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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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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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Beethoven, Ludwig van, 작곡가, 피아니스트, 1770-1827)


** 유투브 감상 /
Anna Samuil soprano, Waltraud Meier mezzo-soprano, Michael König tenor
René Pape bass, National Youth Choir of Great Britain, West-Eastern Divan Orchestra,
Daniel Barenboim, conductor, Royal Albert Hall, 27 July 2012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sJQ32q2k8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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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의 사랑

프란시스 베이컨은 그의 [연애론]에서 다음과 같은 명구를 남기고 있다. "연애는 인
생에 있어서 때로는 유혹의 여신이 되고 때로는 복수의 여신이 되어 많은 화를 낳는
다. 연애는 무방비 상태로 열어 놓은 마음 뿐 아니라 경비가 충분하지 못한 요새같
은 견고한 마음에도 뚫고 들어오는 모양이다. 이 연애의 감정이 지나쳐서 사물의 본
질이나 가치가 무시되고, 연애에 있어서 만은 항상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적합한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기이한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사랑하면서 동시
에 현명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말은 명언이다.....(中略)...... 연애는 동등한 사랑으
로 보답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심의 보이지 않는 모멸을 받거나, 두 가지 중 하나
가 되는 것이 정칙(正則)이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wen, 1770-1827)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선배 중엔 헨델이, 후배 중엔 브람스가 독신 음악가였다. 그러나 헨델이나 브람스
의 생애에서 연애사건을 찾아 보기가 퍽 어려운데 비해 베토벤의 일생은 '불공평
한' 연애관계로 인해 숱한 고뇌에 빠졌던 흔적들이 의외로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그 몇번의 불공평한 연애사건이 구체적 자료들(누구인가? 언제인가? 연애의 정도
는 어느 정도인가?)은 어느 것 하나도 분명한 것이 없는 형편이다. 자료가 있다면
베토벤이 남긴 몇통의 편지에서 이니셜로 표기 되고 있는 여인들과 그의 제자나 친
구, 혹은 전기작가들이 주장하고 있는 몇명의 연인에 대한 불확실한 서술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거의 그 윤곽이 확실하게 드러난 연인들은 한결같이 귀족 출신인 <테레
제 브룬스비크>, <요제피네 브룬스비크>, <테레제 말파티> 등 세 여인이며 이들
을 흔히 {불멸의 애인}으로 지칭한다. 불멸의 애인은, 물론 이 세 여인 이외에도 거
론되는 경우가 있으나,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셋 가운데 한 사람이 베토벤의 불
멸의 애인일 것이라는 사실에 합의된듯 싶다.

1949년 여름, 헝가리 출신의 귀족 여인 <요제피네 데임> 백작부인과 그의 가족들
이 남긴 편지와 문서등이 경매에 붙여졌는데 그 경매품 속에 지금까지 전혀 공개된
일이 없었던 13통의 베토벤의 편지가 들어있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 편지들의
수신자는 요제피네였으며 베토벤이 쓴 어휘 등의 내용으로 보아 요제피네가 바로
불멸의 애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요제피네 데임 백작부인은 1779년 3월 28일, 아나톨 브룬스비크 백작(1745-1792)
의 세째로 태어났다. 요제피네는 그녀가 스물한살이었던 1800년에 언니 테레제, 오
빠 프란츠, 여동생 샬로트와 함께 베토벤과 친교를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얼마 뒤엔 사촌 줄리에타 귀치아르디가 베토벤과의 친교 그룹에 합세했다. (베토벤
의 전기를 쓴 신틀러는 줄리에타를 불멸의 애인으로 기술하고 있다. 베토벤은 그녀
에게 [月光소나타]를 바쳤다.)

브룬스비크家의 딸들이 베토벤과 만나게 된 것은 그녀들이 그로부터 피아노 렛슨
받기를 열렬히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요제피네와 베토벤이 최초로 상면한 것은
1799년 5월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때만해도 이미 베토벤의 명성은 빈에서 절대적
인 것이었고 그가 아무나 제자를 삼지 않는다는 평판이 있는 터여서 요제피네의 어
머니인 백작부인이 직접 베토벤을 방문하여 레슨 허락을 받아냄으로써 베토벤과의
관계가 시작됐던 것이다.

