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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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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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근(Sang Kun, Lee, 작곡가, 1922-2000)



개나리가 피고 이어 진달래
이 강산은 가득히 꽃으로 뒤덮이고 있구나
우리 사랑의 기밀이 폭로되었나
마을마다 들판마다 높고 낮은 산마다
내밀한 속살 열어 젖히며 피어나는 꽃 꽃 꽃
이 강산 끝까지 퍼지는 사랑 이야기
틀림없다 틀림없다 우리 사랑의 기밀이
새어나버린 것이다

1992년 3월 28일 저녁 7시, KBS부산방송본부 텔레비전 제1 스튜디오에서는 부
산의 老작곡가 이상근(70세)의 신작 연가곡집 '아가(雅歌) Ⅱ'의 시연회(試演
會)가 열렸다. 고희를 넘긴, 그리고 두 번이나 되는 뇌졸증의 위협을 딛고 다
시 일어선 노작곡가의 시연회는 오히려 젊고 패기에 찬 활력을 객석에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 성장시대
이상근은 1922년 1월 10일, 문화와 교육과 민족정기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는
충절의 고장 진주에서 언론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친은 서울 유학의 학력을
가진 언론인으로서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앙일보 등 중앙일간지의 진주지국
을 경영하는 한편 기자로 활동했다. 음악을 무척 즐겨서 바이얼린과 오르간을
탓고, 축음기 음악감상도 일상적으로 곁에 하는 음악의 딜레탕트였다. SP 음
반을 통해서 어린 이상근은 일찍부터 통속 명곡과 당대 국창들의 소리를 익혔
고, 집 근처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가에도 제법 익숙해지는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당시의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 이러한 성장환경은 '음악적'임에 틀림없다. 본
인 스스로도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영향, 특히 음악을 즐기는 기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이상근은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그의 수업시대를 지낸다. 당시 경상남도
지방에서 한국인이 입학할 수 있는 공립학교는 진주와 동래에 한곳씩 두 학교
밖에 없었고, 여기에 많은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은 일제에 의한 징용이 극심하던 때여서 많은 청년들이 끌
려갔다. 징용만은 피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초등학교 교원을 자원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진주 제2 공립보통학교(현재의 봉래초등학교)였다. 교사로서의
이러한 출발은 후일 그의 생애를 가르치는 일로 일관하게 한다.

