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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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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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Bach, Johann Sebastian, 작곡, 오르가니스트, 1685-1750)


◈ 유투브 감상 /
골드베르그 변주곡 전곡(글랜 굴드 연주)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N2YMSt3yfko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의 남
부와 북부를 나누는 튀링겐 지방의 작은 마을 아이제나하에서 요한 암브로지
우스 바흐와 엘리자베트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 연대는 공교롭게
도 헨델(Handel)과 동일하다.

제바스티안의 아버지는 마을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켰고 교회에서는 오르가니
스트로 일한 음악가였다. 큰 형 크리스토프 역시 오르도루프에서 교회 오르가
니스트로 일하는 등 가족 거의 모두가 훌륭한 음악가였다.그의 부친은 큰 아들
이 훌륭한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차에 제
바스티안 역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열심히 바이얼린을 가르쳤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크리스토프는 물론, 바흐 가문에서 배출된 많은
음악가 친척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어린 바흐에게 다양한 음악교육을 시켰다.
특히 후일 그의 장인이 된 요한 크리스토프 (아버지의 사촌 형)가 열심을 다해
가르친 오르간 연주법은 두고두고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
도 제바스티안이 9살 되던 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고 말
아졸지에 고아가 되고 만다. 부모의 장례를 마친뒤 제바스티안은 큰형의 집으
로 옮겨져 양육된다. 큰형은 어린 동생을 사랑으로 극진히 돌보아 주는 한편,
동생이 습득해야 할 갖가지 음악교육을 베풀어 주게 되지만, 15세가 되는 해
에 큰형에겐 새로 낳은 자녀들이 늘어나게 되어 가계(家計)형편도 빠듯해지고
방도 모자라게 되는 등 더이상 제바스티안이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아
형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때마침 뤼네브르크의 성(聖)미하엘 교회에서는 성가대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제바스티안은 성가대원의 자격이 반드시 가난한 소년이어야 한다는 소식을 듣
고 같은 처지의 친구인 에르트만과 함께 1700년 3월 어느날 아침, 눈물을 흘리
는 형수와 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나 무려 200마일(약321km)이란
먼 거리를 걸어서 뤼네브르크로 향했다.그들에겐 마차를 탈 여비가 없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그날 둘이 오르도루프를 떠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들이 떠
난 직후 이 마을에 무서운 전염병이 덮쳐 많은 생명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하
느님은 장차 인류 문화에 위대한 기여를 하게 될 재목을 이렇게 보호했던 것이
다.

** 마리아의 사랑을 받으며
뤼네브르크 성(聖)미하엘 교회학교의 성가대에서 제바스티안은 음악에 관한
수많은 책들과 다양하게 비치된 악보들을 섭렵하는 한편, 수사학, 논리학, 희
랍어, 루터파 신학, 프랑스어 등을 배웠다. 물론, 오르간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아 오르간의 구조에 관하여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러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17세에 성(聖)미하엘 학교를 떠난 제바스티안은 몇군데 일자리를 알아 보던
중 고향에서 멀지 않은 아른시타트의 신교회가 오르가니스트를 구한다는 소식
을 듣고 응모, 채용이 결정되어 매우 좋은 조건으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아른시타트에서 그는 많은 친척들과 기쁨의 재회를 가졌는데 그중에서도 그
의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은 마리아 바르바라를 만나게 된 일이었다. 마리아는
제바스티안의 큰아버지인 요한 크리스토프의 막내딸이었으니 그에겐 육촌 누
이동생이 되는 셈이다. 그녀는 나이도 비슷한데다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
로 자란 점이나 음악에 특별한 열심이었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애정
에 굶주려 있다는 사실에서 제바스티안과 너무도 흡사한 점이 많았다. 그 무
렵 마리아는 그녀의 큰 아버지인 마르틴 펠트하우스와 '황금의 관'으로 불려지
는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제바스티안도 그 집에서 살게 되어 둘 사이엔 어느
듯 순수한 사랑이 싹트게 되었다.