베토벤은 처음부터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친절과 열성을 다해 레슨을 했는데 1시
간 예정이 4∼5시간으로 연장되는 일이 흔할 정도였다. 이 무렵 요제피네는 47살의
요제프 데임백작의 열렬한 구애를 받고 있었는데 어머니 역시 적극적으로 딸을 설
득하여 결국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후일 그녀의 언니 테레제는 동생이 "늙은 남편에
게 언제나 정다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데임 백작은 결혼한 지 4년반이 지
났을 때 프라하에서 급사했고, 이때부터 요제피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녀에겐 네 자녀가 있었는데 교육이 큰 문제였다.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아이들
을 맡길 유능한 교육자를 찾아 다녔고 그렇게해서 만난 인물이 에스토니아 출신인
크리스토프 폰 시타켈베르크였다. 그는 아이를 맡는 조건으로 요제피네의 남편이
되겠다는 제안을 했고 둘은 1810년 2월에 결혼했다. 순전히 '자녀들에 대한 사랑 때
문에' 요제피네는 재혼한 것이다.

베토벤의 연애편지 13통은 요제피네가 데임백작과 결혼했을 때부터 재혼하기 이전
까지의 기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거의 모든 편지는 '데임 백작부인'으로 되어
있고 몇통은 "브룬스비크네 집에서 태어난"이라고 수신인이 적혀있다. 베토벤은 달
아오르는 사랑의 정열을 편지마다 가득 담고 있는데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서 자주
그녀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함께 하고 음악회를 여는등 만나는 횟수가 잦았고 어
쩌다 며칠 만나지 못할 경우엔 초조한 마음을 어찌할줄 모르는 투정이 그의 편지를
메우기도 했다.

이 무렵 두사람의 관계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던 테레제는 동생 샬로테에게 보낸
편지에 "그런데 페니(요제피네의 애칭)나 베토벤이나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
지 가르쳐다오. 조심하지 않으면 안돼요!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갖고 있어야
해. 그것은 슬픈 의무이긴 하지만 더 슬픈 일이 되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고
염려하고 있다. 이러한 주변의 눈초리를 의식한 베토벤은 요제피네에게 그간의 세
평(世評)이나 소문을 소상히 쓴 다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두 사람 이외
에도 아무도 문제 삼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中略)... 오! 당신의 사랑에 의하
여 내내 행복이 쌓아 올려지도록, 그것이 더 많아지도록 힘써 주세요. 오! 사랑하는
J(요제피네의 이니셜),...(中略)... 당신을 만난 그때부터 그것은 내게 그밖의 어떤
사랑의 싹도 허용하지 않을만큼 굳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정복
한 것입니다. ...(中略)... 오! 神이여! 무엇을 아직 당신에게 말해야 할 것인지, 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지, 당신에게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은 그렇게
도 중요합니다. 당신의 심장이 나를 위해서 뛰게 될 때가 언제 올 것인지--내 심장
은 죽을 때까지 당신을 위해서 끊이지 않고 뛸 것입니다. 사랑하는 J, 안녕 "이라고
자기의 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당시, 베토벤은 귓병의 악화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하일리겐쉬타트에선 유서를
작성할 만큼 심각하게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일변시켜
희망적인 삶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순전히 요제피네의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있
는듯 하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그가 썼던 표현만을 모아보면, "당신의 충실
한 베토벤" "내 마음의 천사여" "사랑하는 오직 한 사람의 J, 베토벤" "천사-내마음
의-내목숨의" "언제까지나 당신에게 순종하는 베토벤" 등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언니 테레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한때 베토벤과의 결혼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워낙
성급하고 격정적이고 변하기 쉽고 상처받기 일쑤였던 그의 정신 상태에 기가 질리
기도 했고, 그녀와 베토벤 사이에 놓여진 신분의 차이로 인해 '어떤 거리'를 두면서
친교를 지속시켰다. 이러한 그녀의 심리를 엿보게하는 편지가 있다.

