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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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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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


** 유투브 감상-교향곡 제104번 전곡
http://www.youtube.com/watch?v=ffBK-EYjs90&feature=player_detailpage

위대한 음악가들 중에서도 자기관리는 물론 음악의 창조와 관리에서도 뛰어나
고 치밀했으면서도 그러나 단 한번 배우자 선택의 실수로 평생을 불우한 가정
생활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있다. 그가 하이든이다. 목수이자 열렬
한 음악 애호가인 마티아스 하이든과 궁정의 요리사인 안나 마리아 콜러 사이
에서 1732년 3월 31일 독일 로라우의 오두막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에
겐 많은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중 여섯째 요한 미하엘은 작곡가로서, 열한 번
째 요반 에반겔리스트는 가수로서 성공하여 음악 가족을 이룩했다.

워낙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하이든은 아
버지의 고모부이자 음악가인 마티아스 프랑크로부터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아
6세 때 부모 슬하를 떠나 프랑크의 집에 기숙하면서 일반 교과와 음악 전반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8세 때 시험에 합격하여 빈(Wien)의 성(聖)스테판 대성
당 성가대원이 되어 연봉 700플로린을 받았으나 왕성한 식욕의 소유자였던 하
이든은 늘 허기진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조차도 13세
때 변성기가 찾아옴으로써 단절될 위기에 놓이게 됐으며 결국 17세가 된 1749
년 11월 어느 날, 수중에 한 푼도 없는 상태로 겨울의 차가운 거리로 쫒겨 나
는 신세가 됐다. 이토록 하이든의 소년 시절은 따뜻한 가정의 정을 느껴보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으나, 그래도 그의 마음속엔 장차 뛰어난 음악가가 되겠다
는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스테판 성당에서 쫒겨난 하이든은 당장 추운 겨울을 지낼 곳이 없어 하릴없이
빈(Wien) 거리를 방황하던 중 전부터 다소 알고 지내왔던 테너 가수 요한 스펭
글러에게 부탁하여 그의 좁은 다락방 한 구석을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우선 잠
잘 곳이 해결된 하이든은 세레나데를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가자」팀의 일원이
되어 당장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이 일을 통해서 빈 대중들의 음악적 취
향을 파악하는 성과도 거두게 된다. 그런 가운데 스펭글러에게 둘째 아기가 태
어나자 더 이상 그가 머물 방이 없게 되어 또다시 거리로 나오게 됐는데 운좋
게도 안톤 부홀트라는 상인으로부터 조건 없이 150플로린을 빌려 생전 처음으
로 형편없는 다락방이긴 했지만 자기 집을 빌릴 수가 있었다. 비가 새고 바람
이 드는 낡은 방이긴 해도 그는 행복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곡 공부에 들
어가는 한편,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마르티네스의 큰딸 마리안느의 음악교사
로 일했다.

마리안느는 때마침 니콜로 포르포라라는 이탈리아 음악가에게 성악 레슨을
받고 있었는데 하이든은 피아노 반주자의 자격으로 그의 집에 출입하던 중 아
무래도 그로부터 작곡수업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각종 심부름을 하는 등
포르포라의 몸종과 같은 일을 하면서 레슨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경제
적인 형편은 말이 아니어서 「가자」팀의 일원으로 일을 계속하는 한편, <토운>
백작의 음악교사, <퓌른베르크>남작의 바이얼리니스트, 레오폴시타트시 교회
의 수석 바이얼리니스트로 일하는 등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나 닥치는대로 해
냈다. 그러던 중 1759년(27세), 모르찐 백작가의 악단 장 겸 작곡가로 임명되
어 처음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하이든이 모르찐가(家)에 있는 동안 크
게 세 가지 사건을 일으켰는데, 어느 날 백작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변을 당해 이후 다시는 말을 타려고 하지 않았던 사건. 어느날, 노래
를 좋아하는 백작 부인의 반주를 하기위해 챔발로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부인
이 하이든의 상체에 몸을 기대고 악보를 보고 있던 중 어깨에 걸쳤던 숄이 바
닥에 떨어졌다. 이런 일을 처음 겪은 하이든은 너무도 당황해서 반주하던 손가
락이 금방 굳어져 버렸고 그래서 반주가 중단되자 백작 부인 역시 하이든의 당
황하는 모습에 놀라 어쩔줄을 몰랐던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보다 더 큰 사건은 그의 결혼사건이다. 상대는 마리아 안
나 알로이지아 아폴로니아 켈러였다. 하이든의 제자들 중에 가발공으로 일하
는 켈러의 두 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동생인 테레지아에게 깊은 연정을 품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그런 눈치도 모르고 테레지아는 어느 날 불쑥 수도원으
로 들어가 버렸고 하이든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낌새를 알아차
린 켈러는 자기의 큰딸 마리아 안나를 어떻게 해서든 하이든에게 시집보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웬일인지 하이든도 이 제의를 승락한다.

