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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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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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뷔시(Debussy, Claude, 작곡가, 1862-1918)


** 유투브 감상 /
"Claire de lune" by Angela Hewitt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ip64cG7gK4
  
** 드뷔시의 연인들

폰 메크 부인의 딸 소냐는 아름다운 처녀가 되어 있었다. 1880년, 처음으로 폰 메크
부인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이래 세 번째로 모스크바의 부인 저택을 방문한 드뷔시
는 소냐의 뛰어난 미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름답게 너울거리는 갈색 머리, 푸
른 눈동자, 구름을 밟듯 사뿐사뿐 걷는 자태는 드뷔시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고도
남았다. 그들은 폰 메크 부인과 여행을 함께 하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산책을 하
는 등 둘만이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소냐는 드뷔시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
다. 그러나 둘은 피아노 레슨이라는 구실로 뜨거운 사랑의 밀어 나누기에 시간 가
는 줄 몰랐다. 폰 메크 부인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소냐와 드뷔
시가 함께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은밀히 계획을 세우는 한편 차이콥스키에게 편지
를 띄웠다. "나는 소냐가 스스로 남편을 선택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인 제가 결정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되면 소냐도 결국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드뷔시와 소냐의 풋사랑은 무참히 조각날 시각이 다가왔다. 폰 메크 부
인의 그 정성어린 후원과 친절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풋내기 드뷔시는 모
르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던 드뷔시는 부인에게 자기들
의 관계를 명백하게 고백하고 떳떳이 약혼을 하든지, 최소한 둘의 사랑을 공개
적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날밤, 폰 메크 부인의 일행은 오페라 공연을 보고 돌아왔다. 그들은 둘러앉
아 오페라의 얘기들을 나눴다. 부인의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다. 이윽고 뿔뿔
이 각자의 침실로 돌아가게 되고 부인만이 응접실에 혼자 남게 되자 드뷔시의
결심은 실천에 옮겨졌다. "부인,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소냐를
사랑합니다. 물론 소냐도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희들 사
랑을 허용해 주십시요." 부인의 미간에 주름이 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응답
이 드뷔시의 심장에 꽂혔다. "파리로 돌아가세요. 소냐의 피아노 교사는 내일
다른 분이 옵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뜨거운 사랑과 열정은 무참하게 꺼져버리
고 말았다. 1882년의 일이었고, 드뷔시는 20살이었다.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쫓겨나다시피 파리로 돌아온 드뷔시의 가슴은 온통 상
처 투성이었으나 그보다 더 절실했던 현실적 문제는 당장 끼니를 이어가는데
있었다. 다행히 친구 뷔달이 피아노 반주 일을 소개했다. 그가 반주를 맡은 상
대자는 피에르 바니에 부인이었다. 나이는 30세 정도였고 세련되고 원숙한 아
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남매를 둔 어머니였고 교양 있고
저명한 건축가를 남편으로 둔 부인이었다. 소냐와의 처참한 이별 직후에 이루
어진 바니에 부인과의 만남은 드뷔시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게다가 바니
에 일가는 드뷔시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니에는 자기들의
아파트 방 하나를 드뷔시에게 제공했다.

드뷔시는 그녀의 노래에 반주를 하는 것에 새로운 행복을 느꼈다. 급기야 부인
을 열렬하게 사랑하기 시작했다. 부인의 마음도 그를 향해 비밀스럽고도 뜨겁
게 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둘의 정염은 드뷔시의 방에서 타오르기 시작했
다. 부인의 정확한 이름은 마리 브랑슈 바니에. 화가 쟈크 에밀이 그린 바니에
부인의 초상화를 보면 유행의 첨단을 가는 옷차림새, 자아가 강하고 열렬하고
정열적인 표정을 찾을 수 있다. 어찌됐든,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주변에선 둘
의 관계를 두고 수군대기 시작했고 이 소문은 바니에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바니에는 쓸데없는 소문일 뿐이라는 식으로 이를 일소에 부쳤다. 그는 지식과
교양에다 관용까지를 갖춘 신사였다.