"베토벤씨, 당신과의 가까운 교제는 이번 겨울을 통해서 내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
겨 한시도 또 무엇 하나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기뻐하고 계시는 건지 슬퍼
하고 계시는 건지 그건 당신 자신이 아는 일입니다. ...(中略)... 당신에게 반한 기분
은 직접 뵙기 전부터의 일로 그것이 당신의 친절에 의해 자라났던 것입니다. 내 마
음속의 어떻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당신을 좋아하게 한 것입니다. ...(中略)... 당
신과의 교제가 나에게 준 기쁨은 당신의 사랑이 관능적인 것만 아니라면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이 관능적인 애정에 만족할 수 없음을 당
신은 노하고 계시는 겁니다. 당신이 말씀하시는대로 따르면 나는 신선한 경계를 범
하게 됩니다. 살펴 주세요."

베토벤과 요제피네가 분명 대단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이 편지
에서 '관능적인 사랑'에 대한 애매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신분등의 차이에서 오
는 사랑의 유한성(有限性)을 인식한 그녀의 신중한 처신이라고 보여진다. '관능적
애정'이라는 그녀의 표현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해석해야 할 부분이다. 두 사람의 사
랑은 요제피네가 시타켈베르크와 결혼함으로써 단절된듯 보인다. 그녀의 언니 테레
제는 1817년 7월 12일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요제피네는 루이지(베토벤)의 불
행때문에 몹시 상심하고 있는 것 같지만---그의 아내였다면 그 위인을 위해 불가능
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요제피네와 베토벤사이에는 서로의 입장과 생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랑의 불꽃
을 다투어 피워 올렸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사랑의 교환은 지극한 부부애를 테
마로 한 오페라 <피델리오>를 탄생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했다.

요제피네가 과연 베토벤의 불멸의 애인이었는가? 하는 문제도 물론 관심사이긴 하
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위대한 예술가의 가식없는 사랑이 사회의 관습이
나 계급적, 신분적 차이에서 기인된 불균형한 애정관계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었
다는 한 인간의 비극과 슬픔이다. "연애는 동등한 사랑으로 보답되거나 그렇지 않으
면 내심의 보이지 않는 모멸을 받거나 두 가지 중 하나가 되는 것이 正則이다"라고
말한 베이컨의 충고처럼 베토벤은 요제피네로 부터 후자(后者)의 대접을 받는 결과
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비단 요제피네의 경우 뿐 아니라 불멸의 연인으로 지목되
고 있는 여타의 여성들의 경우에도 한결같이 적용되고 있다. 베토벤이 평생을 독신
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 불행의 전말이 이런데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가 남긴
말. "무한한 정신력을 가지면서도 미구에 쇠망해 가는 우리는 고통과 즐거움만을 위
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중 선택된 사랑은 고통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는 것입니
다."

베토벤이야말로 고통을 통해서 환희를 얻도록 선택된 위인이다. 그러한 생각은 말
년에 갈수록 절실해져서 그의 최후의 교향곡인 제 9번 4악장에서 바리톤의 입을 빌
려 "친구여! 이토록 시끄러운 소리가 아닌 더 아름다운 소리는 없겠는가?"라고 절규
했다.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 그것은 곧 그의 음악에 존경을 바치는 온 인류의 연인
일 수 도…그러나 매우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했던 여인들이었다.

** 베토벤의 생애

베토벤은 1779년 12월 16일 독일의 작은 도시 본에서 태어났다. 베토벤이 태어날
당시 본은 인구 3만 여명의 작은 도시였지만 쾰른 선제후의 궁정이 있어 문화적으
로 상당히 진보해 있었고 음악 분야의 수준도 높았다. 베토벤의 유년기에는 모차르
트의 신동 이야기가 화제거리가 되고 있었다. 아버지 요한은 베토벤을 제2의 모차
르트로 만들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으려는 생각으로 5세 밖에 안된 베토벤에
게 피아노(쳄발로)를 가르쳤다. 그러나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베토벤이었
지만 모차르트처럼 일찍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초조해진 요한은 한밤중에 술에 취
해 들어와서는 자고 있는 어린 베토벤을 깨워 날이 새도록 피아노 연습을 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된 연습 덕분에 베토벤은 8세 때 소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공연을
열었으며 2년 후부터는 작곡도 시작하게 되었다.