제바스티안의 일과는 일요일과 월요일의 기도회와 목요일의 연주회에서 오르
간을 연주하고, 라틴어 학교의 학생 합창단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 밖의 시
간엔 작곡, 쳄발로, 바이얼린을 연마하는 일에 전념하였는데 이 모든 일에 마
리아의 보이지 않는 협력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서 제
바스티안은 말할 수 없는 위안과 애정을 가졌으나 사랑의 정염으로 번민하는
것을 피하고 더욱 더 부지런히 정진해서 자기의 지위를 굳건히 만든 다음 그녀
에게 구혼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짐짓 마리아의 헌신적 사랑을 모른척 하기
도 했다.

** 오르간의 대가 북스테후데를 만나다
제바스티안은 자기 관리에 신중했고 또한 매사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려고 노력
하기는 했으나 천성적으로 타고난 강직한 성격과 노여움을 참지 못하는 불같
은 성격이 이따금 폭발하곤 했는데 그것은 대부분 라틴어 학교의 합창단을 지
도할 때 였다.어느날 연습 도중 한 나이 많은 학생이 같은 곳을 자주 틀리자 화
를 벌컥 내면서 "늙어 빠진 산양같은 놈!"이라고 욕을 퍼댔다. 이에 상대방이
결투를 청해 둘 사이엔 싸움이 벌어지게 됐다. 항상 칼을 차고 다녔던 제바스
티안은 몽둥이를 들고 덤벼드는 그 학생을 칼을 빼들고 맞받아 옷을 다 찢어
놓았다. 만일 사람들이 달려들어 이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면 상대를 죽일뻔한
위험 천만한 사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러한 제바스티안의 성격을
좋아하고 더욱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합창단원과의 결투가 있은 뒤 그는 합창지도를 일방적으로 거절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성직회의에서 재고를 요청하자 제바스티안의 마음은 아른시타트를
떠나기 시작한다. 1705년 10월, 그는 4주간의 휴가를 얻어 평소 흠모해 왔던
오르간의 대가 북스테후데(Buxtehude)의 연주를 듣기위해 뤼베크로 향한다.
그곳에서 들은 북스테후데의 <코랄 환상곡>에 깊이 매료되어 이른시타트로
귀임할 날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오르간 음악 연구에 몰두하게 된
다. 결국 4주간의 휴가가 4개월로 연장되기에 이르고 이 기간동안 그는 마리아
에게 조차 단 한번도 편지를 보내지 않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러던
어느날,평소 제바스티안을 눈여겨 보아오던 북스테후데가 자기 집으로 식사
초대를 했다. "그래, 뤼베크에서 지내기가 어떤가?" "네, 선생님. 하루하루가
늘 새로울 만큼 오르간에 대한 공부가 재미있고 또 유익합니다. 항상 선생님
께 감사드리고 있읍니다."  "제바스티인군! 자네도 몇 번 보긴했지만 내 딸 마
르가레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만 괜찮다면 내사위를 삼고 싶네
만..."  "...."  "만일 자네가 내 사위가 된다면 내 나이 이미 늙었으니 자네에게
내 자리를 양보해 주겠네."  "....."

북스테후데에겐 안나 마르가레타라는 딸이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제바스티
안보다 10살이나 연상인 30세의 노처녀인데다 얼굴 생김새도 볼품이 없는 터
라 제바스티안은 그저 묵묵부담으로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북스테후데는
이 딸 때문에 여간 마음 고생이 큰 것이 아니어서 이미 얼마 전에 자기를 찾아
왔었던 헨델과 마태존에게도 제바스티안에게 했던 똑같은 제안을 했다가 거절
당한 일이 있었던 차였다. 만일, 제바스티안이 출세만을 노린 기회주의자였다
면 북스테후데가 제안한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생각해서 승낙했
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 제의를 받는 순간 불현듯 마리아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 올라 그날밤 여장을 꾸려 도망치듯 아른시타트를 향해 출발했다. 넉달동
안 편지 한 통 내지 않은 사실을 마리아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골똘히
궁리하면서... 뤼베크에서 4개월이나 머물면서도 한 통의 편지 조차 마리아 바
르바라에게 내지 않았던 제바스티안은 평소에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았던 북
스테후데 선생이 자기보다 10살이나 연상일뿐 아니라 한 점 매력조차 없는 딸
을 미끼로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제의해 오는 순간, 바르바라의
청순한 모습을 떠올리고 황급히 아른스타트를 향했다. 그가 이미 4개월 전부
터 싫증을 내기 시작한 아른스타트였으나 한시 바삐 바르바라를 만나고 자신
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해심 넓은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제바스티안의 무관심이 야속하긴했지만 쾌히 사과를 받아들이
고 그를 따뜻이 맞이해 주었다.