2년여를 근무하던 이상근은 보통학교의 교사로서 안주할 수 없다는 자각에 눈
뜨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은 전쟁에서의 패배가 거
의 확실하게 드러나는데서 오는 말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차분하게 학업에만 정진하기엔 모든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설상
가상으로 부친이 실직을 하게되어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책무가 더 시급한 일
로 그를 옭매었다. 그의 일본 유학은 1년으로 마감되고 말았다. 변변하게 공부
한 것이 별로 없었던 1년의 타향살이 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1 공립보통학교(현재의 중안초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해방이 되자 진주중학교의 음악교사로 자리를 옮겼는데 한동안
진주농고의 음악교사를 겸임했다. 음악교사의 절대수가 부족해서 였다. 그러
나 이상근은 다시 자신의 위상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진주에만 있어서는 발전이 없겠다는 불안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1946년 11월, 마산여고 음악교사로 자리를 옮긴다. 진주에 비해서 마산은 훨
씬 역동적이었고 갖가지 음악적 시도가 가능했다. 마산여고생들을 대상으로
합창도 다루어보고, 작곡에 대한 연구도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되었다. 이 무렵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여성 합창곡으로 만들어서 문교부가 공모한 중등음
악교재에 제출했는데 이 작품이 입상함으로서 이상근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지
게 된다. 이 합창곡은 후일 채동선씨에 의해서 채록된 同名의 민요와는 판이하
게 다른 채록과 편곡인데 한국적 정취가 훨씬 두드러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한편, 진주고보 재학 시에 쓴 가곡 <해곡>을 이듬해에 역시 문교부 공모에 응
모해서 이 역시 입상하고 그 악보가 문교부에 의해 출판된다. 해곡은 그의 최
초의 창작곡이라는 색다른 의미를 갖는 작품인데, 시는 양주동의 것이며 고보
4학년 때의 작품이다. 이 가곡은 그의 성악곡 중에서 가장 널리 불려지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작곡가로서의 이상근의 출발은 이렇게 가곡으로 장식되지만
1947년엔 최초의 기악곡으로서 <바이얼린 소나티네>를 역시 문교부 전국 콩
쿠르에 출품하여 입상함으로서 창작의 영역을 확대해 나아갔다. 특히 문교부
공모에 해마다 응모하고 그 작품들이 모두 입상함으로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도 다른 작곡가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독특한 것이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위상이 이처럼 큰 변화를 보이게되자 여러 학교들이 다투
어서 그를 초빙하러 나섰다. 경남여고와 진주사범이 특히 적극적이었다. 이상
근은 진주사범을 택한다. 1949년 3월의 일이었다. 진주사범엔 브라스 밴드를
만들 수 있는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고 그는 여기에 매력을 느껴 다시 고향에
돌아간 것이다. 부임하자마자 밴드를 재조직하고 여기에 매달렸다. 작곡, 편곡
을 수없이 했고 그만큼 열성을 갖고 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태도
는 딴판이었다. 의욕도 규율도 없었고, 어떤 때는 학교장이 둘이나 취임해서
희한한 짓거리들을 펼쳤다. 취임 1년여가 됐을 때 6 25가 발발하였다. 이상근
은 진주에서 떠나는 마지막 피난열차를 타고 마산으로 다시 간다. 그리고 마산
여고 교사로 복직한다.

진주사범 시대가 비록 1년이라는 짤막한 것이긴 하였으나 여기서도 그는 귀중
한 창작의 소산을 거둔다. 김춘수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 <가을 저녁의 시>
와 <현악 4중주곡 제1번>이 이 무렵의 성과였다. 그의 작품세계의 폭과 깊이
가 현저하게 확대되고 심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 마산시대
이러한 그의 발전은 전쟁의 와중인 1951년에 제1회 작곡 발표회를 갖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마산에서 열린 그의 첫 발표회의 연주곡목들은 다음과 같다.
피아노 전주곡
연가곡 '가을 저녁의 시'(김춘수 시)
바이얼린 소나티네
합창곡 '석류' (김세익 시)

이 발표회에서 연주를 맡은 김진문(바이얼린), 전경애(소프라노), 김대근(바리
톤), 제갈 삼(피아노) 등은 후일 이상근과 함께 부산 음악계의 포스트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무렵 마산 음악계에서는 '마산 3총사'로 불려지는 세 인물이 있
었는데 이상근, 제갈 삼, 최인찬을 이르는 별칭이었다. 그들의 위상이 어떠했
는가를 시사해주는 별호인 셈이다.

마산 발표회가 큰 관심을 모으고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게되자 용기를 얻어 부
산으로의 진출을 계획한다. 내친 걸음이었다. 1952년 12월, 당시로서는 한국
음악의 중앙이었던 부산에서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천막으로 지은 이화여대
강당에서 생애 두 번째 발표회를 가진 것이다. 당시의 연주자들은 명실공히 한
국악단을 대표하는 제1급의 인물들이었다. 연주곡목과 출연자들은 이러했다.

김춘수 가곡 '가을 저녁의 시'
바이얼린 소나티네(바이얼린 / 안용구)
현악 4중주 제1번(원경수, 김예환)
피아노 트리오 제1번(안용구, 전봉초, 신재덕)

이 발표회는 당시의 작곡가들을 크게 자극했는데 윤이상의 첫 피아노 트리오
도 그러한 산물의 하나였다. 윤이상은 이상근보다 5살 연상이긴 하였으나 두
사람은 음악적, 인간적으로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는 격의 없는 우정을 교환하
는 사이였다.