베토벤은 11세가 되면서 우수한 선생에게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선생은 본
의 국민 극장의 악장인 크리스찬 고트리프 네페로서 그는 바흐와 깊은 인연이 있는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합창장 아달 힐러의 제자였다. 네페는 베토벤의 천재성
을 간파하고 대성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하모니와 게네랄바스의
주법 및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정식으로 가르쳤다. 얼마 후 베토벤은 "평
균율 클라비어곡집"의 모든 곡을 조성을 바꿔 가며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었다. 그
리고 이 무렵부터 오르간과 바이올린 연주도 배우기 시작했다. 13세 때에는 "에른스
트 드레슬러의 행진곡을 주제로 한 피아노 변주곡"을 발표하였고 3개의 피아노 소
나타를 선제후에게 헌정하였다. 네페의 교육 성과로 베토벤은 차츰 연주가로서 명
성이 높아져 갔고 작곡 양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선제후는 베토벤을 음악의 도시
빈으로 보내 공부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1787년 봄, 베토벤은 빈으로 떠났고 또 그 곳에서 평소에 만나 보기를 꿈꿔 오던 모
차르트를 찾아갔다. 모차르트는 당시 "돈 죠반니"의 작곡에 정신없이 바빴지만 베토
벤의 연주를 들어보고 감탄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그 동안 그를 찾아온 많은 천
재 소년들에게 지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토벤 역시 미리 연주 준비를 해 왔으
리라고 생각하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베토벤이 주제를 달라고 하여 즉
흥 연주를 하자 모차르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차르트는 슬그머니 옆방으로 가
거기 있던 친구들에게 "저 젊은 소년을 주의해서 지켜보게. 이제 곧 세상을 시끄럽
게 하고 말걸세..." 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한동안 빈에서의 공부를 중단해야만 했다. 고향인 본에서 어머니의 중병
을 알리는 전갈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 뒤 어
머니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장례를 마친 후에도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갈 수 없었
다. 어머니 대신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취해
밤낮을 보냈고 베토벤은 실의 속에서도 음악에의 열정을 불태웠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교양을 쌓아 갔는데, 7세 때 학교에 들어갔다가 11세 때 그만 두었기
때문에 베토벤은 자신의 무학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양을 높이
기 위한 공부와 학업과는 역시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에마뉴엘 폰 브
라우닝 가의 사람들에게 자극을 받아 계속 교양을 쌓는 데 힘썼다.

궁정 고문관이었던 폰 브라우닝의 미망인 헬레네는 네 자녀와 함께 본에 살고있었
다. 베토벤은 친구 소개로 그녀의 두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는 이 집안에서
단란한 가정의 기쁨을 처음으로 맛보았으며 그 집에 모이는 많은 젊은 예술가나 예
술 애호가들로부터 문학, 철학, 역사 등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하였다. 그 무렵 베토
벤은 궁정에 출입하고 있던 폰 발트슈타인 백작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베토벤의 천재성을 인정하여 항상 용기를 북돋아 주고 경제적인 원조도 아끼지 않
았다.

