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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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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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디아 불랑제(Juliette Nadia Boulanger, 작곡가, 교육자,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1887–1979)



◈ 유투브 감상
Nadia Boulanger : 오르간 또는 하모니움을 위한 세 개의 소품 중에서 전주곡
오르간 연주 : Renée Anne Louprette
워싱턴 국립 대성당 오르간 연주, 2022년 4월 13일
http://youtu.be/SkT6S3O6OMU


나디아 불랑제는 타고난 음악가였고,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지니고 있었지만,
동생 릴리 불랑제의 때 이른 죽음으로 작곡을 중단하고 교육에만 전념했다. 게다가 작곡에 대한
재능은 있었지만 특별하게 평가될만한 작곡가로서의 개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도 작곡
을 포기하고 교육자로서 최선을 다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동기였다.

교육자로서의 그녀의 헌신 덕분에 20세기와 그 이후의 서양 음악사는 엄청난 풍요를 누릴 수 있
었다는 평가를 받는 분이다. 작곡가와 수많은 연주자들이 나디아 불랑제와의 만남과 가르침 덕분
에 진정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리고 자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가르친 제자들 중에 특히 영어권에서 인물들이 많은데,
미국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지휘자로 대성한 존 엘리어트 가디너(John Eliot Gardiner),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Dinu Lipatti),
지휘자 이고르 마르케비치(Igor Markevitch),
재즈 뮤지션 퀸시 존스(Quincy Jones),
미니멀리즘의 거장 작곡가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탱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Ástor Piazzolla)
등이 그녀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대성한 음악가들이다.

불랑제는 무려 70여년을 교육자로 살았고, 그 오랜 세월 동안
파리 국립음악원
파리 고등음악사범학교
줄리어드 음악학교,
예후디 메뉴인 음악학교,
롱지 스쿨,
런던 왕립 음악대학,
런던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다.

불랑제는 미국과 유럽에서 메이저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첫 번째 여성이기도 하다.
BBC 교향악단,
보스턴 교향악단,
할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아론 코플랜드와 스트라빈스키 작품의 세계초연을 지휘했다.

나디아 불랑제는 1887년 9월 파리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할머니 쥘리에트는 성악가였
고, 아버지 에르네스트는 작곡가로 1835년에 로마대상을 받았으며 파리고등음악원의 성악과 교
수를 지냈다. 어머니는 러시아 출신 성악가였다.

불랑제의 어린 시절의 일화 가운데 하나. 다섯 살 때의 어느 날, 갑자기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자 어린 불랑제가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서 방금 소방차가 지나가면서 울린 사이렌 소리를
피아노로 표현해 냈다. 이를 본 부모는 딸의 음악적 감수성에 놀라워하면서 그때부터 노래와 음
악의 기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7살 때부터는 음악원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시작
했다.

9세의 나이에 파리고등음악원에 들어간 불랑제는 솔페즈 경연대회에서 첫 해엔 3등을 했지만 다
음 해엔 1등을 하는 등 우수한 학생이었다. 화성학에서도 1등을 했고, 작곡경연에서도 1등을 했
다. 거기에 더해 오르간, 피아노 반주, 푸가에서도 1등을 차지했다. 이 음악원에서 화성학, 대위
법, 푸가, 오르간, 피아노 반주 등의 디플로마를 받았다. 음악원 재학 시절에 가톨릭에 입문했고
이후 평생토록 독실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았다.

17살 때부터 자기 아파트에서 개인레슨을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 레슨을 했는데 이 개인
레슨을 그녀는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했다. 이 레슨을 일러서 “집에서”라고 사람들이 불렀는데,
이 레슨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이미 이름을 얻은 프로 음악가들, 이를테면 스트라빈스키, 발레리,
포레 등이 모두 이 개인레슨에서 그녀에게 배웠던 학생이었다.

1907년, 신설된 페미나 무지카 음악원에서 피아노 기초와 반주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모교의 화
성학 교수 앙리 달리어의 조교로 활동했다. 1908년엔 라울 푸뇨(Raoul Pugno)와 피아노 두오
콘서트를 가졌고, 이 연주가 좋은 반응을 일으키자 연주회를 계속 이어 갔다. 그리고 로마대상에
또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대상을 따지는 못했고, 오히려 당시 16살이었던 동생 릴리가 로마대상
을 획득했다. 그녀에겐 충격이었다.

