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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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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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 사진 / 중년의 바그너

** 유투브 감상
Tristan und Isolde prelude to act 3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list=PL87C9F9F4B55A15C3&v=Zq9U8oL7D04

                                            
“바그너씨! 저 한테 공연한 욕심 품지 마세요!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당신같이
미래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제 인생을 걸 수는 없죠!” 민나 플라너는  바그너
의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마치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꺽이지 않았다. 그러
면 그럴수록 바그너의 애는 몹시 달았지만 민나의 기세는 대단했다. 민나는 연
극배우로서의 풍족한 생활 설계를 갖고 있었고, 최소한 중류 이상의 풍요한 삶
을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온천도시 라우프시테트 극장의 지휘자가
마음에 찰 리 없었다. 게다가 그녀에겐 수많은 구혼자들이 있었기에 선택의 여
유도 넉넉했다. 바그너는   무리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그너의
구애는 저돌적이었다. 민나의 반응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밀어
부쳤다. 마침내 민나가 굴복하고 바그너에게 사랑의 불변을 서약했다. 1834
년, 바그너의 나이 20세 때였고 민나는 그보다 3년 6개월 연상이었다. 둘은 곧
동거에 들어갔다. 둘의 만남은 이토록 열정적인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 만남
이 그토록 고통에 찬 세월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독일 남부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났다. 경
찰청 서기로 일하던 아버지는 바그너가 태어난지 다섯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 요한나는 아홉 명이나 되는 자녀를 데리고 남편의 절친한 친구
이자 배우인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했다. 재혼 직후 가이어가 드레스덴 궁정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바그너의 소년시절은 극장에서 보내게 된다. 그
러나 가이어 마저 바그너가 7살 때 세상을 떠나 가족들은 가난 속에 내버려진
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엔 억척이어서 가난한 생활 중에서도 학교 교육은
철저하게 시켜 나갔다. 바그너는 문학에 재능을 보여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꾸
었다. 특히 그리스 문학에 대한 그의 경도는 어머니를 불안하게 만들 정도였
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베버(Weber)의 <자유의 사수> 서곡을 듣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음악가가 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일단 생각을
바꾸게 되자 학교를 빠지면서까지 음악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화성학과 대위
법을 익히게 되자 곧 작곡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베토벤의 작품에 매혹된
다. 특히 <피델리오(Fidelio)>를 관람하고 큰 감명을 받고 이 오페라에 출연했
던 프리마 돈나 빌헬미네 시뢰더 데브린트에 매혹되어 그녀에게 편지를 띄우
게 되는데 의외로 음악을 지망하는 바그너를 따뜻하게 격려하는 회답을 받게
된다. 이때의 일을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실로 뜻 깊은 회답이었다. 더욱이 그녀가 예술계에서 내 이름을 들어본      
일도 없었을 텐데..., 그리하여 내가 거기에 내 운명을 걸고 미래의 길을 맹세
할수 있도록.” 빌헬미네의 격려 한 마디로 위대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다부진
결의를 다지게 된 것이다. 라이프찌히 대학 음악과에 입학했으나 첫 등록금을
노름으로 날려버릴 만큼 대학생활은 엉망이었다. 화성학과 대위법을 가르치
던 테오도르 바인리히 교수는 낙제시킬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자 비로소 정신
이 번쩍 든 바그너는 앞으로 8주간 안에 푸가(Fugue)와 대위법 기법을 마스
터 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실행한다. 그러자 제자의 재능에 놀란 교수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대학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1
년 만에 자퇴 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형의 천거로(형 알베르트는 뷔르츠부
르크 극장의 무대감독이었다) 뷔르츠부르크 극장 합창단 지휘자라는 첫 직업
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직책은 곧 접었고, 이번엔 누나 로잘리의 알선으로
마그데브르크의 작은 온천 도시 라우프시테트 극장의 지휘자로 갔으며, 그곳
에서 운명의 민나를 만났던 것이다.

