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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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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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Mozart, Wolfgang Amadeus, 작곡가, 1756-1791)

 
** 유투브 감상 /
레퀴엠 전곡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1DsJ5YQr5s 

말과 함께 음악을 배우고, 마치 말하듯, 글쓰듯 음악을 썼던 인물, 서양 문화
사를 통틀어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놀라운 천재적 인물, 그러나 인생의 관
리자로서는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결과적으로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인물, 하이든과 더불어 뷘(Wien)고전악파의 대표적 작곡가로서 동 악
파의 생성, 발전, 완성의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음악가. 그가 볼프강 아마데
우스 모차르트이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교회음악가로 활동했으며, 잘츠부르
크 대주교 궁정 소속의 악장을 지낸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1719-1781)이다. 레오폴트는 바이얼린 교칙본을 만든 바이얼리니스
트였으며, 저 유명한 [장난감 교향곡]을 쓴 작곡가이기도 하며 음악교육에 있
어서 조기교육의 효율성을 입증시킨 뛰어난 교사이기도 하다. 그는 뛰어난 미
모의 안나 마리아 페르틀(Anne Maria Pertl,1720-1778)과 결혼하여 3남 4녀
의 자녀를 얻었으나 그중 셋째딸 마리아 안나 발브르가 이그나티아(Maria
Anna Walburga Ignatia 애칭으로는 마리안네, 혹은 난네를<1751-1829>)과
막내아들 볼프강 모차르트만이 수명이 비교적 길었을 뿐 나머지 자녀는 어려
서 모두 잃고 말았다.

모차르트의 정식 이름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이다. 이 가운데 테오필
루스는 희랍식 표기이고 라틴어로는 아마데우스(Amadeus)라고 쓰게 되니 오
늘날에도 흔히 그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로 부르는 것이다. 모차르트
는 1756년 1월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난네를과 볼프강에
게 조기 음악교육을 시작하게 되는데 볼프강이 네살때 몇개의 메뉴엣과 소품
들을 가르쳐본 결과 습득하는 속도도 빨랐을 뿐 아니라 한번 배운 것은 놀라
우리만큼 정확하고 아름답게 챔발로(건반악기로서 피아노의 전신격인 악기)
로 연주하는 솜씨를 보였다.

다섯살이 되면서부터 작은 규모의 작품들을 작곡하여 아버지에게 들려주게
됐으며, 아들의 재능에 탄복한 레오폴트는 일일이 그 곡들을 악보로 정리해
주었다. 이때의 작품이 [피아노를 위한 안단테 C장조]등이다. 볼프강은 마을
아이들과 놀이를 할때도 음악이 없는 놀이엔 흥미를 갖질 못할만큼 음악에 대
한 왕성한 욕구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이 어린 꼬마의 음악놀이의 대상은 흔
히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다. 다음은 이무렵 일화의 한토막이다.

어느날, 아버지와 친구들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보니 볼프강이 열심히 악
보를 그리고 있었다. "얘야, 지금 뭘하고 있는거냐?" "전 지금 쳄발로 협주곡
을 쓰고 있어요. 곧 제 1악장이 다 끝날거예요" 처음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
고 있던 아버지도 아들의 태도가 워낙 진지한터라 악보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
작했다. "여보게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규칙적으로 볼프강이 이 곡을 썼단
말일세. 허지만 이곡은 아무도 연주할 수가 없을것 같구먼. 너무 어려워서 말
일세"  아버지는 너무도 감동해서 친구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악보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볼프강이 여섯살이 되던 해에 가족 모두가 뮌헨으로 여행하여 여러곳에서 모
두가 성공적인 연주를하여 볼프강과 난네를의 이름은 천재라는 찬사와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해 가을엔 빈(Wien)으로 여행하여 황제 프란츠1세
앞에서 챔발로를 연주해 황제는 물론 많은 귀족과 음악가를 경탄케하는등 숱
한 일화를 만들어 냈다.