안나 마리아는 당시 31살의 노처녀로 하이든보다 세살이나 연상이었고 예쁘지
도, 쾌활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음악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던 여성
이었다. 둘은 1760년 11월 26일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 날이야 말로 하이든
의 결혼생활을 파멸의 길로 몰고 간 첫날이 되는 셈이다. 매사를 신중하고 용
의주도하게 처리했던 하이든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했던 것이다. 어리
석게도 그는 이 결혼에 대단한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그에게 이 결혼이 많은
축복과 영광과 아름다운 아기들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마리아 안나는 축복과 영광을 남편에게 주기는커녕 아기
조차도 낳아주지 못한 아내가 되고 말았으며, 늘 싸움을 즐겼고, 질투가 심했
고, 낭비가 극에 달했으며, 소갈머리가 좁은 악처 중의 악처였다. 하이든은 만
년에 그리징거에게 “내 아내는 어린애를 낳지 못했다. 내가 다른 여성의 매력
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다. 아내는 내가 음악가이
든 신기료장수이든 상관 않을 여자였다”고 술회했으니 그의 마음고생을 알 듯
하다. 그녀는 남편의 악단에 예쁜 여가수가 있다는 사실을 못 견뎌 했고, 한때
남편이 예쁘장한 자기 동생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평생 분하게 생각하여 늘
남편을 볶아대곤 했다. 그 결과 하이든은 아예 가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
반동으로 음악에만 집착하게 됐고 그것이 오히려 그를 위대한 음악가로 만들
었으니 대단히 아이러니칼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1761년 5월 1일, 유명한 예술애호 귀족인 에스테르하지 후작가 악단의 부악장
으로 취임했다. 하이든은 이후 30년간 이 악단의 악장으로 일하면서 음악사상
불후의 공적인 교향곡의 완성, 소나타 형식의 확립, 현악4중주의 완비 등 수많
은 음악적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가와 체결한 계약서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그의 계약상의 신분은 ‘하인’으로 명시되어 있어 그
무렵 음악가의 사회적 신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임
무를 충실하게 수행했고 단원들에겐 지극한 인애로 대해 ‘파파 하이든’이란 애
칭을 얻기도 했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참담할만큼 무미건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겐 참으
로 놀랍고 신선한 기쁨을 주는 여성이 등장했다. 그 여성의 이름은 루이지아
풀첼리(1760-1842)였다. 1779년, 바이얼리니스트 풀첼리와 메조 소프라노 루
이지아가 에스테르하지가에서 일하게 됐다. 루이지아는 하이든보다 28세나 연
하였지만 시원스런 검은 눈동자, 갸름한 얼굴, 올리브 색 살결, 우아하고 아름
다운 모습을 지닌 미녀였으며, 그녀의 남편은 나이가 많은데다 폐병까지 앓고
있어 하이든의 보호본능이 작용하게 됐고 그것은 사랑으로 진전되었다. 둘의
관계는 12년간이나 계속됐고 루이지아가 둘째 아들을 낳자 그 아기가 하이든
의 아기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성안에 떠돌았다. 하이든은 새삼 삶의 보람을 갖
고 창작의욕도 더욱 불타올라 작품의 내용이 더욱 성숙되기에 이르렀고 마리
아 안나의 존재쯤은 얼마든지 잊을 수도 있었다. 1800년 5월 23일에 작성된 하
이든의 유언장엔 “만일 재혼을 할 경우엔 시뇨라 풀첼리 이외의 여성과는 결혼
하지 않겠으며 만일 여의치 못하다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단호한 결
심을 적어놓을 만큼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하이든이 마리아 안나
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슬로바키아에서 82세로 사망했다.

1790년 9월 28일,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별세하자 악단이 해산되
고 하이든도 비로소 악장 자리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잘
로몬의 초청으로 두 번이나(1791년, 1794년)영국에 건너가 명성과 부를 듬뿍
받았고, 1800년 3월 20일엔 아내 마리아 안나가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1797년
부터 별거 중이었는데 그녀가 죽음으로써 마침내 아내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
다. 1801년 9월에 「천지창조」가 초연됐고 1802년엔 지휘자로서는 최후의 연주
회가 된 「하르모니 미사」를 지휘했다. 1803년에 그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4중주
곡이 2악장까지만 완성됐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한 은퇴 생활로 들어갔다.

1809년 5월 12일, 나폴레옹이 뷘(Wien)을 점령했고, 같은 달 31일 새벽1시 하
이든은 77세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해는 훈트시 토우르마 묘지에 안장됐
고, 1820년 그의 유해를 카이젠시타트로 이장하려고 했을 때 그의 머리가 도난
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전에 에스테르하지가의 서기로 있던 카를 로젠바움과
형무소장 요한 피터가 “적의 모독에서 지키겠다”는 구실로 훔쳐간 것이었다.
이들이 죽은 뒤 1895년 그의 두개골은 빈 악우협회(樂友協會)박물관에 보관되
었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하이든은 고전주의 시대의 최초의 완성자였으
며, 인간적으로는 잘못 선택한 아내로 인해 생애의 태반을 숱한 외로움 속에
서 살았던 고뇌의 운용자였다.

** 하이든의 작품번호는 opus와 Hoboken이 있다. 호보켄 번호는 네델란드 태
생의 음악학자 호보켄(Anthony van Hoboken, 1887–1983)에 의해서 분류된
하이든의 작품번호를 이른다. 호보켄은 1957년에 하이든의 작품을 분류한 저
서를 발표했고, 오늘날 그의 분류번호를 가장 정확한 것으로 평가해서 이를 널
리 사용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작품번호를 분류한 케헬은 작곡년대를 분류의
재료로 삼은데 비해서 호보켄은 작품의 형식을 자료로 삼은 것이 다르다.

** 호보켄 번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자료는 http://www.sound.or.kr 사이트의 <장르, 음악용어>를 참고하십시요.

** 이 글을 퍼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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