민나와 동거에 들어간 바그너는 자신이 가난뱅이인 것도 망각한 채 빚을 내어
집안을 치장하는 등 그녀를 기쁘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즈음 그는 <연애
금제(戀愛禁制)>라는 오페라를 상연했는데 처참한 실패로 끝나는 어려움을 겪
게 된다. 하지만 민나의 쾌활하고 상냥한 성격에서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이
런 상태는 얼마 가지 않아서 깨어지고 만다. 바그너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그녀의 경박한 태도는 여전했고 나는 사사건건 그녀의 외고집에 방해를 받았
다. 나는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그때 벌써 불행의 검은 손길이 다가오고 있다
는 것을 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1836년 11월 24일 민나와 결
혼식을 올렸다. 23살 때였다. 그러나 결혼식 바로 다음 날 빚쟁이들의 고발을
받아 소환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듬해 6월 어느 날 가난을 견디지 못한
민나는 디트리히라는 장사꾼과 눈이 맞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비탄과 자학
으로 가슴을 치던 바그너는 드레스덴으로 달려가 수소문 끝에 아내를 찾아 곧
얻게 될 안정된 지휘자 자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녀
는 다시 돌아왔고 둘은 드레스덴 근교에서 조용히 몇 주간을 살았다. 그러나
민나는 다시 도망쳐 나갔다. 바그너는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다행
히 누나와 매부의 위로를 받아 새로 계획한 오페라 <리엔찌>의 작곡에만 전념
하게 된다. 그것만이 민나의 배신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서 수주 후에 민나는 참회하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헌신적으
로 아무 불평 없이 남편을 받들었다. 그녀의 성품으로는 최대의 인내를 발휘하
는 듯 보였다. 그런데 1839년 봄에 바그너는 갑자기 실직하고 말았다. 극장 지
배인이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 쫓아냈던 것이다. 가난은 극에 달했고 이제 독일
이라면 신물이 날 만큼 정나미가 떨어졌다. 바그너는 그해 6월에 파리로 떠나
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마저 한 채권자가 바그너의 도주를 막기 위해 고발
을 했기 때문에 여권이 회수된 상태여서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하는 수 없
이 러시아 국경을 넘어 그곳에서 배를 타고 파리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국경 수비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밤을 이용했다. 만일 들키는 날이면
만사는 끝나버리고 말게 된다. 민나, 바그너, 그들의 애견은 산등성이 국경선
을 쏜살같이 달리고 도랑을 기어서 수비대의 사격권을 벗어날 때까지 마구 뛰
었다.

“나는 내 가련하고 지친 아내를 부축하는 데에만 온 신경과 힘을 쏟았다. 나는
세상만사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몰랐다”고 이때의 일을 바그너는 회고했
다. 고생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데티스號라는 배를 탔는데
일단 런던으로 갔다가 프랑스로 가는 배편이었다. 3주간 반이나 계속된 항해에
서 폭풍, 좌초, 태풍 등의 재난을 잇달아 만나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목적지에
닿을 수가 있었다. 이때의 죽을 뻔한 항해 체험이 후일 <방황하는 화란인>에
반영되기도 했다.

