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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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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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델(Handel, George Frideric, 작곡가, 1685-1759)


◈ 유투브 감상 /
메시아 전곡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1-aaEkdKssE  

역사는 때때로 엄청난 우연을 연출한다. 바흐와 헨델의 경우가 그러하다. 둘은 같은 독일에서
단지 고향만 다를 뿐 1685년 같은 해에 불과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났고, 후일 서양 음악사의
거대한 두 기둥이 되었으며, 바흐는 평생을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한 번도 독일이외의 지역을
여행한 일이 없이 직장이 있는 고장을 지켰는가하면, 헨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이탈리
아, 영국 등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하면서 때로는 파산선고를 받을 만큼 우여곡절을 겪으
며 종국엔 영국 시민으로 귀화하는 변화 많은 생애를 살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고선
설명할 길이 없다.

작센선제후의 시의(侍醫)이자 외과의사인 아버지, 그보다 30세 연하이며 늘 상냥하고 명랑했
던 어머니 사이에서 프리드리히 게오르크 헨델은 1685년 2월 23일, 바흐보다 약 1개월 먼저
태어났다. 고향은 동부 독일 할레(Halle)였으며 둘째 아들이었다. 바흐가 전통적인 음악의 명
문 출신인데 비해 헨델은 음악과는 거리가 먼 가문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음악듣기를 좋아해
서 늘 예배당이나 대저택의 밖에서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정도일 뿐 그
가 기막힌 음악의 신동이라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대신, 그는 아버지로부터 단단한 신체와
강한 의지, 어머니로 부터는 명랑한 기질과 경건한 신앙심을 물려받아 후일 그가 말할 수 없
는 곤궁에 빠졌으면서도 오뚜기처럼 재기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늘 궁중에 출입하던 그로서는 궁중음악
가의 신분이 하인 정도에 그쳐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6∼7세 때부터 서서히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한 헨델은 궁정
음악가인 클리거에게 오르간을 배웠고 그 능력이 영주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르러 당시
의 최고 음악교사였던 차하우(Friedrich Wilhelm Zachow)의 가르침을 받게 되어 아버지가
별세한 1697년(12세) 무렵엔 이미 뛰어난 오르간 연주 능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반드시 법률학교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할레대학의 법률
학부에 입학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엔 할레 칼뱅 교단의 聖십자가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결국 1년 뒤 아버지의 유언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다고 결심하고
함부르크로 가서 겐제마르크트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알미라>등 오
페라를 잇달아 발표하여 오페라 작곡가로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편 마테존(1681-1764)과 두터
운 우정을  나누게 된다.

헨델이 19세 때 뤼베크시 교회에 오르가니스트 자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곧 그 곳을 찾
아 갔으나 전임자인 북스테후데가 자기의 딸과 결혼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통에 그대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만일 북스테후데의 딸이 미인이었다면, 또는 형편이 극도로 궁핍해서
취직을 꼭 해야만 했다면 그 자리를 승낙했을 테고 만일 그렇게 됐다면 그의 음악적 인생은
전혀 양상을 달리했을 것이다.

1706년, 헨델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서 코렐리, 알렉산드로 스카를랏티, 파스퀴
니 등 이탈리아 최고의 작곡가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기간 중에 <시간
의 승리> <부활>이라는 2곡의 오라토리오를 썼다. 특히 스카를라티와 더불어 챔발로와 오르간
연주 시합을 벌여 승리를 차지한 것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탈리아 체재 중 일화의 하나다.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에서 눈부신 음악적 수확을 거둔 헨델은 독일 하노버 선제후 궁정악장
으로 초빙됐다. 그러던 중 1710년 6월에 휴가를 얻어 영국의 런던으로 향했다. 이 무렵의 런
던은 헨리 퍼셀(Henry Purcell)이 죽고 난 뒤였으며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활개를 치는 상황
이었다. 런던에 간 헨델은 그의 뛰어난 챔발로 연주 솜씨로 앤여왕을 감동시켜 왕실작곡관이
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됐다. 그러나 1714년에 앤 여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다름 아닌 하노버의 선제후 루트비히 공이었다. 헨델이 공의 명
령에도 불구하고 하노버로 귀임하지 않고 런던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크게 노여움을 샀던
바로 그 장본인이 새로운 영국 국왕 조지1세였던 것이다. 입장이 몹시 난처해진 헨델은 궁정
의 시종장 킬만젝 남작의 도움으로 <물의 음악>을 작곡, 발표하여 극적으로 왕의 노여움을 풀
고 다시 왕궁 출입할 수 있었다.