이 무렵 드뷔시는 '화려한 향연'의 제 1집을 바니에 부인에게 바쳤다. 저 유명
한 가곡 '달빛'과 '꼭두각시 인형'등이 들어있는 가곡집이었다. 그의 헌사는 다
음과 같이 열렬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의하지 않으면 기필코 생명을 얻지 못
할지니, 이 노래가 요정의 입술에 오르지 않고 끝난다면, 마음 흔들리게 하는
품위와 아름다움은 사라지리라."

한편, 관용의 미덕을 완벽하게 갖춘 바니에는 한 젊은 음악도의 장래가 자신
의 손에 놓여져 있다는 자각을 갖고 드뷔시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고 제공했다. 당시, 드뷔시는 파리 음악원에서 귀로에게 작곡을 사사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혐오했고, 작
곡 학도들의 등용문이자 출세의 관문이기도 했던 로마대상에도 참가하지 않겠
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떠벌릴 정도였다. 그러나 바니에는 인내를 갖고 드뷔시
를 설득했다. 만일 이러한 바니에의 설득이 없었다면 드뷔시의 인생은 크게 달
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할 것이다. 드뷔시는 마침내 승복하
고 음악원을 졸업하고, 로마대상에도 응모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편, 바니에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게 해서든 드뷔시가 로마대상을 받도록
하여 로마에 유학을 보냄으로써 아내와 드뷔시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부인 역시 남편
의 설득에 때때로 동조한 것을 보면 드뷔시와의 관계가 타의적인 힘에 의해 매
듭 지어지기를 내심 원했던 것으로도 보아진다. 그들 부부는 자신들의 부러울
것 없는 현실이 청년 드뷔시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는 점에선 무
언의 합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드뷔시는 1884년에 칸타타 '탕아(蕩兒)'로 로마대상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후일 심사가 진행되고 그 결과를 기다리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지 '자네가 상
을 탔네'. 이렇게 말하면 믿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때 나는 즐거움이 싹 가시더
군. 나는 어떤 조그만 것이라도 공식적인 자격이란 것에는 숙명적으로 뒤따르
는 지루함이라든가 속박감, 그리고 신경을써야 된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이지.
그 위에 또 이제부터는 내가 자유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었
다."

드뷔시는 1885년 1월,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이에 앞서 프랑스를 떠나면서 바
니에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저의 이 주체할 길 없는 마음의 어둠 속으로 당신
을 이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힘을 내기 위해서 가능한 한 노력을 하겠습
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로마로 떠난다는 것이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일
이었다. 바니에 부인 곁을 3∼4년이나 떠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는 로마로 간지 2년쯤 지났을 무렵 1개월의 휴가를 얻어 불쑥 바니에와 그의
부인 앞에 나타났다. 부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이상 로마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인의 표정은 2년 전의 그 열렬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옆
에 남편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선 정염의 불꽃은 사라져 있었다.
드뷔시의 가슴에 서리가 내렸다.

마리 브량슈 바니에와의 별리는 드뷔시에게 걷잡을 수 없는 애욕과 광란을 몰
아다 주었다.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로마의 유학이 끝나 파리
로 돌아왔다. 그때 그에겐 새로운 또 하나의 여성이 등장한다. 이름은 가브리
엘 뒤퐁, 흔히 갸비로 불려지는 여인이다. 만나자마자 그들은 사랑했고 곧 동
거에 들어갔다. 1891년이었다. 갸비는 점원과 가정부를 지낸 지극히 평범한 여
인이었다. 사람들은 갸우뚱했다. 드뷔시의 선택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다. 음악사에서는 이 여인을 '푸른 눈의 갸비'로 부르는데, 약 6년간의 세월을
드뷔시의 변덕스런 생활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거듭되는 애인의 바람기
에 가출과 귀가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거센 반항을 보이기도 했다. 그
러나 그녀는 참으로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었고 진실로 드뷔시를 사랑했다.
이렇게 해서 6년이 지났다.