베토벤의 재능은 점차 눈에 띄게 성장해 갔다. 그에 따라 창작 작품도 늘어가날로
명성이 높아져 갔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더욱 실력을
닦아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빈 유학을 열망하게 되었다. 1792년 하이든이 영국에
서 귀국하는 길에 본을 방문하였다. 베토벤은 대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를 통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싶었다. 하이든을 환영하기 위한 모임에서 베토벤은 그의 작
품들을 하이든에게 보였다. 하이든은 베토벤의 작품에 크게 감탄하여 칭찬을 아끼
지 않았고 베토벤이 빈에 와서 공부할 의사가 있다면 자신이 직접 지도해 주겠다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어쩌면 베토벤의 빈 행은 미리 운명지워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
른다. 베토벤과 아버지 요한에게 있어서 염원의 대상이었던 모차르트가 활동하는
곳이 바로 빈이었고 베토벤에게 원조를 해주던 여러 귀족들이 모두 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움으로 선제후에게도 쉽사리 승낙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해 가을 22세의 베토벤은 친구들의 전송을 받으며 빈으로 떠났다. 그의 가방에
는 악보가 채워져 있었고 호주머니에는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이
별의 아쉬움과 격려의 글을 쓴 기념첩이 들어있었다. 발트슈타인 백작은 "방심하지
말고 근면하게 모차르트의 정신을 하이든에게서 얻어내길 바란다"라는 글을 적어
주었다. 그 무렵 프랑스 혁명 후의 소요로 라인 지방의 여행은 위험스러운 일이었지
만 베토벤은 초겨울 무렵에 무사히 빈에 도착하였다.

베토벤은 허술한 다락방을 얻은 후 피아노를 빌려 공부를 시작했다. 모차르트는 이
미 그 전 해에 죽고 없었다. 이제 빈 제일의 대가는 하이든이었다. 베토벤은 전부터
계획한 대로 하이든을 방문하여 입문하였다. 그러나 이 늙은 대가는 교육에는 거의
흥미가 없었을 뿐 아니라 매우 바빴으므로 제자를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였다. 상심
한 베토벤은 하이든 몰래 요한 셴크라는 음악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 동안 하이
든은 또 한 차례의 영국 방문을 떠났으므로 베토벤은 하이든의 추천으로 알브레히
츠 베르거라는 이론의 대가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또한 다방면에 눈을 돌려 이탈
리아 작곡가 살리에리에게서 성악 작곡을, 그 밖에 바이올린 연주 공부 등을 하는
한편, 학습 외에도 실사회에서의 활동을 하였다. 실사회 활동이란 특히 귀족 사회에
서 연주를 하는 것이다. 이는 발트슈타인 백작의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귀족
들 사이에서 베토벤의 천재성이 화제거리가 되면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늘어갔
다. 그 중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베토벤에게 6백 플로린의 연금을 주는 것 외에 자기
의 저택 일부를 빌려주기도 하였다.

1795년 3월 베토벤은 공개 연주회를 열고 자작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때를
시발로 점차 빈번한 공연을 갖기 시작하여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어떤 때는 멀리 베
를린에도 연주 여행을 떠나 큰 호평을 받았다. 빈과 본을 오가며 음악 공부에 정열
을 기울이던 베토벤은 그 동안 피아노곡, 실내악곡, 칸타타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많은 곡들을 작곡하였다.

1800년의 어느 날 어떤 귀족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다. 다니엘 슈타이베르트라는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에게 경연을 신청해 왔다. 슈타이베르트는 트릴 등의 장식적
인 기교를 넣어 화려하게 연주하는 연주자로 유명하였다. 이 날도 그는 베토벤의 주
제에 따라 예의 훌륭한 즉흥 연주를 하였다. 사실 즉흥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미
리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에 응대하여 베토벤은 슈타이베르트가 갖고 온 3중주의
쳄발로 악보를 거꾸로 읽은 뒤 이것을 주제로 곡을 만들어 변주를 멋지게 연주하였
다. 모였던 사람들은 다들 놀란 채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슈타이베르트
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곧장 그 저택을 빠져나가 도망쳐 버렸
고 그 이후 다시는 베토벤과 동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베토벤은 신진 음악가로서
의 지위를 획득했으며 대가의 지위에 오르게 될 날도 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큰 근심이 있었다. 베토벤은 25, 26세 무렵부
터 귀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명이 있거나 가벼운 통증
이 느껴지는 정도였지만 차츰 악화되어 1800년 경부터는 귀의 이상이 예사롭지 않
았다. 베토벤의 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음악가로서
그의 생명은 끝나 버린다. 베토벤은 홀로 고민하다가 밤늦게 남의 눈을 피해 의사에
게 치료를 받으러 다녔으나 병은 더 악화될 뿐이었다.