1719년, 헨델은 챈도스 공(Duke of Chandos)의 지원을 받아서 오페라 흥행을 위한 조직으
로 왕림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을 설립하고 우수한 가수들을 발굴하는 한편 오페
라 작곡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당시의 형편으로는 자유로운 신분의 음악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런던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는 것이
고 그래서 그도 그 길을 택했다. 그러나 헨델 혼자서만 영광을 독차지 하는 것을 시샘한 귀족
과 음악가들 중 보논치니라는 이탈리아 작곡가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도 헨델의 적수가 되
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듯 이탈리아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와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헨
델이 파산 당하는 불행을 당했고 보논치니를 후원했던 많은 귀족과 부호들도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가수들까지도 빈정대거나 태업을 하거나 노래 부르길 거절하는 등 헨
델의 골치를 썩여 이래저래 지칠 수밖에 없었고 나이는 자꾸만 쌓여졌다.

그는 두 번이나 파산했고, 세 번이나 죽음을 당할 뻔 했으며, 두 번이나 병으로 쓰러졌고, 귀
부인, 부호, 비평가, 신문기자들과 늘 싸우지 않으면 안됐다. 그가 오라토리오라는 새로운 구
세주를 만나기까지 20년 이라는 긴 세월을 이렇게 피투성이의 싸움으로 살았고, 1733년 4월
봄, 어느새 52살이 된 헨델은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몸이 되었다. 오페라 창작에 대한
열정과 왕실의 후원을 입기 위한 끊임없는 로비활동, 잇달아서 나타나는 적들과의 싸움에 매
달리다보니 참다운 연애조차 해볼 수 없었고 그래서 늘 독신이었다.

중풍으로 쓰러지자 아헨 온천장으로 가서 정양생활에 들어가 초인적인 노력으로 재활치료에
집중해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헨델은 곧 새로운 작품에 착수
했는데 이번엔 오페라가 아니고 구약성서에서 소재를 가져온 <사울>이라는 오라토리오였다.
그의 음악은 이제 오페라와 결별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음악의 영역으로 오라토리오를 택한 것
이다. 사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메시아>가 창작된다. 아울러, 지금까지는
힘 있는 귀족이나 돈 많은 부호 속에서 후원자를 찾아 왔었지만 오라토리오에 매진하고부터는
평범한 중산계급 속에서 자기의 지지자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런던의 중산층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건강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로 새로운 길을 발견한 기쁨을 누리면서 오라토리오를 잇달아 썼고, 그
작품들이 그에게 커다란 명성과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1741년 8월, 56세의 헨델은 <메시아> 작곡에 착수했다. 구약과 신약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
의 탄생에 대한 예언과 성취, 수난과 부활에 대한 복음의 승리, 신자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라고 테마를 설정하여 3부작으로 만들어진 이 방대한 작품을 헨델은 불과 3주 동안에
완성했다. 작곡기간동안 헨델은 거의 침식을 끊고 스스로 감동에 겨워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
며 곡을 썼다. 이 곡의 초연은 1742년 4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행해 졌는데 그때의 모습
을 <더블린 저널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감동에 북받친 청중에게 이 작품이 준 절묘한 기쁨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숭
고하고 위엄에 넘치며, 감동 깊은 말에 붙여진 음악의 존엄함과 기쁨, 상냥함, 그것은 서로 손
을 잡고 황홀한 마음과 귀를 매혹시켰다. 세상은 헨델이 이 대연주회에서 올린 수익을 죄수와
자선병원, 성모병원, 구원협회 등에 골고루 나누어주도록 희사한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됐다. 사
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언제까지나 기억 하리라".

