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0
 1868   94   1
  View Articles

Name  
   곽근수 
File #1  
   300px_Haendel[1].jpg (15.3 KB)   Download : 49
Subject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


◈ 유투브 감상-
메시아 전곡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4uJWDUdhCzc

** 1733년의 헨델

역사는 때때로 엄청난 우연을 연출하곤 한다. 바흐와 헨델의 경우가 그러하
다. 둘은 같은 독일에서 단지 고향만 다를 뿐 1685년 같은 해에 불과 한 달 간
격으로 태어났으며, 후일 서양 음악사의 거대한 두 기둥이 되었으며 바흐는 평
생을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한 번도 독일이외의 지역을 여행한 일이 없이 직장
이 있는 고장을 지켰는가하면 헨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이탈리아, 영국
등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하면서 때로는 남의 작품을 슬쩍 표절도 하고 도
박도 즐겼으며 흥행에도 손을 대어 일약 거부가 되는가 하면 곧바로 파산지경
에 빠지는 등 생활의 기복이 심한 일생을 보낸 점도 바흐와 대조적이다. 두 사
람은 서로 만나고 싶다는 뜻은 밝힌바 있으나 실제로 대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작센선제후의 시의(侍醫)이자 외과의사인 아버지, 그보다 30세 연하이며 늘
상냥하고 명랑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프리드리히 게오르그 헨델(Friedrich
Georg Händel)은 1685년 2월 23일, 바흐보다 약 1개월 먼저 태어났다. 고향은
동부 독일 할레(Halle)였으며 그는 둘째 아들이었다. 바흐가 전통적인 음악의
명문 출신인데 비해 헨델은 음악과는 거리가 먼 가문에서 태어났고, 다만 어렸
을 때 음악듣기를 좋아해서 늘 교회나 대저택의 문밖에서 안으로부터 들려오
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정도일 뿐 그가 기가 막힌 음악의 신동이라는 기록
은 아무 데도 없다. 대신, 그는 아버지로부터 단단한 신체와 강한 의지, 어머니
로부터는 명랑한 기질과 경건한 신앙심을 물려받아 후일 그가 말할 수 없는 곤
궁에 빠졌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재기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늘 궁중에
출입하던 그로서는 궁중음악가의 신분이 한낱 하인 정도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6
~7세 때부터 서서히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한 헨델은 궁정 음악가인 클
리거에게 오르간을 배웠고 그 능력이 영주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르러
당시의 최고 음악교사였던 빌헤름 짜하우의 가르침을 받게 되어 아버지가 별
세한 1697년 무렵엔 이미 뛰어난 오르간 연주 능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반드시 법률학교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할레대학의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한 달 뒤엔 할레의 聖십자교회의 오르가니
스트가 되어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년 뒤 아버지의 유언을 더 이
상 따를 수 없다고 결심하고 함부르크로 가서 겐제마르크트 극장의 바이올리
니스트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알미라’등 오페라를 잇달아 발표하여 오페라 작
곡가로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편 마테존(1681-1764)과 두터운 우정을 나누게
된다.

헨델이 19세 때 뤼베크시 교회에 오르가니스트 자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곧 그 곳을 찾아갔으나 전임자인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해야만 한다는 조건
을 내 거는 통에 그대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만일 북스테후데의 딸이 굉장
한 미인이었다면, 또는 형편이 극도로 궁핍해서 취직을 꼭 해야만 했다면 그
자리를 승락했을텐데 만일 그렇게 됐다면 그의 음악적 인생은 전혀 양상을 달
리했을 것이다.

1706년, 헨델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서 코렐리, 알렉산드로 스
카를랏티, 파스퀴니 등 이탈리아 최고의 작곡가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많은 영
향을 받았다. 이 기간 중에 ‘시간의 승리’ ‘부활’이라는 2곡의 오라토리오를 썼
다. 특히 스카를랏티와 더불어 쳄발로와 오르간연주 시합을 벌여 승리를 차지
한 것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이탈리아 체재(滯在)중 일화의 하나이다. 베네치
아, 피렌체, 로마에서 눈부신 음악수학을 거둔 헨델은 독일 하노버 선제후 궁
정악장으로 초빙됐다. 그러던중 1710년 6월에 휴가를 얻어 영국의 런던으로 향
했다. 이 무렵의 런던은 헨리 퍼셀(Henry Purcell)이 죽고 난 뒤였으며 이탈리
아 작곡가들이 활개를 치는 형편이었다.

런던에 간 헨델은 그의 뛰어난 쳄발로 연주 솜씨로 앤여왕을 감동시켜 왕실작
곡관 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714년에 앤 여왕
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다름 아닌 하노
버의 선제후 루드비히 공이었다. 헨델이 공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노버로 귀
임 하지 않고 런던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크게 노여움을 샀던 바로 그 장본
인이 새로운 영국 국왕 조지1세였던 것이다. 입장이 매우 난처해진 헨델은 궁
정의 시종장 킬만젝 남작의 도움으로 「물의 음악」을 작곡. 발표하여 극적으로
왕의 노여움을 풀고 다시 왕궁 출입을 할 수 있었다.