바그너 내외의 파리 생활은 더욱 참담했다. 파리 사람들의 오페라 취미는 바그
너의 오페라를 수용하기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마이어베어가 백방으
로 그를 도왔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파리의 관습을 잘 몰라서 방세를
하루 늦게 냈다가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바그너의 수입
은 신문에 잡문을 써서 받는 원고료가 전부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방황하는
화란인>이 완성됐고 베를린에서 이 작품이 상연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부부
는 1842년 4월 7일, 드디어 한 많은 파리를 떠났다. 드레스덴에서 <리엔찌>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로써 바그너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가
되었다. 급기야 <방황하는 화란인>의 초연도 드레스덴이 되어야 한다는 결정
이 내려졌다. 이 일로 그에겐 수많은 명예와 돈이 주어졌다. 드레스덴의 작센
궁정극장 지휘자 자리가 제공됐고 연봉 4천5백 마르크의 엄청난 부가 주어진
것이다. 불과 몇 달 전 파리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었던 상황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극적인 변화였다. 그는 호화로운 가구들과 값비싼 책을 사들이는 등
호사스런 생활을 즐길 수 있었고 민나 역시 만족해했다. 그의 창작력도 왕성해
져서 <로엔그린>과 <탄호이저>가 잇달아 작곡 되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사
치를 좋아했던 탓에 늘 지출이 수입을 초과해 살림 형편은 궁색했고 나중엔 빚
이 쌓여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쫓겨났다. 혁명의 기세는 독일
에도 파급되어 일단의 혁명조직이 탄생되기에 이르는데 바그너도 이에 가담하
게 된다. <조국연맹>에 들어간 바그너는 낡은 제도와 부패한 관리를 성토하
는 선동적인 연설을 하게 된다. 왕의 녹을 먹는 왕실 지휘자로서는 놀라운 연
설이었고 곧 그 반응은 나타났다. 이 무렵 리스트에게서 편지가 왔다. 바이마
르에서 탄호이저가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상연됐는데 세 번째는 작곡자가 꼭
왔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바그너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바이마르
에 도착하자 나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체포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1849년 5월이었고, 그 달에 드레스덴에선 폭동이 일어났다. 리스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국외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드레스덴에서 뒤따라 온 민나는
남편에게 이별을 통고했다. 그녀의 사회적 욕망이 황실 지휘자라는 남편의 명
예로 채워졌는데 그 직책을 스스로 팽개친 남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
이다. 도리 없이 바그너는 혼자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8일, 그는 스위
스에 도착했다.

스위스 취리히에 일단 여장을 푼 바그너는 비록 망명객의 고달픈 신세이긴 해
도 뭔가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곧 파리로 향했다. 그러나 역시 파리는
그에겐 맞지 않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9년 전 파리에서 겪었던 참혹한 기억들
이 되살아나 다시 취리히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4년간 그는 일체의 작곡활
동에서 떠나 평소 생각하고 있었던 음악이론을 발표하는 집필의 세월을 살게
된다. 그의 최초의 저작은 <예술과 혁명>이라는 조그마한 책자였다. 이 저술
을 통해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독일 예술의 현황과 찬란했던 고대 희랍예술
을 비교하면서 종합예술의 부활을 역설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곧 재판을 찍
어야 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책 자체에 대한 인기보다도 체포령과
현상금이 걸려있는 바그너에 대한 관심의 결과였던 것 같다.

그 해 가을, 민나가 스위스로 찾아와 부부는 다시 합류했다. 말이 합류지 민나
의 바가지는 여전해서 차라리 별거하느니보다 못했다. 이무렵 바그너에겐 일
종의 해프닝 같은 연애사건이 벌어졌다. 상대는 부유한 포도주 상인인 로소의
아내 제시라는 여인이었다. 제시는 음악적인 교양이 높았고 총명한 여성이었
다. 몇 해 전, 드레스덴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었던 사이였지만 이국 땅에서 다
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엔 어느새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급기야 제시에게 흠
뻑 빠진 바그너는 둘이 함께 그리스나 소아시아 쪽으로 도망가서 살기로 결심
하기에 이른다. 1850년 4월 17일, 바그너는 민나에게 작별을 알리는 편지를 썼
다. 민나는 너무도 놀라서 이리저리 남편을 찾아 나섰다. 제시는 민나의 이런
반응에 놀라 어머니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다. 어머니는 이를 제시의 남편에게
알리게 되고 화가 치민 로소는 바그너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펄펄 뛰었다. 제시
는 결국 가정을 택하기로 마음을 바꾸었고, 바그너가 그녀를 데리러 도착했을
때 그녀의 저택 주변에 경찰이 쫙 깔려있는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가정을 택
한 제시의 조처였던 것이다. 당연히 바그너는 풀이 죽었다. 이렇게 해서 이 짤
막한 사랑의 멜로드라마는 끝이 났다. 제시의 남편과 가족들은 그녀의 참회를
강요했다. 이때 쓴 그녀의 편지 한 구절. “나는 이 사랑이 하나도 부끄러울 게
없습니다. 설령 죽는다 해도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으로 세상이 끝장난다
해도 떳떳한 마음뿐입니다. 아! 내 생애 가장 고귀한 그 환희의 키스, 내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해도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명예도 덕망도 위대함도 내게는
이 이상 더 값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민나가 입은 자존심의 상처는 대단했지만 눈물로서 남편이 돌아와 주기를 간
청했다. 바그너는 못 이기는 채 집으로 돌아갔고 곧 가정은 원상을 회복했다.
1850년 8월, 리스트의 노력 끝에 <로엔그린>이 바이마르에서 큰 성공을 거두
며 상연됐다. 바그너는 수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연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
로엔그린>이 거둔 성공으로 그의 작품이 독일의 전 지역에서 공연되는 기쁨
을 얻었다. 이 성공은 취리히에서의 그의 신분을 명사의 지위로 올렸고 그에
따라 후한 사례를 받고 지휘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의 기회가 주어져 멋진 저
택을 소유할 만큼의 수입도 보장 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드레스덴에서 그를
찾아온 두 젊은이 <카를 리터>와 <한스 폰 뷜로>를 제자로 받아들여 지휘법
을 가르쳤다. 그중 뷜로는 후일 바그너와 얄궂은 운명에 휘말리게 되기도 한
다.

