 없었다. 수사 종결과 함께 그는 <회생 가능분자 gray unacceptable>로 분류되었다. 미군
점령하의 독일에서 면책을 받고 활동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풀려난 오르프는 죽은 후버에게
용서를 비는 편지글을 1946년 1월에 썼다. 같은 달, 그는 후버의 부인인 클라라를 우연히 만
났다. 클라라는 죽은 남편의 추모집을 엮고 있다고 말했다. 오르프는 자신이 쓴 편지를 보여
주었고 클라라는 추모집에 이를 포함시켰다. 후버 가족이 오르프를 용서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뒤에도 클라라는 남편이 체포되었던 때를 상기할 때마다 오르프에 대한 유감을 잊지 않고
표현했다.

오르프는 4번 결혼했다. 1920년 알리스 솔셔(Alice Solscher)와 결혼했다가 1925년에 이혼했
고, 딸 고델라(Godela, 1921–2013)를 얻었다. 1939년 오르프 음악치료의 창시자 게르트루드
빌러트(Gertrud Willert)와 결혼했는데 14년 만에 이혼했고, 1954년엔 소설가 루이제 린저
(Luise Rinser)와 결혼 후 5년 만에 갈라섰고, 1960년 현재 카를 오르프 재단의 이사로 있는
리셀로테 쉬미츠(Liselotte Schmitz)와 4번째 결혼했다

◈ 작품목록
애가 Lamenti
올페우스 Orpheus (1924, 개정 1939)
아리아드네의 슬픔 Klage der Ariadne (1925, 개정 1940)
거친 춤 Tanz der Spröden (1925, 개정 1940)
윌리엄 버드의 <종>에 의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엔트라타, (1539–1623) (1928, 개정 1941)
어린이를 위한 음악 (Gunild Keetman과 공동 작품) (1930–35, 개정 1950–54)
작은 춤곡 Tanzstück (1933)
거리의 화가 Gassenhauer
3부작 칸타타 / Carmina Burana (1937), Catulli Carmina (1943), Trionfo di Afrodite
(1953)
작은 동화 Märchenstücke (Fairy tales)
달 Der Mond (1939)
현명함 Die Kluge (1943)
한 여름밤의 꿈 Ein Sommernachtstraum (1952, reworked 1962)
바이에른 세계 극장 Bairisches Welttheater (Bavarian world theatre)
오페라 베르나우어의 여인 Die Bernauerin (1947)
음악극 아스투툴리 Astutuli (1953)
그리스도 부활의 희극 Comoedia de Christi Resurrectione (1956) 부활절 연극
아기의 탄생을 찬양하는 기적극 Ludus de Nato Infante Mirificus (1961) 성탄절 연극
세계의 큰 극장 Theatrum Mundi
안티고네 Antigonae (1949)
폭군 오이디푸스 Oedipus der Tyrann (1959)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1968)
시간의 종말 De temporum fine comoedia (1973, reworked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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