1910년, 아네트 듀도네(Annette Dieudonné)가 불랑제의 문하로 들어왔다. 기초부터 그녀를 가
르쳤고 이후 14년간 그녀의 공부가 끝날 때까지 지도했다. 아네트는 불랑제의 가장 가까운 친구
와 조력자가 되었고 그들의 관계는 불랑제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녀에겐 또 한 사람의 친
구가 생겼다. 스트라빈스키가 쓰고 디아길레프가 안무한 <불새> 초연에 참가한 불랑제는 스트라
빈스키의 비범한 재능을 인정하고 친구가 되어 그와의 우정을 평생 이어갔다.

1912년, <마티니 뮤지컬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1908년에
그녀의 칸타타 <인어>와 2개의 가곡, 푸뇨의 피아노 소협주곡을 연주했다. 1914년에 유럽에 전
쟁이 일어나자 불랑제와 동생 릴리는 <프랑스-미국 국립음악원>을 설립하고 전쟁 전에 음악가였
던 병사들에게 음식, 옷, 동, 편지 등을 전달해주는 자선활동을 했다. 그러던 가운데 동생은
1918년 3월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음악원 졸업 후 마들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908년, 세 번의 도전 끝에 로마대상에
서 <인어, La Sirène>라는 타이틀의 칸타타로 2위에 입상하고 이후부터 작곡에 몰두한다. 또한
로마대상을 수상한 직후 파리음악원 화성학 교수로 임용되면서 교수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던 가
운데 1918년에 여동생 릴리 불랑제가 결핵에 걸려서 24세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동생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과 교육에만 전념할 것을, 그리고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선언한다.

1921년부터 퐁텐블로의 아메리카 음악원에서 교수로 죽을 때까지 학생들을 가르친다. 한편, 파
리 고등 음악사범학교의 교수가 되어 1939년까지 재직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미국에 초대되어 연주회, 지휘, 강연을 했다. 1940년에서 1946년까지는 미국
에 체류하면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1950년에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풍텐블로의 아메리카 음악원 교장이 된다.

◈ 동생 릴리 죽음 이후의 생애
1919년, 20여회의 콘서트를 자신의 작품과 동생의 작품으로 치러냈고, 자신이 세운 페미나 무지
카 음악원은 전쟁 기간 동안 문을 닫았다.

그 무렵 알프레드 코르토와 오귀스트 망쥬가 파리에 새로운 음악학교, 파리 고등 음악사범학교를
열었다. 불랑제는 이 학교에서 화성학, 대위법, 음악분석, 오르간, 작곡을 가르쳤다. 또한 망쥬의
요청으로 음악평론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해서 평생토록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1920년부터는 한동안 쉬고 있었던 작곡도 다시 시작했고, 이듬해엔 여성의 권익 증진을 위한 두
번의 콘서트도 열었는데, 이후엔 어떤 형태의 페니니즘에도 간여하지 않았다.

◈ 퐁텐블루 미국 학교(The American School at Fontainebleau)
1921년, 미국인을 위한 프랑스 음악학교를 퐁텐블루에 열고 불랑제는 화성학 교수로 부임했다.
평생 동안 이 학교의 교수로 봉직한 불랑제는 매년 여름이면 자신의 별장이 있는 가르장빌레에
학생들을 초청해서 점심과 저녁을 대접했는데 미국의 저명한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도 이때 불랑
제에게 배웠다.

나이 먹어가면서 불랑제는 편두통과 치통으로 고통 받는 날이 점차 늘어났고, 이로 인해 평론 쓰
는 일을 중단한 데 이어서 작곡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오로지 가르치는 일에만 집중
했다.

작곡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 포레가 만류하고 나섰다. 그러나 불랑제는 “나는
지금까지 쓸모없는 음악을 썼다”고 포레에게 말했다. 절필의 뜻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
언이었다.

