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0
 1868   94   1
  View Articles

Name  
   곽근수 
Homepage  
   http://sound.or.kr
File #1  
   600full_giacomo_puccini[1].jpg (9.9 KB)   Download : 46
File #2  
   puccini_5[1].jpg (109.5 KB)   Download : 36
Subject  
   푸치니(Puccini, Giacomo, 작곡가, 1858-1924)



** 유투브 감상 /
Missa di Gloria - Gloria
Gulbenkian orchestra & chorus, 지휘 / Michel Corboz
http://youtu.be/QhS65VlDjPQ


가장 가까운 아내마저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푸치니는 완벽한 정적과 완벽한 놀이를 좋아했
다. 오랜 동안의 가난과 고생이 오페라 '마농 레스꼬'의 눈부신 성공으로 끝나고, 늘 이집 저
집 셋방살이로 떠돌던 그에게 엄청난 돈이 들어오게 되자 10여 년간이나 조건 없이 자기 뒤
를 돌보아준 악보 출판업자 리코르디에게 진 빚과 남의 손에 넘어갔던 선조 대대로 살던 집을
찾는데 쓰고, 고향 루카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에 작곡에 전념
할 수 있는 집을 짓게 된다. 푸치니가 이곳에 정착하자 하나 둘씩 예술가들이 모여들게 된다.
푸치니와 이들 예술가들은 길가의 한 오두막집을 정해 놓고 자주 모여서 마시고 먹고 수다를
즐기는 시간을 나눴다. 푸치니 아내의 눈에는 밤낮없이 이런 식으로 지내는 남편이 무위도식
꾼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원래 이 오두막은 구두 수선쟁이 지오반니의 소유였는데 그가 남미로 이민을 떠난 뒤에 푸치
니가 사 들여서 자기 취향에 맞춰 구조를 개조해서 오늘날의 멤버스 클럽(Member's Club)처
럼 만들어 놓고 그 이름을 '라 보엠'이라고 지었다. 그 무렵 푸치니는 라 보엠을 작곡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했던 이 클럽의 속성은 그의 오페라 '라 보엠'에 등
장하는 4명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주민이래야 불과 120여
명밖에 안 되는 이 한적한 시골에서 남편은 이런 식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고 아이들은 학교 때
문에 밀라노의 기숙사에 가 있었으니 결국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푸치니의 아내 앨
비라였다. 앨비라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 친척들과 모의해서 귀신 소동을
일으켜 보기도 했지만 푸치니는 요지부동이었다.

앨비라는 푸치니가 밀라노 음악원 학생이었을 때 친구였던 제미니아니의 부인이었다. 앨비라
가 제미니아와 결혼하기 이전부터 푸치니와는 잘 일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녀는 풍만한 몸매
를 가진 미인이었다. 푸치니 역시 미남 청년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별일은 없었고, 앨비라
는 제미니아니와 열애 끝에 결혼했고 남매를 낳았다. 둘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제미니아니는 아내가 노래에 소질이 있음을 알고 푸치니에게 보내서 성악과 피아노를 배우도
록 했다. 이것이 앨비라와 푸치니 사이를 급격하게 가까이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무
렵 푸치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음악을 공부했던 푸치니의
상심은 너무도 컸다. 앨비라는 성심으로 그를 위로했고 그것은 급기야 둘의 마음을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두 사람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앨비라가 남편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둘은 밀라노로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했다.

푸치니의 고향 루카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푸치니의 선조들이 5대에 걸쳐서 대대로 성당
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해 왔다는 사실이 푸치니를 부도덕한 인물로 매도하는데 상승 작용을
했다. 게다가 앨비라와 제미니아니의 결혼이 가톨릭 성당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앨비라가 비록
남편을 버리긴 했으나 이혼은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때문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안토니
오는 18세가 될 때까지 사생아 신세였다. 푸치니의 학비를 대 주었던 백부 첼루씨는 조카의
부정에 격노해서 그 동안 주었던 학자금을 이자까지 계산해서 당장 갚으라고 펄펄 뛰었고, 고
향 사람들은 저마다 푸치니의 험담을 서슴지 않았다. 사랑의 힘 하나만으로 용기를 내긴 했지
만 그 같은 거센 비난과 모욕을 막상 대하자 심약한 푸치니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것은 또한
그의 예술 창작에도 큰 지장을 초래했다.
한편, 앨비라의 처지에서 본다면 그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사랑으로 버
티겠다는 단단한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정작 살다보니 남편은 예술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
을 뿐 자기를 향한 자상한 배려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낙담했다. 결과적이긴 하지만
그녀가 치른 그 엄청난 고통에 비한다면 얻어진 행복은 너무도 미미한 것이었다.