모차르트 일가의 여행은 그후에도 계속되어 7살때 뮌헨을 필두로 파리, 런던
으로 이어지는데 특히 파리에서의 환영은 대단해서 아버지와 볼프강 남매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세우는 최상의 영접을 받았고, 볼프강의 작품이 최
초로 출판된 것도 파리에서의 일이었다. 일가는 1764년 4월 영국으로 건너가
여름까지 체류했는데 왕실에서의 연주는 물론 수많은 연주회를 갖는 한편, 요
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이자 영국 왕비의 음악교사로 있었던 크리스
티안 바흐로부터 많은 지도를 받게 되는데 그 교육의 소산이 영국에서 출판되
어 왕비에게 바쳐진 6곡의 소나타 였으며 이때 볼프강의 나이는 8살이었다.

그들의 여행은 칼레, 플랑드르를 거쳐 암스텔담, 헤이그로 이어졌으며 이러
한 여행을 통해 소년 볼프강은 다양한 음악적 섭렵을 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인격적으로도 많은 성숙을 취하고 점차 그의
독자적인 음악의 지평을 발견해 나가는 실로 값진 소득을 거둘 수 있었다.

1766년 11월 30일, 3년만에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볼프강은 10살의 소
년이 되어 귀향한 것이다. 오래간만에 그에게도 긴장의 시위를 풀어 놓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고 그는 이것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1768년에 집안의
경제상태가 아주 나빠지게되자 또다시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는 빈의 황제
앞에서 연주하게 된다. 이때 모차르트는 그의 생애 최초로 돈을 벌기위해 작
품을 쓰게 되는데, 이런 사유로 쓴 작품이 오페라 [성장한 바도의 딸]이다.
이 오페라는 전문가(궁정악장 스테지오 등)들의 칭찬을 받았고, 뒤이어 메스
마박사(동물자기설의 창시자)의 의뢰를 받고 두번째의 오페라 [바스티안과
바스티엔느]를 작곡했다.

볼프강은 13살의 12월에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물론 여기에서도 그
에게 돌려진 경탄과 찬사의 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으나 그보다도 볼
프강 자신의 음악적 성장에 커다란 진보의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이 여행
의 의미는 큰 것이었다. 특히 대위법의 권위자였던 마르티니 신부를 만나 그
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 그에겐 크나큰 행운이었다.(마르티니 신부는 [사랑
의 기쁨]의 작곡자).

볼프강의 놀라운 천재성을 입증하는 일화로서 로마에서의 다음과 같은 사건
이 있다. 볼프강 부자는 聖수요일(부활주일로 부터 5일전의 수요일)저녁 시스
틴 성당에서 연주되는 [미제레레](Miserere,<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 많
은 작곡가들이 이 음악을 썼으나 여기에서 얘기하는 미제레레는 [알레그리]
의 작품이다) 를 들으러 갔다. 그당시 로마 교황청 소속의 음악가들은 미제레
레의 악보를 베끼는 것을 엄격히 금지 당하고 있었으며 만일 이 지시를 어기
면 무서운 파문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때문에 미제레레는 사람들에게 더
욱 존엄하고 신성한 종교음악으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이 음악을
듣고 외워버리겠다는 결심을 한다. 실제로 그날 숙소로 돌아와 악보로 전곡
을 옮겨 적었고 이틀뒤인 성금요일에 다시한번 성당으로 가서 미제레레를 들
은 뒤 서너군데 잘못 적은 부분을 보필까지 하여 완벽한 악보를 만들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로마에 쫙 퍼졌고 어느 음악회에서 사람들이 미제레레를 불
러보라고 끈질기게 요청하자 즉석에서 완벽하게 이를 노래했고 그 자리에 함
께 있던 시스틴 성당의 테너 가수 크리스트포리가 틀림없는 사실을 보증하여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이같은 놀라운 천재성으로 이탈리아를 온통 열광시킨 14세의 볼프강에게 수
많은 영예가 주어진다. 교황은 '황금박차 십자상'을 주었고, 폴로니아에서
는 '아카데니 필하모니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고, 베로나에서도 역시 '필하
모니 협회 회원'의 명예로운 칭호를 주었다.