이상근의 마산시대는 두 조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교사와 작곡가로
서 비약적인 발전을 스스로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신선하고 새로
운 목소리로써 그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널리 알리는 성과를 거두었던 시대였
다. 그러나 본인은 이 시대 역시 <암중모색의 때>로 회고한다.

** 부산시대
1953년, 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윤이상이 부산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사
직하고 서울로 가게 된다. 부산을 떠나면서 윤이상은 자신의 후임자로 이상근
을 지목했다. 당시의 부산고교 교장 김하덕은 이 지명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이상근의 부산 삶이 시작된다. 부산에서 작곡 발표회를 가진지 1년만의 변화였
다.

수정동 비탈에 천막으로 옹기종기 교사를 지은 부산고교는 놀랍게도 음악교실
을 별도로 마련하고 있었고 게다가 수백 장의 음반들이 모아져 있었다. 예술교
육에 대한 혜안을 가진 교장 김하덕과 윤이상의 열성이 일구어 놓은 값진 결과
였다. 이상근에게는 마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수가 주어졌고 살림은 관사에
서 하는 등 여유가 주어졌다. 그가 착수한 첫 일은 부산 최초의 남성합창단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비록 모두가 가난했지만 합창에서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
다. 주로 방과 후 저녁에 모여서 연습했지만 모두가 열심이었고 이로써 부산
의 아름다운 합창음악의 전통이 계승될 수 있었다. 부산의 합창운동은 다른 지
역에 비해서 남다른데 가 있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당시 경남여중의 교사였던
금수현이 제일 먼저 펼쳤던 것이 학생들을 중심으로한 합창운동이었고 여기
에 이상근의 남성합창과 하규환의 합창운동 등이 뒤를 이음으로써 빛나는 부
산합창의 전통이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1955년, 교육법이 개정되어 2년제 중등교사 양성기관으로 전국 최초로 舊制 부
산사범대가 설립되고 여기에 음악과가 설치된다. 이상근은 또 한번의 자리바
꿈을 한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세계는 관현악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물론 교육
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는데 후일 부산대학교 음악과의 이언도 교수, 김
인일 교수, 강순희 교수 등이 이때의 제자들이다.

1956년, 서울 수복 기념 음악회에서 이상근의 최초 관현악곡인 <한국 선율에
의한 서완조(緖緩調, Andante)>가 서울시향에 의해 초연 된다. 당시, 한국 작
곡가들의 손에 의해 쓰여진 관현악곡들은 김성태의 '카프리치오(Capricio)'와
김동진의 '양산도' 등 몇 곡이 거의 전부였던 터여서 이상근의 교향곡 제1번의
제2악장에 해당되는 이 작품에 대한 음악계의 관심은 비상한 것이었다. 당시,
이상근은 서울시향의 지휘자였던 김생려에게 교향곡 제1번의 전악장(4악장)
악보를 보냈는데 제2악장만이 채택되어 초연이 됐고, 그후 악보는 본인의 손
에 돌아오지 않은 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때문에 지금도 그의 교향곡 제1
번은 제2악장만이 남겨져서 연주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지휘자 안셀
름이 슈베르트의 제8번 교향곡의 2개 악장(1, 2악장)을 받고나서 통 회답이 없
어 결국은 미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는 고사(故事)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관현악에 대한 그의 관심과 모색은 계속되었고 1957년에 <팀파니와 현을 위
한 대비(Contrast)>(작곡자 자신은 대비라는 표현보다 콘트라스트라는 표기
를 선호한다)를 서울시향이 초연했고, 1958년엔 한국 최초로 관현악곡만으로
짜여진 작곡 발표회를 갖는다. 그해 5월 12일, 서울시향(지휘 / 이상근)이 연주
한 곡목들은 다음과 같다.
교향곡 제2번(4악장 전곡)
피아노 협주곡 제1번(협연 / 이보영)
팀파니와 현을 위한 콘트라스트
현과 소프라노를 위한 세폭의 그림(안장현 詩, 소프라노 / 엄경원)