1719년, 헨델은 극장 지배인 하이덱거와 함께 왕림음악원을 설립하고 우수한
가수들을 발굴하는 한편 오페라 작곡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당시의 형편
으로는 자유로운 신분의 음악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런던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도
그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헨델이 혼자서만 음악의 영광을 독차지하는 것
에 시샘을 한 귀족과 부호들 중 보논치니라는 이탈리아 작곡가가 있었다. 그러
나 결국 그도 헨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듯 런던을 빠져나와 이
탈리아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와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헨델이 파산의 불
행을 당했고 보논치니를 후원했던 많은 귀족과 부호들도 심각한 경제적 타격
을 받았다. 게다가 가수들까지도 빈정대거나 태업을 하거나 노래 부르길 거절
하는 등 헨델의 골치를 썩혀 이래저래 헨델은 지칠 수밖에 없었고 나이는 자꾸
만 쌓여졌다. 그는 두 번이나 파산했고, 세 번이나 죽음을 당할 뻔 했으며, 두
번이나 병으로 쓰러졌고, 귀부인, 부호, 비평가, 신문기자들과 늘 싸우지 않으
면 안됐다. 1726년, 영국으로 귀화했다.

그가 오라토리오라는 새로운 구세주를 만나기까지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
렇게 피투성이의 싸움으로 살아왔으며, 1733년 4월 봄, 어느새 52살이나 된 헨
델은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몸이 되고 만다. 오페라 창작에 대한 열정
과 왕실의 후원을 입기 위한 끊임없는 로비활동, 잇달아서 나타나는 적들과의
싸움에 매달리느라고 그는 참다운 연애조차 해볼 수 없었으며 당연히 늘 독신
이었다.

중풍으로 쓰러진 그는 아헨 온천장에서 정양생활에 들어갔으며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헨델은 곧 새로운 작품에 착수했는데
이번엔 오페라가 아니고 구약성서에서 소재를 가져온 ‘사울’이라는 오라토리오
였다. 그의 음악은 이제 오페라와 결별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음악의 영역으로
오라토리오를 택한 것이다. 사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메시
아’ 가 창작된다. 아울러, 지금까지는 힘 있는 귀족이나 돈 많은 부호 속에서
후원자를 찾아 왔었으나 오라토리오에 매진하고부터는 평범한 중산계급 속에
서 자기의 지지자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런던의 중산층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
어 가는 건강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로 새
로운 길을 발견한 기쁨을 누리면서 오라토리오를 잇달아 썼으며 그것들은 그
에게 커다란 명성과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1741년 8월, 56세의 헨델은 메시아 작곡에 착수했다. 구약과 신약을 기초로 하
여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과 성취」 「수난과 부활에 대한 복음의 승리」
「신자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라고 테마를 설정하여 삼부작(三部作)으
로 만들어진 이 방대한 작품을 헨델은 불과 3주 동안에 완성했다. 작곡기간동
안 헨델은 거의 침식을 끊고 스스로 감동에 겨워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곡
을 썼다. 이 곡의 초연은 1742년 4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행해 졌는데 그때
의 모습을 「더블린 저널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건의 감동에 북받친
청중에게 이 작품이 준 절묘한 기쁨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숭고
하고 위엄에 넘치며 감동 깊은 말에 붙여진 음악의 존엄함과 기쁨, 상냥함, 그
것은 서로 손을 잡고 황홀한 마음과 귀를   매혹시켰다. 세상은 헨델씨가 이 대
연주회에서 올린 수익을 죄수와 자선병원, 성모병원, 구원협회 등에 골고루 나
누어주도록 희사한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됐다.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언제까지나 기억 하리라”.

메시아는 1742년에 런던 초연을 가졌는데 조지2세 국왕도 친히 임석하여 감상
하던 중 제2부의 마지막 합창곡인 󰡔할렐루야󰡕가 연주되자 의자에서 일어서
서 경건히 옷깃을 여미고 듣게 됐으며 이때부터 할렐루야에서 청중들이 기립
하여 감상하는 관습이 만들어 졌다.

거인 헨델에게 최후의 날이 왔다. 1759년 4월 6일 코번트 가든에서 메시아의
연주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온 직후 자리에 누워 ‘가난한 음악가의 구제를 위하
여 1천 파운드’라고 유언을 쓴 뒤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던 중 8일 후에 눈을 감
았다. 부활제 바로 전날의 아침이었다. 그의 유해는 평소의 소망대로 웨스트민
스터 성당에 안장됐다.

우리는 헨델의 생애에서 어머니를 제외한 어떤 여성의 이야기도 찾을 수 없
다. 어떤 조건으로나 여성의 시선을 모으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에게서 이러
한 사실은 매우 기이한 느낌을 준다.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성질이 매우 급했
고, 런던 제1의 대식가였고 런던에서 제일 바빴던 사람이었고, 작품목록이 수
십 페이지에 달할 만큼 多作家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의 독신이 설명되지 않
는다. 그래서 헨델은 바흐와 대조가 된다.

** 작품
1. 오라토리오 : 메시아, 삼손 사울, 쥬다스 마카베오스, 등 21곡
2. 관현악곡 :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합주협주곡 C장조 등 22곡
3. 오페라 : 일미라 등 39곡.
4. 그 밖에 성악곡, 오르간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 독주곡 등.

** 작품목록과 초연일시 및 장소 /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compositions_by_George_Frideric_Ha
ndel
** 이 글을 퍼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Name
Memo
Password
 
     
Prev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 [1]

곽근수
Next
   리스트(Franz Liszt, 1811.10.22~1886.7.31)

곽근수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ty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