게다가 푸치니는 물질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새 몇 마리 잡기 위해서 엄청난 수의 엽총을 수
집한다든지, 최신 자동차라면 무조건 사야하는 집념, 최신 요트 역시 그의 오금을 저리게 만
드는 대상이었다. 특히 자동차에 대한 집념은 거의 광적이어서 '나비부인'을 작곡할 무렵엔 전
복사고를 일으켜 8개월간이나 깁스를 하고 3년간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고초도 겪었다. 물질
을 통한 쾌락의 추구와 여성 편력으로 창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고자 했다. 그것이 그를
스피드 광으로 만들었고 연애유희로 몰아넣었다. 만일 그가 당뇨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식도락
이 하나 더 추가됐을 것이다. 푸치니의 이러한 생활 양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과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치니는 1858년 12월 22일, 토스카나 지방의 루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루카의 성 마
르티노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를 4대째 맡아온 빛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쟈코모의 부
친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고 있었다. 부친은 푸치니가 다섯 살이 됐을 때 51세로 별
세했다. 남편보다 18세 연하인 푸치니의 어머니 알비나는 혼자서 일곱 아이를 키워야 했다.
때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가난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푸치니는 선조들의 뒤를
이어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어야 할 입장이었는데도 (루카에서는 직업의 세습이 일종의
관습이었고 특히 예술적 직업의 경우는 더욱 세습이 현저했다) 불구하고 그의 미래 계획은 달
랐다.

푸치니에게 오페라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를 마련해준 인물은 그의 음악선생 안젤로니였다.
안젤로니는 제자에게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소개했고, 이 작품을 관람하고 나서 크게
감동을 받으면서 자신의 진로를 오페라 작곡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밀라노 음악원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고 22세 때 입학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힘만으로는 도저
히 학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어 한때 음악원 입학의 꿈이 무산될 뻔 했다. 그러나  아들의 재
능을 믿은 어머니는 독신으로 살고 있는 오빠의 원조를 얻어냈고, 여왕에게 탄원서를 내는 용
감성도 발휘해서 1년간의 왕실 장학금을 얻는데 성공해서 드디어 아들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
다.

그러나 1년 뒤엔 왕실의 장학금이 확보되지 못한데다 루카의 교회 장학금마저 거절되기에 이
르러 푸치니의 학자금 사정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 장학금을
타는 데 성공해서 일단 학비 문제는 해결했지만 생활비 마련은 막연했다. 어머니가 보내주는
적은 돈으로 거의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절 푸치니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
지를 보면 예외 없이 먹는 문제가 주제였다. 늘 배가 고팠다. 게다가 라 스칼라의 오페라 공
연들을 보고 싶었지만 비싼 입장료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 장에 300리라나 되는 스칼
라의 예매권들이 늘 매진되고 자리가 꽉꽉 차는 것을 본 푸치니는 "어머니, 정말 밀라노 사람
들은 굉장히 부자들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그는 가난 때문에 먹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을 제대로 못하는 것에 대해 항상 한을 품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후일 물질에 집착하고
향락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푸치니의 가문은 5대에 걸친 음악명문가였다. 결과적으로 루카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
는 동안 푸치니家의 음악가들에 의해서 음악의 전성시대를 누렸고, 특히 푸치니에 의해서 루
카는 역사상 가장 빛나는 오페라 작곡가의 고향이 되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창작은 '빌리'에서 시작되어 '에드가'를 거쳐 '마농 레스꼬'에서 개화되고, 그
의 이름은 유명해진다. 여기서 그의 가난도 끝이 났다. 푸치니의 연애사건들은 참다운 사랑의
발견을 위한 방황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성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아내 앨비
라와 마찰이 심했다. 앨비라는 남편의 행동을 경멸했다. 게다가 푸치니는 나이를 먹을수록 세
련되어 가고 있는데 비해 앨비라는 그렇지 못했고,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도 퇴색되어가고 있
었다. 물론 앨비라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 해도 푸치니의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는 없었겠지만
앨비라의 경우는 너무 심했다. 게다가 앨비라의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푸치니
의 정식 아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마음은 조그만 일에도 상처받기 쉬웠고 이것이 그녀
를 완고하게 만들어 남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앨비라의 마음을
잘 나타내는 편지가 전해진다.