1853년 5월, 취리히에서 바그너 탄생 40주년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다. 이 축
제엔 독일 전역에서 초청된 연주가들이 참가했고 축제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시(祝詩)가 낭송되고, 월계관과 은술잔이 증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조국의 체포령으로 여전히 상처
받고 있었다. 게다가 민나의 건강이 나빠져 그녀의 신경은 몹시 날카로운 상태
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사치벽은 막대한 부채를 낳아 경제적인 고통까지 겹
치게 됐는데 이 고통은 다행스럽게도 부호 베젠동크의 도움으로 해소될 수 있
었다. 그는 베젠동크에게 형언키 어려운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감사의 마음은 엉뚱하게도 베젠동크의 아내 마틸데와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비
화된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진정한 사랑의
행복을 맛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사랑을 이번만큼은 철두철미하게 만끽하기
위하여 이 가장 아름다운 모든 꿈들을 엮어 하나의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1857년 4월, 바그너 부부는 오토 베젠동크가 제공한 ‘피난처’라고 이름 지어진
호반의 별장으로 이사했다. 마틸데는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바그너에게 열정
적인 사랑을 보냈다. 결국 바그너의 가정과 베젠동크의 가정은 폭발 일보 직전
의 상황에 이르게 됐다. 1858년 4월 7일, 민나는 남편이 마틸데에게 보낼 연서
를 가로챘다. 바그너는 마틸데와의 관계가 오로지 정신적인 것이라고 아내를
설득했으나 민나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즉각 마틸데에게 편지를 보내고 모
든 비밀을 그녀의 남편에게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한편 베젠동크는 아내와
바그너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에
겐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바그너에겐 후원자로서의 지원을 변함없이 실천하는
너그러움을 견지했다. 마틸데에 대한 질투심으로 건강이 나빠진 민나는 석달
동안 전지요양을 하고 돌아왔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도리 없이 바그너
는 ‘피난처’를 떠나야만 했다. 민나는 작센으로 바그너는 베니스로 향했다. 베
니스에 온 그는 작곡 중에 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완성에 매달려 7개월
뒤엔 제2막을 완성했다. 제3막에 들어갈 무렵 베니스의 무더위로 건강이 나빠
져 다시 짐을 꾸렸다. 이번엔 스위스의 루체른으로 갔다. 그곳에서 <트리스탄
과 이졸데>를 완성시키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파리로 갔다.

1860년 여름, 그가 11년이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반가운 소식이 왔다.
작센왕이 바그너의 독일 추방을 해제하는 조처를 내린 것이다. 이제는 독일의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된 것이다. 그해 8월 그는 드
디어 1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감격은 이루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
다. 그러나 민나와의 사이는 여전히 소원했고 그럴수록 그녀의 히스테리는  심
해졌다. 파리에서 잠시 머문 뒤 민나는 드레스덴에서 혼자 살게 되는데 1862년
에 바그너가 한번 아내를 찾아갔을 뿐 그녀는 1866년 1월에 세상을 떠날 때 까
지 바그너를 만날 수 없었다.