영광으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여행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아껴
주고 후원해 주었던 대주교가 세상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콜로레도 백작이 선
출됐는데 그는 전임자와 달리 볼프강을 몹시 냉대했다. 아버지는 악장의 자리
에서 쫓겨났고 볼프강이 콘서트 마스터로 임명되긴 했으나 사사건건 대교주
와 의견 충돌이 빚어져 어떻게해서든 고향을 떠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특
히 대주교가 아버지에게 행한 처사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을뿐 아니라 예
술가들이 귀족에게 예속되어(실제로, 그 시대의 예술가는 하인의 신분이었
다) 자신의 독립적인 예술행위를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한없는 슬픔과 갈등
을 갖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런지는 몰라도 그즈음 룻소를 사상적인 원천으
로 삼아 전개되던 '질풍과 노도'(이 사상은 예술운동의 새로운 사조로써 귀족
사회의 편견, 정치적인 전제주의가 몰아오는 인습과 특권에 대하여 공격을 하
고, 예술가들은 일체의 기존 사조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의 영향
이 볼프강에게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디어 21세가 되던 해에 볼프강은 대주교에게 사표를 던지고 아버지의 권고
에 좇아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갔다. 파리는 그에게 어린 시절의 영광이 가득
했던 추억의 땅이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출발과 벅찬 희망을 수용해 줄 최적
의 땅, 즉 '볼프강의 가나안'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여행은 서양음악 역사상 최초로 하인의 계급에서 탈출하여 떳떳하게
혼자 서겠다고 선언한 '독립한 예술가의 대장정'의 모험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볼프강을 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무엇
하나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다. 그는 지난 날의 신동이라는 신화
로 부터 자기를 탈출시키도록 애썼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전의 그
기억 속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아예 볼프강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일종의 자위적 해방감과 자신의 독립심을 더욱 고
취시켜 나아갔다. 그는 어느덧 종속과 독립의 현저한 차이를 현실감각으로 받
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에 앞서 파리를 향하는 여정 속에 뮌헨, 아우그스브르크 등이 통과 지
역으로 들어 있었고, 이 지역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실망을 안은 채 아우그스브르크를 떠나 만하임에 도착한 모차르트
는 사보소(寫譜所)를 운영하고 있었던 베버家와 친숙한 관계가 된다.(여기서
얘기되는 베버는 유명한 작곡가 베버의 백부가 된다)

특히 둘째딸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에게 숙명적 존재가 된다. 둘은 열애에 빠
진 것이다. 알로이지아는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가수였으며 뛰어난 미인이었
다. 그녀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당초에 세웠던 계획은 취소되었고, 그녀의 재
능을 발휘 시킬 수 있는 오페라를 쓰기로 작정한다.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자
기 자신의 이익이나 영광은 물론, 세상 무엇이든 다 버리고 오직 그녀에게만
헌신 하겠다는 생각이 당시의 모차르트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무렵 아버지에
게 보낸 몇통의 편지를 보면 알로이지아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쓰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는데, 이러한 아들의 태도에 대해
서 부친 레오폴드는 "네가 평범한 연예인이 되어 세상에서 잊혀지든, 유명한
카펠마이스터(궁정 또는 교회음악 책임자)가 되어 후세에 길이 남든, 예쁜 아
가씨에게 정신이 나가서 언젠가 짚더미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처자를 울
게 하든지...(중략)...오로지 너의 마음 가짐과 행동에 달려 있다......(중
략)......그런 젊은 아가씨를 프리마 돈나로 만들어 이탈리아 무대에 내세우려
하는 따위의 어리석은 희망을 이해할 수가 없다.......(중략)......지체 말고 파
리로 떠나거라"고 맹렬한 꾸짖는 편지를 보냈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한 아버
지는 "너는 무엇보다도 먼저 너의 부모를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죄를 받아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라고 아들을 훈계했다. 하는 수 없
이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가기는 했으나 마음은 여전히 알로이지아가 있는 만
하임에 있을 뿐, 파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낯선 땅
빠리에서 어머니가 병을 얻어 별세하게 되자, 모차르트에게 있어서는 파리는
지긋지긋한 땅이 되고 말았다. 객지에서 아내를 잃고 아들마져 궁핍한 생활
을 하고 있는 것이 괴로웠던 레오폴드는 아들을 고향 잘츠부르크로 불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모차르트는 꿈속에서도 잊지못했던 알로이지아를
만나기 위해 만하임에 들렀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얼음 같았다. "언제 우리
가 서로 만난 일이 있었냐?"는 식이었다. 그녀는 이미 다른 연인과 열애에 빠
져 있었던 것이다.