부산사대 교수로 부임한지 5년 뒤인 1959년 9월, 당시 문교부가 20명의 사범
대 교수 및 사범 교사를 선정해서 미국으로 파견하는 프로젝트에 선발되어 테
네시주 조지 피바디 사범대학에 파견된다. 부산 음악인으로서는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것이다. 미국에서 그는 새로운 음악 및 교육정보에 탐닉하는 한
편 탱글우드 페스티발에 참가하는 기간에 미국의 저명한 작곡가 아론 코플랜
드(Aaron Copland)를 만나 그로부터 많은 가르침과 영향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페스티발을 통해서 생애 가장 많고 다양한 음악과 만남으로써
이후 그의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여는 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특히, 당시의
가장 새로운 작곡기법인 <불확정성 기법>을 여기서 처음으로 알게 된다. 이상
근은 두고두고 탱글우드의 체험과 배움을 즐겁게 회상했다.

1962년, 舊制 사범대가 교육대학으로 바뀌게 된다. 학제는 쉬지 않고 바뀌는
데 음악대학은 여전히 소식이 없다. 늘 새로운 작업을 향해 활짝 열린 가슴을
지닌 이상근으로서는 교육대학에서의 자신의 역할(기껏 동요 반주법이나 가르
치는 일 따위)에 깊은 회의와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대구 효성여대
에서 출강 요청이 왔다.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후 11년간, 그는 효성여대
전임교수 몫 이상의 일을 했다.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성합창을 지도하
면서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의 '케롤의 제전' 같은 새로운 작품을 소
개하는 등 합창을 통한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쌓아갔다. 대구와의 교류 11년간
은 이상근에게 <영남 음악 파수꾼>이라는 칭호를 바치게 한다. 이 시절 그의
문하에서 우종억 교수, 임우상 교수, 박말순 교수, 김화자 교수 등이 배출된
다.

그는 저작에도 힘을 쏟았다. 1969년에 '중등음악', 1978년에 '고등음악'을 썼
다.

** 새로운 길의 모색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상근은 새 길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일련의 <조우
(Encounter)> 시리즈 였다. 이 시리즈를 통해서 국악기와 서양 연주체와의 만
남과 접목을 모색한다. 그러나 이 작업 과정에서 체질적, 구조적으로 이질적
요소가 강한 국악기와 서양악기의 조우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
고 시리즈를 중단한다. 조우 시리즈에는 홍연택과 국립교향악단이 적극 참여
함으로서 당시 한국 악단의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모색과 시도에서 그치게 된다.

우리는 이상근의 작품 활동에서 또 하나의 한국 최초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가
조우 시리즈를 발표하기 불과 몇 해전에 내놓은 교향곡 제3번이다. 이 작품은
쇤베르크에 의해서 창시된 12음기법에 의한 최초의 교향곡이었던 것이다. 이
하나의 경우에서도 그가 얼마나 쉬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연마하는 작곡가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새로운 길 찾기에서 거둔 또 하나의 값
진 수확은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는 연가곡집 <아가 Ⅰ>이다. 이전의
한국가곡의 태반이 멜로디 중심, 평이한 음형반주에 머물고 있는데 대한 반발
과 우리말이 과연 가곡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의 결과
를 이 연가곡에 응축 시켰던 것이다. 아가의 피아노 반주는 슈만이나 슈베르트
의 경우와 같은 曲想의 표현이 강렬하고, 멜로디에서도 개성적 인토네이션을
강조함으로써 시대를 앞선 가곡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74년, 국립 부산대학교에 음악교육과가 신설되고 이상근은 과장으로 자리
를 옮긴다. 동시에 그의 오랜 예술의 동료인 제갈 삼을 비롯하여 이보향, 나광
자 등을 초창기의 교수로 초빙하여 터를 닦았다. 창악회(創樂會)의 멤버로
서 '조우 시리즈'에 열중하던 무렵이었다.