1863년 3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작곡에 몰두해 있을 무렵 한스 폰 뷜로 내
외가 그를 방문하여 며칠간 함께 지냈다. 그들 부부가 떠날 무렵 바그너는 뷜
로의 아내 코지마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자신도 코지
마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864년 4월, 슈투트가르트
로 가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어느 날 외
출에서 돌아와 보니 ‘바이에른왕 전하의 대신’ 이라는 명함이 놓여 있었다. 바
그너는 이 대신을 만나 루드비히 국왕이 그에게 내린 반지와 초상화를 받고 정
신이 얼얼해졌다. 그는 국왕의 초청을 받고 뮌헨으로 갔다. 국왕은 그때부터
바그너의 친구가 되었고 영원한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이제 바그너가 마음먹
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간 수많은 적들이 바그너를 노골적으로 깎
아내리고 공연을 방해했지만 이젠 그런 걱정쯤은 벗어놓게 된 것이다. 생계를
위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지휘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의 이상에 맞는 공연
만을 뮌헨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권리와 돈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국왕
루드비히는 소년 시절부터 열렬한 바그너 예찬자였기에 바그너의 작품과 그
의 언행 모두는 국왕의 기쁨 그 자체였다. 국왕은 그에게 4천 플로린의 연봉을
주었다. 각료들이 받는 연봉보다도 더 많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호화로운 저택도 그에게 제공했다. 그동안 지은 빚도 갚아 주었다. 그
뿐 아니라, 국왕이 원한 작품을 쓰는 경우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어마어마한 돈
이 주어졌다. 하루 아침에 바그너는 부러울 게 없는 벼락부자가 되었다. 1865
년 4월 10일, 뮌헨 궁정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날 코지마는 바그너의 딸을 해산했다. 딸의 이름은 오페라 제목에서
가져와 ‘이졸데’라고 지어졌다. 뷜로는 자기 아내가 스승의 딸을 낳았는데도 약
속대로 6월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

1865년 여름, 국왕의 신하들과 신문들은 바그너 때문에 국고가 낭비되고 있다
고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궁지에 몰린 내각은 바그너의 축출을 국왕에게 건의
하게 된다. 국왕도 하는 수 없이 6개월간만 뮌헨을 떠나 있으라고 바그너에게
말했다. 바그너는 스위스로 갔다. 코지마가 곧 달려와 둘은 보금자리를 꾸몄
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뮌헨의 신문들은 바그너와 코지마를 맹렬하게 공격하
기 시작했다. 루드비히 왕은 바그너가 곁에 없자 늘 침통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바그너가 53회 생일을 맞게 되자 몰래 궁정을 빠져나와 루체른 호반에있는
바그너의 집까지 찾아왔다. 그는 바그너 곁에 있기 위해 왕위를 버릴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국왕으로 있어야만 둘이 함께 원하는 이상을 달성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867년 2월, 둘째 딸 에바가 태어났다. 바그너는 모처럼 가정의 단란한 사랑과
평화를 만끽했다. 얼마 후 뮌헨으로 돌아오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가서 <로엔그린>을 상연하고 대망의 음악학교 개교식에도 참석했다. 음악학
교 역시 국왕과 바그너의 이상 가운데 하나였다. 잇달아 음악잡지의 창간도 실
현됐다. 이듬해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가 상연됐는데 국왕은 관례
를 깨고 바그너를 로열박스에 앉게 하여 바그너의 적들을 또 한번 분노케 만들
었다. 신문들도 온갖 표현으로 그를 중상모략했다. 바그너는 뮌헨이 싫어졌
다. 다시 루체른으로 돌아온 그는 <지그프리트>을 완성시켰다. 그때가 6월이
었는데 코지마는 그토록 바그너가 원했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을 ‘지그
프리트’로 지었다. 코지마는 남편을 숭배했다. 그녀의 헌신적인 내조는 바그너
를 감동시켰다. 그는 국왕이 명령한 자서전을 아내로 하여금 받아쓰게 하면서
유유자적했다. 이제 그들이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제자의 아내를 빼앗은’ 사실
에 분개하고 있는 코지마의 아버지 리스트의 이해와 관용이었다.