베토벤이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집에 거주할 당시 그는 많은 작품을 공작에게 헌정
하였다. 피아노 3중주곡 세 곡, 피아노 소나타 내림 A장조 Op.26, 비창 소나타
Op.13 등을 작곡하여 공작에게 바친 한편 그의 많은 작품을 공작의 살롱에서 초연
하였다. 그 밖에 라주모프스키 백작에게 헌정한 "라주모프스키 4중주곡" 등이 이 시
기에 작곡되었다.

1800년 여름 베토벤은 의사의 권유에 따라 빈의 교외의 하인리겐슈타트로 휴양을
떠났다. 그 곳은 공기가 신선하여 쇠약해진 베토벤의 건강을 회복하기에 알맞은 곳
이었다. 새로운 의욕이 생기자 그는 교향곡 제2번 등을 썼다.

어느날 제자인 리스가 문병 겸 가르침을 받고자 하인리겐슈타트에 왔다. 두 사람은
산책을 나왔다. 리스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좋구나. 목동의 노랫소리 또한
흥겹고." 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베토벤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베토벤은
깊은 산골짜기에 던져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밤 그는 두 사람의 제자 앞으로
비통한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쓰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제
자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편벽한 인간처럼 행동하여 모두들 내가 변했다고 했겠지
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서야 비로소 내 귓병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겠는
데 이젠 회복의 희망이 전혀 없어 각오하는 바를 말한다. 자신이 없는 생명은 도덕
을 중시하며 살려고 한다." 라고 했는데 이는 자살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하인
리겐슈타트의 유서'로 지금도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자살로서 자신의 삶과 음악을 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이 유서를 쓰
는 동안에 나락 깊숙히 빠져 있던 비참한 감정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죽음이 자신을
가로막을 때까지 신이 부여한 사명을 좇아 인류를 위해 창작해야겠다고 굳게 결심
했다. 베토벤은 이 휴양지에 낡은 자신의 옛 모습을 묻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 '하인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난 얼마 후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욱 열심히 창작에 혼신을 기울였다.

그의 작곡은 이제까지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전통적인 형식보다는 자유롭게 표현
된 그리고 단순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닌 강렬하고 웅대한 힘의 표출이 넘
치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음악은 정열과 힘이 넘치면서 드높은 기상과 진지함
을 띠고 있다. 흔히 베토벤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하이리겐슈타트에서 돌아온 이후
의 베토벤 음악을 '창작의 제2기'라고 한다.

'창작의 제1기'에도 최초의 현악 4중주 Op.18 특히 제1곡, 비창 소나타 Op.13, 제2
교향곡 Op.36, 제3 피아노 협주곡 Op.37 등에서 제2기풍의 강력하고 당당한 음악
이 창작된 바 있으나 제2기의 작품과는 견줄 바가 못 된다. 제2기의 작품으로는 바
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크로이처 소나타 Op.47, 9개의 교향곡 중 제3번에서 제8번
까지의 6곡, 제4번과 제5번의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템페스트 소나타
Op.31-2", 이하의 피아노 소나타 Op.90까지, 오페라 "피델리오" 등의 명곡들이 창
작되었는데 특히 교향곡 제3번에서 제8번까지의 곡들은 그의 진수를 유감없이 발휘
한 작품들이다. 베토벤의 명성은 이전보다도 더 높아졌다.

1808년에는 카셀 궁정의 제롬 왕이 베토벤을 악장으로 초빙하고 싶다고 청해 왔다.
그러나 베토벤을 사랑하는 빈의 귀족들(루돌프 대공, 로프코비츠 후작, 킨스키 후
작)은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한 상담을 벌였고 베토벤에게 연금 4천 플로린을 냄으로
써 그를 빈에 묶어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정세의 변화와 귀족들의 몰락으로 로
프코비츠 후작은 1811년부터, 킨스키 후작은 1812년부터 연금 지불을 이행할 수 없
었다. 끝까지 이행한 것을 루돌프 대공뿐이었다.