1976년, 한국음악협회가 제정한 제2회 한국작곡상을 받은 이상근은 상금 전액
을 창악회에 희사한다. 새로운 음악의 길을 모색하는 이 그룹에 대한 그의 사
랑의 표시였다.

1982년, 부산대학교에 예술대학이 신설되고 음악학과가 설치되었다. 이상근
은 그의 오랜 숙원이었던 실내 합주단을 창설한다. 이름하여 <프로 무지카>.
단원은 교수와 학생이 섞였다. 그러나 창단 3년 후부터는 학생들만으로 구성
될 만큼 짜임새를 갖출 수 있었다. 실내합주단이 전무했던 부산에 이 분야의
음악을 뿌리 내린다는 각별한 열정으로 그는 지도하고 지휘한다. 자신에게 지
급되는 연구비 전액을 투자하고 후원자를 만드는 일에도 팔 걷고 나선다. 5년
간(그는 이 악단을 창설하고 5년 뒤에 정년을 맞는다)에 걸쳐 10회의 정기 연
주회를 가졌고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는 많은 연주곡목들을 소개했다.

1986년, 예술대학 학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11개월 뒤 정년을 맞았다. 정년 퇴
임식에서 부산대 최초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다. 그의 정년과 함께 프로 무
지카도 자연 소멸된다. 그는 늘 이 일을 참으로 안타까워한다.1988년, 지방의
음악인으로는 또 최초로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1989년 7월, 뇌졸증으로 넘어져 입원하고 3주 후 퇴원한다. 1990년 10월, 두 번
째의 뇌졸증 발작으로 또 쓰러져 입원한다. 두 번의 뇌졸증 발작과 오른쪽 눈
의 실명으로 이상근은 퍽 오랫동안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1992년 3월 28일,
그는 회심의 연가곡집 <아가 Ⅱ>를 시연회라는 색다른 이름의 연주형식을 빌
어서 발표한다. 이 자리엔 <아가Ⅱ>의 시인 신달자도 참석하여 인사하고 이상
근도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고 인사한다. 퍽 건강하게 보였다. 고
희를 넘겼고, 그래서 손주가 여섯이나 되는 노인인데, 그의 의욕과 희망과 설
계는 청년을 무색하게 했다.

임진란발발 400주년을 기념하는 부산시의 예술제에서 그의 시민 오페라 <부산
성 사람들>의 수정판이 공연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1990년대, 음악계에서 큰
붐을 형성하고 있는 두오 피아노(duo piano)를 위해서 이 부문의 작품을 구상
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적 소재를 사용한 교향곡 제6번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의 설계와 희망은 끝간데가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청년이었다.
그러나, 2000년 1월에 또 쓰러졌다. 그리고 오랜 투병이 시작되고 그해 11월,
그는 세상소풍을 끝냈다.

1945년 5월, 마산에서 이창순(李昌順)여사와 결혼했다. 결혼 후 첫 이사 가는
날 거리에서 일본 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 <輪座> 라는 수필 동인지에 실린
그의 글 <나의 인생, 나의 음악>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쓰고 있다.

"민심이 매우 불안한 와중에서도 종전이 가까워진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
고,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8월 15일 새
로 마련한 우리들의 신혼 살림집에 살림살이를 실어 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
다. 그날 바로 정오에 일황 육성의 항복방송이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역사적인
순간도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47년간을 함께 했다. 순우(洵雨), 진우(進
雨), 은애(恩愛). 세 자녀와 여섯 손자를 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뒤, 2006년 6월 21일, 악보가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칸타타 <보병과 더불어>가 54년 만에 초연됐다. 경남 진주시립합창단은 그
날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김해시립합창단과 부산대 효원심포니오케스트라
와 함께 고인의 칸타타 <보병과 더불어>를 초연했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때
청마 유치환 선생의 시 '보병과 더불어' 중 4편을 선택해 작곡한 칸타타로 부산
에 내려 온 해군정훈악대(서울시향 전신) 지휘자 고 김생려 선생이 연주를 위
해 악보를 가져간 뒤 사라졌었다. 진주시는 한 고문서 수집가가 악보를 보유하
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증을 요구으나 "기증은 어렵고 연주는 할 수 있게 복
사본을 주겠다"고 약속해 초연하게 됐다.