애인의 용서를 받아낸 제바스티안은 다시 오르가니스트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
작했으나 이미 크게 달라진 그의 음악으로 인해 교회 당국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이 제바스티안과 교회 사이에 메꾸기 어려운 간격을 만들게 됨
으로써 그는 다른 지방으로 옮겨 갈 마음을 굳히게 됐다.

그 무렵(1706년 12월), 뮐하우젠의 聖볼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게오
르그 알레>가 사망하자 제바스티안은 바르바라의 외가쪽 친척이며 그 고장의
참사회원인 헤르만 벨슈테트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1707년 부활전에 시험
연주를 하여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후한 연봉에 곡식, 땔
감, 반찬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만족할만한 계약서에도
서명했다.

새로운 지방, 만족할만한 취업조건 등이 구비되자 이제는 결혼을 할 때가 왔다
고 생각하고 바르바라를 아내로 맞는다. 두 사람은 제바스티안의 백부가 물려
준 유산으로 아담한 집을 마련하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바흐는 행복했다. 육
체와 정신은 안정을 찾았고 음악은 샘솟듯 끊임없이 솟아났다. 그는 의욕적으
로 교회 음악을 정리하고 오르간을 개수(改修)하는데 열성을 다했다. 그러나
얼마후 교회의 경건파와 정통파 사이의 격렬한 싸움에 휘말려 들어 그의 안정
은 다시 흔들리게 됐다.

바흐는 평소 정통파의 편협성과 공식주의를 싫어하는 입장이었지만 경건파 사
람들이 '음악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며 유약하게 하고 위험한 몽상으로 유도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자 음악을 좋아하고 교회에서의 음악의 이용법을 잘
알고 있는 정통파의 <아일마> 목사 편을 들었다. 제바스티안이 정통파의 편
을 든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양쪽의 싸움이 너무나 혼미를 거
듭함에 따라 뮐하우젠이 더이상 머물 곳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일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1708년 6월, 오르가니스트를 구하고 있다는 바이마르
궁정을 방문하여 시험 연주를 하고 곧 채용이 결정됐다. 로써 그의 뮐하우젠
시대는 일년만에 끝이 났고 바르바라는 이삿짐을 싸야 했다.

** 자녀들의 음악 교육에도 각별한 정열을
바이마르에서 제바스티안의 음악은 커다란 진보를 하게 되며 궁정악단의 악사
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그동안, 장남과 차남이 연년생으로 태어났으며 장
남 프리데만은 뮐하우젠의 아일마 목사, 차남은 저 유명한 작곡가 텔레만이 각
각 대부(代父)가 되어 주었다. 바르바라는 줄곧 임신상태에 있었다. 그것이 또
한 제바스티안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
는 수많은 제자들이 항상 집안에 가득했으며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그
치질 않는 행복한 생활이 계속됐다.

그러나 1816년경 바이마르 영주인 빌헬름 공(公)은 자기가 몹시 싫어하는 조
카 아우구스트와 바흐가 몇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매우 절친한 관계를 유지
하는데 크게 화를 내고 바흐를 멀리하는 대신 요한 빌헤름이라는 인물을 궁정
악장으로 임명해 버리고 만다. 바흐는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해서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던중, 아우구스트가 쾨텐 궁(宮)의 레오폴드 공(公) 누이
동생과 결혼하게 된것을 계기로 공의 부인에게 부탁하여 쾨텐 궁정악장에 임
명될 수 있었다. 1717년 8월의 일이었다. 음악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남달리
깊은 새로운 영주 밑에서 바흐는 새로운 의욕으로 작곡에 전념하는 한편, 점
점 자라나는 자녀들의 음악교육에도 각별한 정열을 쏟았다. 특히 자기 못지 않
게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는 장남 프리데만에게 깊은 애착을 갖고 그를 위해 <
클라비어 小曲集>을 썼는데 그 속에는 <2성과 3성을 위한 인벤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등의 걸작이 들어 있다.