"당신은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당신의 그런 태도에서 상처를 받았
습니다. 나는 평생 그것을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당신의 성공을 함께 나누고 싶었고 그 어
떤 기쁨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나의 최소한의 위안은 당신이 평안한 상태로 계셔
주는 것뿐입니다. 당신에 비하면 나는 정말 소인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징징거리는 나를 용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푸치니는 이러한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
고, 심지어는 자기의 연애도 창작이라고 우기는 이기적인 행동을 계속해서 아내의 질투심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어느 날, 한 여가수가 지극히 사무적인 일로 찾아왔다. 이미 앨비라는 예술가라면 모두 자기
의 적처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 여가수의 방문이 그녀를 몹시 자극시켰
다. 남편이 그 여가수와 얘기를 나누고 있자 순간적으로 질투심이 폭발한 앨비라는 파라솔로
여가수의 옷을 갈가리 찢고 흠씻 두들겨서 내쫓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도 후일의 비극적인
사건에 비하면 약과였다. 사건은 푸치니가 자동차 사고로 거동을 못하고 집에서 오랜 기간 치
료를 받을 때 발생했다. 처녀의 이름은 도리아. 나이는 16세. 토레 델 라고 출신의 시골
처녀인데 거동이 불편한 푸치니를 위해 성심을 다해 잔심부름을 해 주었다. 소녀의 정성을 받
고있는 푸치니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이렇게 해서 도리아가 이 집에 온지 5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 무렵 앨비라의 친척 한 사람이 충동질을 해댔다. 도리아와 푸치니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푸치니는 그들 사이가 결백하다고 강변했지만 앨비라는 끝내 그녀
를 쫓아내고 말았다. 푸치니는 그것으로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앨비라는 집요하게 도리아
를 괴롭혔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도리아가 형편없는 계집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견디다 못
한 그녀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녀의 가족들은 앨비라를 고발했다. 당국은 시체를
검시했다. 그 결과 도리아는 처녀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 전국의 화제로 신문들이 연일 대서특필했고 푸치니의 적들은 이 기회를
즐겼다. 푸치니는 갑자기 늙어갔다. 부부 사이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후일,
드리아의 비극은 오페라 '수녀 안젤리카'에서 가련한 노예 처녀의 모습으로 승화된다. 또한 그
의 침체된 영혼은 '서부의 아가씨'로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된다. 이후 그의 오페라 창작은 지속
적으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60세가 가까워지면서 앨비라와의 사이도 점차 회복되어 나갔다.
1919년엔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런던에 해외여행을 하였다.

1924년 10월, '투란도트'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푸치니의 인후암 증세는 매우 깊어지
고 있었다. 그는 고통을 호소했다. 정밀진단 결과 그의 병명은 인후암이었고 치료 가능성은
없었다. 1924년 11월 4일. 푸치니는 X선 치료를 받기 위해 브뤼셀로 떠났다. 그의 짐 속에는
투란도트의 미완성 악보가 들어 있었다. 1924년 11월 24일 아침. 주치의는 푸치니의 목에 구
멍을 뚫고 3시간의 수술을 시행했다. 경과는 좋았다. 의사도 낙관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의
심장은 발작하기 시작했다. 11월 29일 새벽 4시. 푸치니의 심장은 멈췄다. 그의 장례식은 12
월 3일 밀라노에서 거행됐고 토스카니니는 '에드가'중의 진혼 미사곡을 지휘했다. 전 국민은
조기를 달았고 스칼라 극장도 이날은 문을 닫았다.

1925년 4월 25일.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투란도트'가 초연 됐다. 연주 도중 이 지휘자는 3막
1장의 '류'가 죽는 장면이 끝나자 "여러분, 여기서 쟈코모 푸치니씨는 작곡을 중단했습니다.
죽음은 역시 예술보다 강한 힘이었습니다." 라는 짤막한 소개를 했다.

푸치니는 고향 루카에서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밀라노 음악원에 진학해서 밧찌니(Antonio
Bazzini)와 폰키엘리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883년 졸업 작품으로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카프리치오’를 작곡했다. 이 음악의 주제들은 나중에 라 보엠에서 재사용 되었다. 1880년대의
이탈리아에서는 자국의 오페라보다 프랑스의 오페라(마이어베어, 구노 등)가 극장에서 더 대접
을 받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작곡가들 중 일부 그룹은 바그너의 영향으로 독일의 낭만
적 소재를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푸치니도 작품 활동 초기에 이러한 경향에 처해 있었다. 그
의 첫 오페라 ‘빌리(Le Villi)’는 하이네의 낭만적 독일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애초에 손초뇨(Sonzogno) 출판사의 현상모집에 이 오페라를 출품했었지만 상
을 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밀라노의 베르메 오페라 극장(Teatro Dal Verme)에서
성황리에 공연되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푸치니는 리코르디(G. Ricordi) 출판사로부터 지원
을 받아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푸치니는 다음 작품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로 이른바 ‘푸치니적’인 성격의 오페라를
확립한다. 이것은 독일적 낭만주의 성향의 것이 아니라, 극이 감성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울러 베르디에게서 보는 극적이고 영웅적인 성격의 것과는 전혀 달리 여
리고 감상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마농 레스코와 함께 푸치니는 유럽의 대작곡가의 반열에 들
어섰다. 그 이후 푸치니적인 오페라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서부의 아가씨로 이어진다.
단, 토스카의 경우는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매우 사실주의적, 즉 베리스모적 성격도 동시에 가
지고 있는 작품이다.