이 칸타타는 제1악장 <전진>, 제2악장 <전우에게>, 제3악장 <1950년도의 크
리스마스에 부치다>, 제4악장 <경의>로 구성된 관현악 반주가 붙은 혼성합창
곡으로 전쟁당시의 참혹함과 아픔을 잘 묘사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 작품 연보
1939년 해곡
1947년 바이얼린 소나티네
1949년 가을 저녁의 시(김춘수 시에 의한)
현악 4중주곡 제1번
1951년 피아노 전주곡
합창곡 '석류'(김세익 시)
1952년 피아노 트리오 제1번
1956년 교향곡 제 1번(제1,3,4 악장의 악보는 분실됨)
1957년 팀파니와 현을 위한 콘트라스트
1958년 교향곡 제2번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현과 소프라노를 위한 세폭의 그림(안장현 시)
1962년 목관과 현을 위한 희유곡(서울시향 초연)
1964년 교향곡 제3번(KBS 교향악단 초연)
1965년 금관과 현을 위한 희유곡(KBS초연)
1966년 피아노와 현을 위한 콘체르토 그로소(서울시향 초연)
1968년 '아가 1'
프로잭션 1(이성균 위촉)
환상 모음곡(정진우 위촉)
즉흥곡
합창곡 '4계절의 여심'(효성여대 초연)
1970년 현악 4중주곡 제2번(서울음악제 위촉)
1972년 교향곡 제4번(국립 교향악단 초연, 지휘 / 오펠라)
1969년 교향곡 제 5번(초연이 제 4번보다 늦어짐, 서울시향)
조우 시리즈 발표
1975년 청산별곡(고려가사, 서울음악제 위촉)
1976년 한국의 꽃(조순 시, 서울음악제 위촉)
축전 서곡(국립 교향악단 창단 20주년 기념 위촉작)
1979년 교성곡 '분노의 물결' (부산 개항 100주년 기념)
무악 '79(국립 교향악단 초연)
오보에와 피아노를 위한 44321(이한성 위촉)
1987년 파랑새 변주곡(피아노음악사 위촉)
1988년 목관 5중주를 위한 희유곡(서울음악제 위촉)
1991년 축전음악 '신정 - 희망'(문화방송 위촉, 서울시향 초연)
1992년 '아가 Ⅱ'
이밖에 부산시민의 노래, 경남도민의 노래, 부산문화방송 사가, 부산일보사
가, 교가 등 백수십곡의 실용음악을 위촉받아 작곡했다.

** 해외에서 연주된 작품들
1960년 미국 네쉬빌과 탱글우드에서 '한국 선율에 의한 서완조' 연주
1960년 미국, 네쉬빌 교향악단이 교향곡 제 2번(4악장) 연주
1972년 타이페이 시향이 교향곡 제 2번 전곡 연주(등창국 지휘)
1974년 연세 콘서트 콰이어 일본 연주에서 혼성 합창곡 '산, 임, 나그네 연주
프랑스, 미국, 홍콩, 뉴질랜드 등지에서 '환상조곡'이 수차 연주됨.

** 주요 사회활동 및 수상
부산시 문화위원, 부산시향 운영위원장, 부산음악콩쿠르 운영위원장
창악회 및 아시아 작곡가 연맹 회원, 향신회 및 신악회 고문,
영남 작곡가회 고문, 부산 음협 고문, 부산일보 현대음악제 고문
민족음악연구소 고문, 부산시 문화상, 눌원 문화상, 한국 작곡상,
한국 예술원상, 국민훈장모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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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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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멕코멕((John McCormack, 1884∼1945, 테너)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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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톡(Béla Bartók, 피아니스트, 작곡가, 1881-1945)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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