<메시아>는 1743년 3월 23일에 런던 코번트 가든에서 런던 초연을 가졌는데 조지2세 국왕도
친히 임석하여 감상하던 중 제2부의 마지막 합창곡인 <할렐루야>가 연주되자 의자에서 일어
서서 경건히 옷깃을 여미고 듣게 됐으며 이때부터 할렐루야에서 청중들이 기립하여 감상하는
관습이 만들어 졌다.

◈ 할렐루야 합창을 기립해서 듣는 것에 대한 이야기
메시아가 더블린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초연되기는 했지만 런던에서 초연될 때에는 상
황이 더블린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영국에서는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오라토리오로 다룰
수 있었지만 예수를 소재로 다루는 것은 금기로 삼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헨델은 메시아를
런던에서 초연할 때, 제목을 더블린에서 사용했던 메시아라고 하지 않고 <새로운 성스러운 오
라토리오>라고 광고했고, 런던의 신문들은 헨델의 새 오라토리오가 극장에서 연주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쟁도 벌였다. 이는 헨델이 제목을 숨기려 했어도 더블린에서 초연된 제목
과 내용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과연 국왕이 초
연에 참석하려고 했을까?

국왕 조지2세가 감동에 북바쳐 자리에서 일어나 할렐루야 코러스를 들었다는 일화는 런던 초
연으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780년, 제임스 베티(James Beattie)라는 사람이 어느 목사에게
런던 초연에 대해 들은 것을 편지에 쓴 것이 이 스토리의 첫 시작이었다.  
“제가 (헨델의 메시아 런던 초연에 관한) 두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어요. 합창단이 “우리 하느
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를 불렀을 때 왕과 청중 모두 너무 감동해서 합창이 끝날
때까지 일어서서 들었답니다.”
그러니까 당시 초연에 직접 참석했던 사람들이 전하거나 신문에 보도된 것이 아닌 제 삼자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도 일이 일어난 뒤 30여년이 지나서.

거장 헨델에게 최후의 날이 왔다. 1759년 4월 6일 코번트 가든에서 메시아 연주가 끝나자 집
으로 돌아온 직후 자리에 누워 “가난한 음악가의 구제를 위하여 1천 파운드”라고 유언을 쓴
뒤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던 중 8일 후에 눈을 감았다. 부활제 바로 전날의 아침이었다. 그의
유해는 평소의 소망대로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됐다.

우리는 헨델의 생애에서 어머니를 제외한 어떤 여성의 얘기도 찾을 수 없다. 어떤 조건으로나
여성의 시선을 모으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에게서 이러한 사실은 매우 기이한 느낌을 준다.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성질이 매우 급했고, 런던 제1의 대식가였고 런던에서 제일 바빴던 사
람이었고, 작품목록이 수십 페이지에 달할 만큼 다작가(多作家)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의 독신
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헨델은 또 한번 바흐와 대비가 된다.

◈ 헨델의 작품목록
http://ko.wikipedia.org/wiki/%EA%B2%8C%EC%98%A4%EB%A5%B4%ED%81%AC_%ED%94%84%EB%A6%AC%EB%93%9C%EB%A6%AC%ED%9E%88_%ED%97%A8%EB%8D%B8%EC%9D%98_%EC%9E%91%ED%92%88_%EB%AA%A9%EB%A1%9D

◈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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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든(Haydn, Franz Joseph, 작곡가, 1732-1809) [3]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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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Bach, Johann Sebastian, 작곡, 오르가니스트, 1685-1750)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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