푸치니의 가장 성공적 오페라는 라 보엠(1897년)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소재는 파리에 살고
있는 보헤미안적인 취향의 예술가들 이야기이다. 이 소재를 가지고 오페라를 쓰려고 먼저 나
선 사람은 레온카발로였다. 그의 작품 라 보엠은 푸치니의 것보다 2년 전인 1895년에 토리노
에서 상연되었다. 두 작곡가는 친구 사이였는데 서로 자기가 이 소재를 쓰겠다고 해서 결국은
절교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리고 그들의 출판사들도 경쟁상태에 휘말리게 되었다. 최근의 어
떤 연구는 푸치니의 라 보엠 대본 역시 그 출발점이 레온카발로의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하지
만 푸치니는 대본가(일리카, 지오코사)와 출판업자(리코르디)와 함께 자신의 음악에 맞는 대본
을 만들어 오페라 역사상 흔치 않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라 보엠의 대본작성에 협력한 대본작가들은 푸치니의 다음 작품 ‘토스카’에서도 성공적인 협
력 작업을 계속했다. 그 다음 오페라 ‘나비부인’은 1904년 밀라노 초연에서 큰 실패를 맛보았
다. 그러나 푸치니는 꾸준하게 수정작업을 해서 1907년에 비로소 오늘날의 모습의 것으로 만
들었다. 그 이후에 그의 작품에 나타난 경향은 오히려 더 가벼운 종류의 것이었다. ‘서부의 아
가씨’를 미국식 해피엔드로 바꾸었고, ‘제비’는 오페레타였다. 그리고 단막극 3개를 묶은 ‘3부
작’ 역시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극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주의적 오페라인
‘외투(Il Tabarro)’, 가톨릭적인 신비극 ‘수녀 안젤리카(Suor Angelica)’, 오페라 부파 성향의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가 그것들이다.

푸치니가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투란도트’는 다양한 극적, 음악적 요소들을 흡수하려는 의
도가 보이는 작품이다. 희극과 비극, 기존의 전통적 이탈리아 성악 오페라 전통에 5음음계와
무조음악적의 요소를 통합하려고 한 점이 그것이다. 3막의 절반가량이 미완성이었는데 알파노
(Franco Alfano)가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푸치니의 스케치를 토대로 이 오페라를 완성시켰다.

푸치니의 오페라 소재는 인정미가 풍부한 것이 많고, 음악적으로 이탈리아 특유의 매력 있는
선율이 노래되는데다, 특히 우아한 선율에서조차 아주 독특한 맛이 있다. 인물의 묘사에 있어
서는 사실적인 표현으로 청중에게 주는 설득력이 강하고, 노래는 넘치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
다. 관현악은 새로운 수법을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고, 특히 지방색을 즐겨하여 그 분위기를
교묘하게 표출하였다. 나비부인에서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일본색이 완연한 음악이라든지,
투란도트에서 연주되는 중국의 컬러는 그야말로 경탄을 금치 못할 만큼 강렬한 지방색을 갖는
것이다. 아울러 무대에 대한 그의 예리한 감각은 극적인 효과를 치밀하게 계산해서 극적인 효
과가 배가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푸치니의 작품의 제재는 대중과 밀착되어 있다. 투란도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오페라에서 주
인공은 서민적이면서도 운이 없는 여자 주인공을 등장시켜서 청중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성공했다. 평소 푸치니가 “좋은 대본이 없으면 나의 음악은 쓸모가 없다”고 했듯이
제재의 선택과 대본에 열정을 가지고 ‘마농 레스코’ ‘토스카’ ‘나비부인’같은 걸작을 탄생시켰
다.