1897년 겨울 어느 날. 드뷔시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자기 곁을 떠난다는 느낌
을 받았다. 드뷔시가 누군가에게 청혼을 했고 그 청혼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을 알게 된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상대는 그녀의 가까운 친구 텍시에였다.
그 얌전하던 갸비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도 드뷔시의 태도는 분명했다. 그
녀는 권총 자살을 기도했지만 드뷔시에 의해 저지됐다.

드뷔시는 철도원의 딸이자 한때 재봉공이었던 텍시에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1899년 10월 29일에 친구 루이스, 작곡가 에릭 사티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올려
졌다. 가난했던 드뷔시는 결혼식 직전까지 피아노 레슨을 해야만 했다. 식이
끝난 후 친구들과 식사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결혼 후, 그는 비로
소 안정을 찾고 작곡에도 진전을 보여 1902년엔 그의 출세작 '펠레아스와 멜리
장드'가 공연됐고, 이듬해엔  정부가 주는 '레종 도뇌르' 5등 훈장을 받았다. 그
는 이제 가장 인기 있는 대작곡가로 변신하고 있었다.

텍시에 릴리, 그녀는 충실한 아내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늘 새로운
것을 동경하는 드뷔시의 아내로서는 처음부터 부족한 존재였다. 드뷔시의 마
음은 점차 그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드뷔시는 제자 라울 바르다
크의 어머니 엠마 바르다크를 알게 됐다. 엠마는 17세에 결혼했고, 30세때 포
레(Faur )로부터 가곡을 헌정 받았고, 지금은 44세의 중년 부인이었다.

둘의 관계는 곧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1904년 6월 어느 날, 둘은 육체를 통한
사랑의 나눔을 가졌다. 이후 그들은 마음껏 애욕을 나누었다. 호화롭고 즐겁
게 그들의 애정은 드높은 파도를 이루면서 철썩거렸다. 뜨겁고 감미로웠으나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두려운 사랑의 불꽃을 태웠다. 드뷔시는 이 핑계 저 핑
계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엠마와의 여행 때문이었다. 릴리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도 설마 했다. 그러던중 1904년 7월 14일, 남편이 아
침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간 뒤 며칠간 전혀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엠
마의 집을 찾아갔다. 엠마는 없었다. 그제서야 남편과 엠마가 함께 여행을 떠
난 사실을 알게 됐다. 하늘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죽기로 결심하고 권총을
집어들었다. "내 사랑, 나의 영원한 클로드, 나는 당신을 두고 떠나야 합니다.
내 눈앞에서 당신이 나를 버리고 떠나는 모습을 차마 목숨을 지니고서야 어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내 것입니
다. 영원한 내 남편, 내 사랑, 그리고 내 하늘입니다. 클로드 안녕, 안녕, 당신
의 아내 릴리, 오! 나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어요!" "꽝!"

릴리는 왼쪽 가슴을 겨누고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몇년전 자기가 배신했었던
갸비와 같은 방법으로 꼭 같은 운명을 반복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생명
을 건졌다. 드뷔시는 정성으로 아내를 간호했다. 그러나 차도를 보이자 그는
다시 엠마에게로 달려갔다. 이 일은 곧 파리에 크게 알려졌고 신문과 대중들
은 드뷔시에게 비난을 퍼붓는 한편, 릴리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는 엠마와 함께 저지섬으로 도피했다.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
곤 가을에 파리로 돌아왔다. 릴리에겐 이혼을 요구했다. 그때 이미 엠마는 임
신중이었다. 엠마는 부유한 여성이었고 따라서 드뷔시의 가난도 끝이 났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드뷔시가 돈에 팔려갔다는 비난을 했으나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그들의 결합은 드뷔시의 종착이었으며 죽는 날까지 이어졌다.