교향곡 제3번 "영웅"은 로프코비치 후작에게 미사곡 C장조 Op.86은 킨스키 후작에
게 헌정한 곡이다.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후원자였을 뿐 아리나 베토벤이 평생 동
안 우정을 나눈 유일한 귀족 친구였으며 또한 제자이기도 했다. 베토벤은 루돌프 대
공에게 무수히 많은 곡을 헌정했다. 그 중에는 피아노 협주곡 제4번 Op.58, 오페라
피델리오 Op.72, 고별 소나타 Op.81a, 피아노 3중주곡 내림 B장조 "대공" p.97, 함
머클라비어 소나타 Op.106 등이 있다. 또한 후에 종교계로 귀의하여 대사교로 취임
하는 대공을 위해 "장엄 미사"를 바치기도 하였다.

베토벤은 예전부터 괴테를 존경하고 있었지만 1810년 괴테의 "에그몬트"를 위해 음
악을 만들면서는 한층 마음 속으로부터 깊이 받들고 우러르게 되었다. 두 사람은
1812년 여름 베토벤이 휴양하고 있던 테프리츠에서 만났다. 괴테는 "베토벤의 재능
은 나를 놀라게 하였지만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야성적인 인물이다." 라고
베토벤의 야인적인 태도를 혐오했으며 한편 베토벤은 "괴테는 궁정 풍의 냄새가 나
는 사람이어서 시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라고 단호히 말했다. 위대한 두 예술
가는 그 후로 만나지 않았다.

베토벤의 시대는 나폴레옹의 시대였다. 나폴레옹은 한때 전 유럽을 지배했으나
1814년에는 세력이 꺾여 제위를 물러나 엘바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 해 9월 각국
의 왕과 관료 등이 사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빈에 모여 대회의를 개최하였다. 베
토벤은 회의 참석자들을 위한 곡을 만들고 연주회를 가졌다. 베토벤의 명성은 그야
말로 정상 위에 도달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변에는 불행이 계속되었다.
1815년에 동생 카를이 죽었다. 베토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조카 카를(아버지와 동
명)의 양육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카를은 학업을 게을리하고 소행도 좋지 않았다.
1826년에는 빚에 몰려 권총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베토벤은 말썽 많은 조카의
선도를 위해 얼마 동안 작곡을 소홀히 하였다.

그 무렵 베토벤의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은 모드 빈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더욱이 빈의 음악적 색채가 점차 베토벤 풍의 이상주의적인 높은 기상을 표현한 음
악보다 낭만주의적인 친근, 경쾌한 음악을 선호하게 되었다. 베토벤의 귀는 악화되
어 자신이 치는 피아노 소리조차 전혀 들리지 않았다. 1824년 교향곡 제 9번이 쾰른
트나트아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청중의 열광적인 박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답례를 하지 않는 베토벤을 독창자가 소매를 끌어당겨 눈으로써 관중들의 갈채와
환호를 보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베토벤의 고독과 고통은 그를 더욱 야성적으로 만들었다. 베토벤 연구자들은 이 시
대를 베토벤 '창작의 제3기'라고 한다. 만년의 제3기 작품들로는 '최후의 소나타'라
불리는 Op.101 이하의 5개의 피아노 소나타, 장엄 미사, 교향곡 제9번 "합창", 현악
4중주곡 Op.135, 가리친 4중주곡 Op.130 등이 있다. 모두 내면 세계를 깊이 묘사
한 명작이며 제2기와 같은 강렬한 힘은 없으나 동경을 가득 담고 있다.

1826년 가을 베토벤은 자신의 정양과 조카의 기분 전환을 위해 카를과 함께 그나이
크젠도르프라는 곳에 사는 동생 요한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약 2개월 동안 머물면
서 계수와 사이가 나빠 마음이 편치 못했던 차에 감기에 걸려 12월 2일 급히 빈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발열이 심해져 빈에 도착했을 때는 폐렴에 수종까
지 생기고 말았다. 그 후 베토벤의 병세는 크게 악화되어 갔다. 베토벤은 원래 카톨
릭 세례를 받았었으나 종교를 멀리하였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
는지 베토벤은 주위의 권유에 따라 1827년 3월 24일 병상에서 최후의 성찬을 받았
다.