일찌기 자유를 선언하고 고향을 떠난 모차르트는 23세의 나이로 다시 잘츠부
르크 대사교 소속의 오르가니스트가 되고 말았다. 참을 수 없는 순종의 세월
2년이 흘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다시 자유를 찾을 기회만을 기다리면서 작
곡가로서의 능력 배양에 최선을 기우렸다. 그가 25세가 되던 해에 의뢰받은
오페라 [이도메네오]가 뷘에서 초연하게 되자 이를 빌미로 모처럼 고향을 떠
날 수 있었다. 빈으로 나온 그는 정말 사는 보람을 만끽했다. 공연이 끝나면
곧 돌아오라는 대사교의 명령이 있었지만, 그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사표를
일방적으로 던졌다. 대사교는 진노해서 그를 강제로 끌고 올 사람을 파송했으
나 모차르트는 거처를 베버의 집으로 옮겨 버렸다. 알로이지아는 이미 결혼
한 뒤였고, 그녀의 동생 콘스탄체가 친절하게 시중을 들어 주었다. 둘은 이윽
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고, 이번에도 아버지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결혼한다. 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실연으로 끝나
자 동생에게 그 사랑이 옮겨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결혼으로 인해 모차르트
와 아버지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되고, 어떻게해서든 아버지
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기위해 아내와 함께 고향을 방문하기도 했으나 예전과
같은 관계로 회복되지는 못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창작에 대한 정
열엔 맹렬한 불길이 붙었고, 하이든과의 특별한 우정관계도 이 무렵에 맺어졌
다.

콘스탄체가 둘째 아기 카를 토마스를 낳았지만 곧 죽고 말았고 이 사건으로
집안이 우울해 있을 때,모차르트의 여제자 테레제의 등장이 콘스탄체를 더욱
괴롭게 했다. 테레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모차르트의 지도를 받아 왔는데 모
차르트에게 아이가 생기자 방이 비좁아져서 어려움을 겨꼬 있었다. 때마침 넓
은 저택을 갖고 있었던 테레제는 모차르트 일가가 자기 집으로 옮겨 살것을
권하게 되고, 그래서 이사를 한다. 이때부터 테레제는 정성을 다해 선생을 모
시기 시작한다. 이무렵 두사람 사이엔 상당한 연서들이 오갔던 것으로 알려
져 있으나 전해지는 것은 없다.

모차르트는 돈에 대한 현실감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쉽게 돈을 주었고 자신
도 낭비를 즐기는 편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악용했다. 그의 주옥
같은 피아노 작품들 대부분이 한푼도 받지 못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의 수중에
넘어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이다. 뷘의 악보 출판업자들은 모차르트에게 한푼
의 작곡료도 주지않고 무단 복제하는 일을 밥먹듯 자행했다. 이런 일도 있었
다. 늘 손님이 들지 않아서 파산 직전에 있던 어느 극장 지배인이 찾아왔
다. "모차르트 선생님이라면 구세주이십니다. 저의 극장 단골손님들 취향에
맞는 오페라 한편을 작곡해 주신다면 저는 살 수 있읍니다. 선생님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오페라 한 편을 써 주십시
요." "사정이 그러시다면 해 보지요." "선생님께 드릴 사례는 어느 정도나 해
야 될까요?" "당장은 당신 사정이 딱하니 그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보수는 그
후에 당신이 알아서 주시면 될게고. 단지 다른 사람에겐 악보를 빌려주지 않
는 조건만 답시다. 그 오페라가 성공하면 악보를 내가 다른 사람에게 팔 생각
이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오페라는 크게 성공했고 쓰러져가던 극장도 되살아나
게 됐는데 그 지배인은 약속을 어기고 여러 극장에 악보를 빌려주는 파렴치
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늘 병치레를 했다. 그의 수입은 상당했지만 아내
의 치료비와 낭비, 그 자신의 헤픈 씀씀이 탓으로 늘 궁색했다. 이런 생활 속
에서도 그가 늘 꿈꿔왔던 독일 오페라의 작업에 착수하여 <휘가로의 결혼>
을 완성하고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빈 시민 모두가 <휘가로의 결혼>에 등
장하는 아리아를 흥얼거릴 정도였다. 그의 뷘 생활이 6년째로 접어들 무렵이
었다.