드뷔시의 걸작 '바다'가 초연 되고 2주일 뒤, 엠마는 여자 아기를 해산했다. 이
름을 클로드 엠마라고 지었다. 이 아기가 드뷔시의 전기에 등장하는 <슈슈>이
다. 드뷔시는 43세였다. 여유 있는 물질생활, 엠마의 재질과 재능, 빛나는 육체
는 드뷔시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했다. 여기에 그가 그토록 원하던 아기까지 태
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멋진 행복은 불과 13년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드뷔
시는 1907년부터 항문에 암이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다망한 스케줄
이 왕왕 이 병으로 취소되기 일쑤였다. 1915년엔 수술을 받았다. 1917년 5월 5
일 그는 공중(公衆)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1918년 3월 25일,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때, 독일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이날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91주기였다.

*** 드뷔시는?

1862년 8월 22일, 파리의 교회 상제르망에서 태어난 드뷔시는 이마의 뼈가 돌
출한 기묘한 얼굴 모습의 소년이었다고 한다. 헌 피아노 앞에서 몽상에 잠기
는 소년 드뷔시가 음악의 길로 나아가도록 양친을 설득한 것은 시인 베를렌의
의모 모테 드 플뢰를 부인이었다. 드뷔시는 피아노를 잘 쳐서 1873년 11세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이 허가 되었다. 2년 후에는 벌써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바
단조를 연주할 정도로 능숙했다고 한다.

드뷔시는 어릴때부터 감수성이 풍부하고 귀족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
이를 먹어서도 그의 취미는 고상해서 자기 주위에 고급 만화나 책을 항상 놓
아 두었으며, 또한 미식가이기도했는데 특히 캐비아를 좋아했다. 복장은 댄디
즘의 극치로 신중히 선택한 목도리, 망토, 카우보이 풍의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드뷔시는 병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어서 자기가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는 대중앞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고 연주회에서 지
휘하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인간보다도 고양이를 좋아했으
며, 언제나 애완용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을
쉽게 터놓지 않았으며, 담배를 즐기고 늘 조용한 생활을 했다.주위에서는 이
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였다. 당연히 친구가 적었으나 그중에는
프랑스 근대 작곡가의 제1인자라고 말하여졌던 에릭 사티와 시인 피엘 루이스
가 있었다.

드뷔시의 재능은 인정을 받게되고, 많은 상을 맏았으며 칸타타 "탕아"로 1884
년 드디어 최고의 로마 대상을 받았다. 로마대상을 받고 로마로 유학을 갔지
만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던 드뷔시는 25세의 나이로 다시 프
랑스로 돌아와 파리 전위예술(avent-garde)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정기적으
로 상징주의 시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여러 작가들과 교류를 하였다. 그
는 순수예술을 지향한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인들이 추구했던 객관적인 묘사
와 기교적인 완벽보다는 작가들의 심리상태를 탐구하는 상징주의자들의 시도
에 친근감을 느꼈으며, 옛날 화가들이 추구했던 실제 사물의 정확한 복사보다
는 화폭에 즉각적이고 주관적인 인상을 옮기려는 새로운 화가들의 욕구를 이
해했다.

1888년과 1889년 여름, 바이로이트를 여행한 드뷔시는 잠시동안 바그너의 음
악에 심취하지만-특히 '파르지팔'과 '트리스탄'의 매우 반음계적이면서 색채
가 화려한 음악으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바그너의 종합예술이 그
가 매료되었던 상징주의의 작품들과는 의도를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음악은 드뷔시의 작품 스타일 발전에 흔적을
남겼다.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자바의 가멜란 음악을 처음 듣고, 그
소리와 자유롭게 흐르는 듯한 음악형식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그는 서양 작곡
가로서는 처음으로 동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을 작곡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반에 드뷔시는 이미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작곡했고, 오페라 '펠
레아스와 멜리상드'가 완성되던 1902년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
가 되어 있었다.