그 후에 베토벤은 "갈채를 주오. 여러분 희극은 끝났소."라는 생애 최후의 말을 남겼
다. 그 날 밤부터 베토벤은 의식을 잃었다. 이틀 후인 26일에는 눈이 내렸으나 오후
5시가 조금 지났을 때 돌연 고막을 찢는 듯한 큰 천둥 소리가 울렸다. 베토벤은 깜
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오른손을 약간 올렸는데 그 다음 순간 숨이 멈추고 말았
다. 지상에서의 베토벤은 57년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장례식은 3월 29일에 거행
되었고 약 2만 여명의 조객이 몰려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의 시신은 빈 중
앙 묘지에 안치되었다.

베토벤은 오페라 "피델리오"(1곡뿐) 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 걸쳐 많은 곡을 남겼다.
본래 무뚝뚝하던 그의 성격은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하여 더욱 자신의 내면 세계로
파고들어 감으로써 깊이 있고 심오한 대작들을 잉태하게 되었다. 특히 베토벤 음악
의 진수는 교향곡 9곡에 집약되어 있다. 그의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도 그 가치가 대
단하지만 이것 역시 교향곡을 축소한 성격을 띤 교향적 피아노 음악으로 간주되었
다. 교향곡 제1번은 베토벤이 30세 때 만들었는데 내용에 깊이가 있으며 형식은 하
이든, 모짜르트와 달리 4악장으로 구성되었다. 악기는 2관 편성으로 짜여져 이전까
지의 실험 단계가 비로소 결론 내려진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베토벤의 악기 편성
원칙은 낭만주의 시대까지의 기준이 되었다.

제3번 "영웅"에 이르러서는 베토벤의 독창적인 품격이 크게 비약하였다. 이 곡은 원
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한 곡이었으나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실망하여 프
로코비츠 후작에게 헌정하였다. 교향곡에 웅대한 낭만주의를 가미한 선구적 작품으
로 경묘한 스케르쪼가 잘 어우러져 가히 교향곡 사상 금자탑을 세운 작품이다.

원숙기에 씌어진 제5번 "운명"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는 베토벤의 말에
서 유래하며 열정적이고 화려한 표현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곡이다.

제6번 "전원"은 전원 생활의 추억이 묘사된 평화와 감사의 정이 풍기는 목가적인 노
래이다. 베토벤은 이 곡에 대해 "음화가 아닌 감정의 표출이다."라고 말했으며 훗날
인상주의 음악의 문을 연 작품이다.

제7번은 리듬적인 요소가 강조되었고, 제 8번은 고전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게 표현
되었다.

제9번 "합창"은 그의 평생을 결산하는 대작으로 평가된다. 실러의 "환희"에 합창을
인 마지막 곡이 유명하며 성악과 기악을 교향곡에 함께 도입하여 낭만주의 교향곡
역사에 새로운 발판을 마련한 명작이다.

협주곡에는 5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하여 1곡씩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3중 협주
곡이 있는데 이들 작품은 모두 베토벤이 활약하던 초,중기에 완성된 것들이다.

실내악 분야에서는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 Op.47"가 걸작으로 손꼽히며 "대공
트리오"라 불리는 피아노 3중주곡 Op.97이 유명하다. 성악곡으로는 유명한 오페라
"피델리오" 이외에 50곡 이상의 리트와 약간의 칸타타가 남아 있다. 또한 "비창
Op.13", "월광 Op.27-2", "발트슈타인 Op.53", "열정 Op.57", "고별 Op.81a" 등을 비
롯한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바흐의 48곡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구약에 비유하
여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로 불릴 만큼 뛰어난 걸작이 많다.

** 유투브 감상 /
고음악 전문 오케스트라 La Chambre Philarmonique(지휘/E Krivine)가
연주하는 Symphony No 9 D minor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tLVzosiaPu0

**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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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베르트(Schubert, Franz Peter, 작곡가, 1797-1828)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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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Mozart, Wolfgang Amadeus, 작곡가, 1756-1791) [1]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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