어느 날, 바그너와 코지마는 독서를 하다가 바이에른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
에 독일에서 가장 큰 무대가 있는 극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그너는
그의 대작 <나벨룽겐의 가락지>를 이 극장에서 상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870년 여름, 코지마와 뷜로는 정식으로 이혼했다. 8월에 코지마와 바그너는
결혼식을 올렸다. 바그너의 행복감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 때
의 일화는 이 부부의 애정을 잘 나타내 준다. 코지마의 생일은 성탄 날 이었
다. 바그너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내를 깜짝놀랄만큼 기쁘게 하기 위해 제자들
과 멋진 음모를 꾸미고 그 일을 지휘자 한스 리히터에게 맡겼다. 리히터는 비
밀리에 연주 팀을 만들어 은밀히 연습을 진행시켰고 그 자신은 트럼펫을 연습
하기 위해서 호수 가운데까지 배를 몰고 나갔기 때문에 코지마로 부터 ‘바람둥
이’라는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드디어 코지마의 생일날이 밝아왔다. 연
주자들은 그녀의 침실로 향하는 계단에 숨을 죽이고 자리를 잡은 다음 이윽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코지마의 놀라움과 기쁨이야....후일 지그프리트는 이때
연주된 <지크프리트 목가>를 ‘층계음악’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봄, 바이로이트로 갔다. 극장을 살펴본 결과 많은 문제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여기에 새 극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市 당국자들은 바그너를 위해 기꺼
이 넓은 땅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그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직접 설계
에 나서는 한편 건축기금만련을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1872년 5월 22일, 바그
너의 59회 생일날에 많은 군중들 앞에서 머릿돌이 놓여졌다. 그러나 성금은 생
각대로 잘 모아지지 않았다. 바그너 협회가 중심이 되어 독일전역에서 기금 모
금 음악회를 열었지만 그 돈은 겨우 네 벽을 쌓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유일
한 구원은 국왕이었지만 국왕은 몇 달 동안 일부러 모금소동을 지켜보기만 했
다. 그러나 마침내 왕은 바그너에게 편지를 보냈다. “누가 경(卿)과 경의 위대
한 사업에 대한 짐의 열정이 조금이라도 식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정신착란
자라 생각해야할 일이요. 감히 누가 우리 사이를 갈라 놓을 수가 있단 말이오.
짐은 기필코 경을 도울 것이요. 우리들의 계획은 실패할 수가 없는 일이요.”

극장은 세워졌고 바이로이트 축전의 개막은 1876년으로 정해졌다. 저명한 가
수들이 바이로이트로 속속 모여 들었고 연습이 시작되었다. 축제의 개막에는
루드비히 국왕은 물론, 브라질의 황제 돈 페드로 2세, 독일의 황제 빌헤름1세
와 왕자들, 그 밖의 수많은 대공과 군주들이 참석했다. 어느 음악가도 생전에
누릴 수 없는 영광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그너의 신화이기도 했다. <니
벨룽겐의 가락지> 공연이 모두 끝나자 그는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가족
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하며 원기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미 노인이 되고 있
었다. 그래도 창작의 봇은 멈추지 않고 최후의 작품 <파르지팔>을 썼다.

1880년 말, 마지막으로 국왕을 알현했다. 1882년엔 <파르지팔>이 상연됐다.
이 상연의 마지막 날 지휘를 손수 했다. 1883년 2월 13일, 바그너는 심장병으
로 코지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바이로이트의 반플리트 저
택 마당에 안장됐다. 바그너가 별세한 뒤, 루드비히 국왕은 스스로를 미쳤다
고 선언했다. 그리고 며칠 뒤 경호원과 함께 스타른베르크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바그너 없는 세상을 살아 무엇하리”라고 푸념하다 자살을 결행한 것
이다.

** 바그너의 오페라 목록 / http://wagneroperas.com/indexwagneroperas.html
** 바이로이트페스티발 / http://www.bayreuther-festspiele.de/Anfangsseite/deutsch.htm
** 루체른의 바그너 박물관 /
                       http://www.richard-wagner-museum.ch/en/index/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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