드뷔스의 음악을 인상주의 음악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작풍을 인상파라는 개념
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전형적인 인상주의음악가가 드뷔시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음악사상 인상주의의 첫 장을 열었는가 하면 마
지막 장도 역시 그가 닫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룩한 인상주의는
너무도 완벽하기 때문에 후계자가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란 외부로부터 받은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 낸 예술이다. 그
것은 선이 명료하지 않고 불분명하지만, 유연하고 신비스런 기분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드뷔시가 활동하던 당시는 인상주의가 시대 사조였다. 그의 인상주
의 음악은 인상파 회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서 그는 인상주의 회화의 수법에 어울리는 음악의 표현을 창안했는데 그림에
서는 빛을 중요시했듯이 음악에서는 감각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새로운 감각
을 위해서는 새로운 음의 조성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성의 대담한 사
용이 필요하였다.

때때로 동양적 음계를 사용하나 그의 기본 예술은 프랑스 적이다. 사실 드뷔시
에게 자극을 준 직접적 원인은 음악적 영역 내에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독
창적 작곡가는 인상주의 회화와 상징주의 문학에서 영감을 찾아냈기 때문이
다. 화가들은 그에게 명암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 빛과 그림자의 대비, 인상
의 어슴프레한 표현, 색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었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아
마 보다 강력하게 - 단어, 프레이즈의 변화, 반음의 드라마, 소리를 위한 소리
의 아름다움을 통해 암시의 예술을 보여 주었다. 이 모든 것이 프랑스의 클로
드의 기질을 형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이 아이디어들을 개성있게 해석하여 표현했다. 즉 스타일은 드뷔시
개인에 의해 전개, 형성,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그 외의 악기는 다룰 줄 몰랐으며, 가
끔 지휘도 했으나 별로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단순
히 선율을 진술하기보다는 화성 및 음향을 혼합시키는 악기로서 자신의 독특
한 예술을 위한 자연스런 실험 매체가 되었다. 그는 평생동안 꾸준히 피아노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는 자기 음악에 세심한 연주 지시를 주었는데, 그의 음
악은 피아니스트가 임의로 해석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가 요구한 대
로 연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 스타일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를 깨닫고 자기 아이디어의 전달방법을 구사할 줄 알게 되자, 그는 전
적으로 '드뷔시 관용어(Debussy idiom)'로 작곡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보다 친밀한 표현 수단을 얻고자 애썼으나, 자신이 1900년까지 확립시켜
놓았던 근본 기법으로부터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걸작으로는 관현악곡 '바다'(1905)와 피아노 곡 '판화'(1903)', '영상' 제1
집과 2집(1908), '어린이 세계'(1908), 전주곡집 제1권(1910), 제2권(1913)등이
있으며 무대음악의 대작으로 신비극 '성세바스티안의 순교'(1911), 10년에 걸
쳐 완성한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등이 있다.

드뷔시는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이나 느낌, 또는 추억이나 기억들을 자연스럽
게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며, 천재적인 화성과 선율, 리
듬의 사용을 볼 수 있으며 우리에게 한편의 영화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아름
다움과 환상을 심어 주는 작곡가이다.

드뷔시는 피아노의 음색을 내는 데 있어서 해머가 갖고 있는 기능을 고려해 건
반을 손가락 끝으로 때려서 소리를 연구했다. 그는 20세기 작곡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준 동양의 비 전통적인 리듬의 다양성, 특유의 간결함에서 오는 특별
한 음악의 분위기와 시적인 감각들은 그의 음악에서만 찾을 수 있는 그만의 천
재적인 독특함이다. 그 외에도 드뷔시만이 사용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음악
에 이용한 것이나 그의 음악이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시, 춤, 조각, 건축, 그리
스 신화 등에서 영향을 받고 독특한 그만의 창조력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의 음악세계가 얼마나 광대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 유투브 감상 /
"Claire de lune" by Angela Hewitt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ip64cG7gK4

**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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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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