바흐는 진정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했다. 그가 작곡에 전념하고 있을 때 아
이들이 다리 사이로 들어와 기어다니면 함께 방바닥에 뒹굴고 웃으며 놀아주
는 것을 좋아했다. 바르바라는 늘 아기의 뒷바라지로 손 놓을 겨를이 없었지
만, 틈나는대로 남편과 더불어 아이들의 놀이에 끼어들기를 즐겨했다.

** 안나 막달레나와 시작된 제 2의 인생
1720년 6월, 공작을 수행하여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의 카를스바트 온천에
갔을 때 뜻밖의 소식이 바흐에게 전해졌다. 마리아 바르바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황급히 쾨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내가 죽은지 한
달이나 지난 뒤였고 이 일로해서 바흐의 고통과 비탄은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바흐와 바르바라는 1707년 10월에 결혼했으니 결혼 생활 불과 12년
8개월 만에 이승과 저승으로 나뉜 것이다. 바르바라는 모두 7명의 자녀를 낳았
는데 그중 장남 프리데만,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 그리고 요한 베른하르트를
훌륭하게 키운 장한 어머니였으며 늘 밝은 미소와 말없는 내조로 충실한 아내
의 모습을 보여준 여인이었다. 그녀 역시 바흐 가문의 딸이었으며 남편 못지
않게 음악을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바르바라가 죽은지 수 개월이 지나자 아이들을 외롭게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현실적 필요성과 자신도 새로운 배우자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궁정
트럼펫 주자(奏者)의 딸 안나 막달레나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20세의 꽃다운 처녀로 궁정 가수였고, 바흐와는 업무상으로도 자주 만나는 사
이였다. 다행스럽게도 막달레나 역시 자기보다 15살이나 나이는 많았지만 주
위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바흐에게 애정을 갖고 있어서 둘의 마음은 쉽
게 합치될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1721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새색시가 된 막달
레나에게 있어서 바흐의 아내 노릇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미 그에겐 4명의 자녀가 있는데다(7자녀 중 셋은 어려서 사망) 장녀는 그녀와
불과 7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형편이었으며, 장남 프리데만은 새 엄마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영영 방랑자가 되고 말았다. 바르바라가 일궈놓은 그 방대한
살림 살이를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인내심과 지혜가 있는
총명한 여인이었고 바흐를 향한 지극한 애정이 있었기에 이 어려움들은 극복
될 수 있었다.

안나 막달레나는 남편이 다시 원기를 되찾고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곁에서 헌
신적인 내조를 했다.찾아오는 방문객은 언제나 환대를 했기 때문에 그의 집엔
늘 손님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실성과 품위, 교양미
는 바흐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특히, 아름다운 음성으로 남편을 늘 기쁘
게 했다. 바흐는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내 아내는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다
운 소프라노 입니다."라고 뽐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이다. 그녀는 자기를 위
해서 남편이 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곡집>의 악보를 일일이 챙기
고 혹시 빠뜨리고 기입하지 않은 악상기호 등의 음악적 부호를 그려 넣는 일
도 맡아 함으로써 후세에 남편의 작품이 원형대로 보존, 계승되는데 결정적 역
할을 하기도 했다. 바흐가 막달레나에게 바친 노래 한편을 보더라도 두 사람
의 애정의 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와 함께라면
            기꺼이 가리라 죽음의 편안한 나라로
            아름다운 그대의 손
            내 눈을 감게 한다면
            죽을 때도 얼마나 즐거우리

안나 막달레나 역시 늘 임신 중이었다. 바흐는 임신을 예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 무렵엔 유아사망율이 높았기 때문에 쉴새없이 아내를
임신시켰고, 해서 막달레나는 13명의 자녀를 낳았다. 바르바라와 막달레나,바
흐의 두 아내들은 남편에게 20명의 자녀를 주었다. 그중 아홉은 어려서 죽고
말았고 그때마다 바흐는 음악으로 아내와 자신의 슬픔을 달랬다.

안나 막달레나는 제바스티안 바흐가 1750년 7월 28일에 운명하고나서 10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다.

**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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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델(Handel, George Frideric, 작곡가, 1685-1759)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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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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