1924년, 월터 담로쉬, 아더 주드슨, 뉴욕 교향악협회가 불랑제를 미국에 초청했다. 그녀는 그해
마지막 날에 거친 항해 끝에 뉴욕에 도착했다. 미국에 머문 동안 동생 릴리가 쓴 오르간 작품 독
주회, 아론 코플랜드가 불랑제를 위해서 쓴 오르간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을 연주했고,
1925년 2월 28일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1927년에 거슈윈이 불랑제를 찾아와 작곡 레슨을 받기를 희망했다. 약 30분간 거슈윈과 대화한
그녀는 “난 당신을 가르칠 게 없다”며 레슨을 사절했다. 거슈윈이 블랑제의 이 말을 가는 곳마다
되풀이 하면서 자기 자랑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35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불랑제의 운신에 자유가 찾아왔다. 지휘도 다시 시작했다.

◈ 여행, 음반
1937년에 BBC 방송의 해설 리사이틀 참석을 위해 런던으로 갔다. 그때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
라를 지휘했는데, 이는 런던 필을 지휘한 최초의 여성이라는 기록으로 남았고, 그녀의 지휘는 좋
은 반응을 불렀다.

불랑제는 몬테베르디를 대단한 열정으로 탐구한 결과 6종의 음반에 그의 마드리갈을 수록해서
발표했다(HMV 레이블). 이 음반으로 몬테베르디를 좋아하는 새로운 팬이 광범위하게 형성되기도
했지만, 그녀가 현대악기로 마드리갈을 연주한 데 대해 비판하는 평론가도 있어서 이것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은 류트와 테오르보의 반주가 붙는다. 그래서 이런 시비가
일어났다.

힌데미트가 펴낸 <음악 작곡의 기술>이라는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불랑제가 했지만 그는 이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없었다. 후일, 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갔지만 이 일에 대해 둘 사이에 더 이상의 토론릉 없었다.

1937년, 그녀는 BBC방송의 해설 독주회를 위해 영국을 다시 찾았고,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를 지휘해서 포레의 레퀴엠과 몬테베르디의 <닌파의 애가>를 연주했다. 로열 필하모닉 역사상 최
초의 여성 지휘였다.

1938년에 미국 투어에 다시 나셨다. 하버드 대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연주나 강의를 했고, 보스
턴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보스턴 교향악단 역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였다. 3개월간 있으면서 100
여회의 해설음악회와 콘서트를 가졌고, 스트라빈스키의 협주곡 <둠바튼의 경마> 초연을 지휘했
다.

1938년, 쟝 프랑소와의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를 지휘한 앨범,
디누 리파티와 두오 피아노로 반주를 맡은 브람스의 <사랑의 노래> 앨범,
역시 리파티와 연주한 브림스의 4손용 월츠 op.39 앨범을 발표했다.

1939년엔 여성 최초로 카네기 홀에서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또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워싱턴 국립 교향악단도 지휘했다.  

◈ 2차 세계대전과 이민
1940년 11월 6일, 불랑제는 뉴욕에 도착했다. 이에 앞서서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학생들이 무사
히 피신하도록 도왔다. 1942년부터 피바디 음악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클라스에서
음악사, 화성학, 대위법, 푸가, 관현악법, 작곡법 등을 가르쳤다.

◈ 만년
1946년 1월, 프랑스로 복귀한 그녀는 파리 음악원 피아노 반주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고,
1953년엔 퐁텐브루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1956년, 오랜 친분을 갖고 있었던 모나코의 레이니에 황태자와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식에서 음악을 맡아서 이 결혼식이 세기의 결혼식답게 우아한 음악으로 멋지게 장식되는데
기여했다.

이듬해에 다시 미국을 찾았다. 이번엔 6주간에 걸친 투어였다. 방송출연, 강의, 4개의 TV 프로그
램 촬영을 했다.

1962년엔 터키를 여행했고, 그해 말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1966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영국에도 가서 메뉴인 학교, 런던 왕립 음악대학, 런던 왕립 음악 아카데미, BBC에서 강의했다.

불랑제는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일했다. 그녀는 1979년에 숨졌다. 유해는 여동생 릴리와 함께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 디스코그래피
26종 음반 리스트
http://www.discogs.com/artist/1788372-Nadia-Boul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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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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