푸치니는 기나긴 오페라 작곡가의 전통을 유지해 오던 이탈리아의 마지막 대작곡가에 속한다.
그는 19-20세기의 전환기에서 당시 음악적 기법이 제공하는 것들을 극적인 내용에 맞게 효과
적으로 사용하였다. 여주인공과 사랑의 테마에 맞춘 그의 오페라는 다양한 색깔의 오케스트라
편성을 통해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한다. 또한 마스네로부터 받은 선율적인 성격,
그리고 바그너로부터 받은 화성과 라이트모티브 영향도 곳곳에 배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영
향은 그의 오페라가 결과적으로 풍요한 음악적 내용을 갖게 했다.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만큼 청중을 열광시키는 능력을 가진
작곡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기네 출신 작곡가의 작품에 유난히 편을 들고 있는 독일에서조
차도 푸치니의 오페라가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보다 더 빈번하게 상연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푸
치니는 몬테베르디 이후 오페라의 긴 역사 중 최대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푸치니는 본
질적으로 19세기 오페라의 전통을 꽃피운 최후의 대작곡가이다. 극적 효과에 관한 한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만큼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오페라들이 그가 살아있을
때 보다도 지금 더욱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하게 증명이 된다.

** 작품목록

■ 오페라
빌리(Le Villi, 1막, 1884. 2막으로 확장된 판본, 1884).
에드가르(Edgar, 4막, 1889. 3막으로 축소된 판본, 1892)
마농 레스꼬(Manon Lescaut, 4막, 1893)
라 보엠(La Boheme, 4막, 1896)
토스카(Tosca, 3막, 1900)
나비부인(Madame Butterfly, 2막, 1904. 확장된 3막 판본, 1904)
서부의 아가씨(La fanciulla del West, 3막, 1910)
제비(La rondine, 3막, 1917)
3부작(Trittico) : 수녀 안젤리카(Suor Angelica), 쟈니 스키키(Gianni Schicchi)』(3막, 1918), “외투”
투란도트(Turandot, 3막, 미완성 유고, 1926)

■ 교회음악
미사 Ab 장조, 1880
Requiem, 1905

■ 실내음악
현악4중주 D장조, 1883
“국화”(I crisantemi, 현악사중주용, 1890).

■ 성악 및 기악곡
1876 – 관현악을 위한 전주곡 마단조
1880 – ‘너에게’(A te), 가곡
1877 – 싼 폴리노를 위한 모테토(Mottetto per San Paolino) ‘Plaudite Populi’
1878 – 테너 독창과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크레도(Credo)’  
1878? –합창과 오르간을 위한 ‘베너(Vexilla Regis)’
1878-80 – 4성부 미사
1881-83 – Largo Adagetto in 바장조 (관현악곡)
1882 – 관현악을 위한 전주곡 가장조
1882 – 현악4중주 라장조
1881-1883 - 현악4중주를 위한 푸가 – 4성부를 우한 푸가 라단조,  
1883 – Salve Regina (소프라노, 하모니움)
1883 – Capriccio sinfonico 바장조
1883 – 테너의 서창과 아리아 Mentìa l’avviso
1883 – 가곡 Ad una morta(죽음)
1883 – 가곡 사랑의 이야기(Storiella d’amore)
1884 – 현을 위한 3개의 메뉴에트
1888 – 가곡 ‘태양, 사랑, 아침’
1890 – ‘국화, 엘레지’(현악4중주)
1894 – Piccolo (피아노 독주)
1896 – 가곡 Avanti Urania!
1897 – 가곡 ‘디아나 찬송(Inno a Diana)
1899 – 가곡 ‘새와 자장가’
1899 – 행진곡 ‘충격(Scossa elettrica)’
1902 – 가곡 ‘육지와 바다(Terra e mare)’
1904 – 가곡 ‘영혼의 노래, 앨범 페이지(Canto d’anime, pagina d’album)‘
1905 – 레퀴엠
1905 – 합창 Ecce Sacerdos magnus
1905 – 가곡 ‘하느님 나라(Dios y Patria)
1908 – 가곡 ‘나의 집, 나의 집(Casa mia, casa mia)’
1907 또는 1910 – Piccolo tango per pianoforte
1907 또는 1910 – Foglio d’album per pianoforte
1912 – 가곡 ‘황금의 꿈, 자장가(Sogno d’or, ninna nanna)‘
1916 – Pezzo ()피아노 독주곡)
1917 – 가곡 Morire
1919 – 가곡 ‘로마 찬가(Inno a Roma)

■ 그밖에 오르간곡, 피아노곡, 가곡, 합창 등

** 유투브 감상 /
Missa di Gloria - Kyrie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slqDdLTu1hY

**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김재환
 ::: 논문에 참고 자료로 사용하려 합니다.  

Name
Memo
Password
 
     
Prev
   말러(Gustav Mahler, 작곡가, 지휘자, 1860-1911)

곽근수
Next
   차이콥스키(Tchaikovsky, Peter Ilyich, 작곡가, 1840-1893)

곽근수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ty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