1787년 5월 28일 아버지가 별세했다. 음악사상 최초로 조기교육에 성공한 훌
륭한 교사요, 인자한 아버지요, 아들을 신처럼 생각했던 신봉자가 세상을 떠
난 것이다.

<휘가로의 결혼>으로 자신을 얻은 그는,<돈 죠반니>를 작곡했고 이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가난은 날이 갈수록 골이 깊어만 갔다. 아내의
병도 심상치가 않았다. 그는 절친한 친구 후베르크에게 도움을 청하는 애절
한 편지를 썼다. 한편으로는 새로 등극한 레오폴트2세에게 궁정악장의 자리
를 달라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레슨 하기를 죽기보다도 싫어했
던 그가 제자들을 찾아 다니면서까지 레슨을 했다. "정말로 비참합니다. 무엇
이라도 좋으니 도와주십시요. 어떤 일이라도 내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무
렵 그가 쓴 편지의 일부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렛슨
을 청하는 학생도 얼마 없었다. 빈 시민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그를 싫어하고
외면했다. 가족들이 살 집조차 없어지게 되어 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곤
욕을 당하게 됐다. 이러한 최악의 상태에서도 그의 창작의욕만은 꺽어지지 않
고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되어 이후 세상을 떠날때까지 13개월간 그의 최고
의 걸작들이 쏟아져 나온다. 작품을 쓰다가 방이 너무 추워지면 아내와 함께
춤을 추면서 몸을 덥게 했다. 1791년, 그는 <마술피리>에 착수했다. 독일 오
페라의 꿈을 집약 시키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서. 콘스탄체는 7월에 여섯번째
의 아이을 낳았다. 프란츠 사비였다. 그들 사이에 여섯명의 아이들이 태어났
지만 둘만 무사하게 성장했다.

<마술피리>에 전념하고 있던 어느 날 쥐색 옷을 입은 신사가 모차르트를 찾
아 왔다. 그 신사는 의뢰자의 신분을 감춘 채 진혼곡(Requiem)의 작곡을 부탁
했다. 그는 작곡료를 두둑히 지불했다. 그러나 그의 인상은 모차르트의 영혼
을 뒤흔들었다.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았던 것이다.

서둘러서 마술피리를 완성 시킨후 레퀴엠을 진척시켜 나아갔다. 그러나 그의
기력은 이미 쇠잔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조차 없게 됐다. 그래도 그는 레퀴
엠의 붓을 놓지 않았다. 당초 약속한 날짜에 작품이 완성되지 않자 예의 그 노
신사는 추가로 작곡료를 지불하고 서둘러 줄것을 요구한다.

모차르트는 그가 저승사자로 느껴졌다. 1791년 12월 4일 그의 임종이 임박했
다. 콘스탄체가 종부성사를 행할 신부를 찾아 다녔지만 아무도 응해 주지 않
았다. 한밤중 모차르트는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선
벽에 머리를 기댄채 운명했다. 밤12시55분. 레퀴엠은 <입제창>, <기리에>,
<진노의 날>만이 완성되어 있을 뿐 미완으로 멈춰 있었다.

1791년 12월 5일.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씨였
다. 병든 콘스탄체는 마지막 가는 남편 배웅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공
동 묘지의 인부들은 시체 5구가 차야 묻는다고 했다. 친구들은 그때까지 기다
릴 수가 없었다. 그의 시신은 다른 4구와 함께 던져졌다.

뮤즈의 아들은 이렇게 비참하게 묻혔다. 끝내 그의 무덤을 확일할 길 없어 지
금도 그의 묘소는 비어있는 채로 있다.

** 관련 사이트 :
Http://www.deutschegrammophon.com/cdcat/cdcat-start.html    

**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최성숙
 ::: 퍼갑니다 초등학생 지도시 설명할 때 들려주려구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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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Beethoven, Ludwig van, 작곡가, 피아니스트, 1770-1827)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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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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