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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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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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람스(Johannes Brahms, 작곡가, 1833-1897)


** 유투브 감상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vqYHkZhZ31s


♣ 학습시대
브람스는 18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27세였고 모친은
44세였다. 음악가를 지망했던 부친 요한 야콥은 항구 근처 술집의 밴드맨으로
서 호른 연주자로 활동하다 바빌리온의 6중주 단원이 되어 모차르트, 베토벤
의 명곡을 쉽게 편곡한 것을 주로 연주했다. 철물점에 하숙하고 있던 그는 같
은 하숙집에 묵고 있는 자매의 언니와 친하게 되었고 일주일만에 두 사람은 결
혼을 했다. 신랑은 24세, 신부는 혼기를 놓쳐버린 17세 연상의 여인이었다.

이들의 결혼이 이루어진 1830년 당시로서도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연령
의 차이었다. 유년 시절에서 청년기로 이어지는 때의 요하네스 브람스는 부모
의 이러한 처지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상황은 그에
게 남녀간의 문제의식에 관한 점만은 확실히 심어준 것 같다. 클라라 슈만과
의 관계, 많은 연애, 그리고 고독을 선택한 브람스의 일생이 그의 부모에게 받
은 영향이 크다는 의견이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브람스의 음악이 지니
고 있는 양면성 즉, 명과 암, 희망과 절망, 엄격함과 온유함 따위의 대립되는
정서가 교차되는 것도 부모의 연령의 차이를 보면서 성장한 데서 원인이 찾아
진다는 것이다.

브람스가 출생한 그 해는 베토벤이 빈에서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였다. 또한 바
그너가 작곡가의 첫 발을 내딛고 교향곡 다장조를 프라하에서 초연한 1년 후
의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멘델스존, 슈만에 의하여 낭만파 음악의 새로운 물
결이 크고 힘차게 신선한 음향을 그려내고 있을 시기였다.

브람스는 부친에게 음악의 초보를 공부했다. 다행스럽게도 부친은 자기 아들
의 특별 한 능력을 간파할 정도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부친은 자기 스스로
아들의 능력을 감당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거리의 음악 교사에게 데리고 갔
다. 7세부터 10세까지는 오토 코셀, 15세까지는 에두아르트 마르크스젠에게 음
악을 배우게 됐다. 바흐에 대한 지식을 첫 스승에게, 베토벤의 위대함은 두 번
째 스승에게 배웠다.

그가 베토벤의 사고방식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그의 초기 피아노 소
나타 속에 베토벤의 영향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동시에 그는 베토벤의 영향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작곡가였다. 브람스는
베토벤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바흐나 쉬츠 쪽으로 방향 전환
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의 작품의 양식적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다. 베토벤
같은 음악보다는 바흐나 쉬츠의 음악 속에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프로테스탄트계의 작곡가였던 그가 쉬츠나 바흐로 이어지는 프로테스탄트 독
일 음악의 계보를 이은 셈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종교적인 색채가 깃든 브람스, 베토벤, 바흐라는 대작곡가
들은 큰 유럽의 정신의 공통적 기반 위에 있었다고 파악된다. 또한 브람스는
음악과 관련되는 예술 전반에 대해서도 베토벤과 바흐를 잘 알고 있었던 스승
들에게서 배웠으며 그것이 브람스가 작곡가로서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큰 힘
이 되었다. 낭만파 음악 최전성기에 등장했으면서도 그 물결에 압도당하지 않
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을 개척해 나간 능력은 두 스승의 좋은 지도덕택이
었다.

♣ 숙명의 라이벌, 브람스와 바그너
브람스라는 이름에 늘 붙어있는 또 한 사람의 작곡가는 바그너이다. 일반적으
로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는 그들의 관계는 본인들의 의
식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립 양상이다. 실제로 브람스는 바그
너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오페라를 잘 보러 다녔다. 다만 창작 기법 상 서로 다
른 길을 추구했기 때문에 바그너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찍
이 두 사람의 천재가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의 재능을 불태웠던 일은 그리 흔
한 일은 아니다.

브람스와 바그너가 활약하던 시기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사망으로 고전주의
가 사그러들면서 무대가 독일로 옮겨져 낭만주의의 음악이 싹트기 시작할 무
렵이었다. 당시의 이슈는 “포스트 베토벤” 이었다. 누가 과연 베토벤의 뒤를 이
을 음악가인가? 였다. 이 때 등장한 음악가들이 베버와 멘델스존, 슈만 등이었
으나 이들은 포스트 베토벤이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나타난 이들이 바로 브람
스와 바그너였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로가 주장하는 노선마저 극명하게
달랐다. 바그너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를 연 베버의 뒤를 이어 독일 국
민 오페라를 창출해낸 '개혁파' 작곡가였다면, 브람스는 앞 세대의 작곡가인
바흐나 베토벤, 슈베르트와 같은 선배 음악인들의 노선을 철저히 뒤따라간 '보
수파'였다.

작품 양식에 있어서도 브람스는 악곡을 형식 또는 소재 별로 구분하여 각각 독
립된 가운데 완벽성을 기했으나, 바그너는 음악의 모든 장르와 양식을 다만 종
합 예술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
친 데 비해, 브람스는 한 편의 오페라도 남기지 않았고, 브람스가 작곡가가 되
기 위해 태어난 천부적인 작곡가형이었다면, 바그너는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팔방미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렇게 출신 성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는 것은 충분히 예상이 가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의 사이가 그토록
멀리 갈라진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바그너가 1863년 그의 오페라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무렵의 일이다. 브람스는 이
때 바그너의 조수처럼 사보를 돕고 있었다. 그럴 즈음 브람스에게 당시 이미
거장이었던 바그너 앞에서 헨델의 변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연주를 들은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다. 이에 고무된 브람스는 “역시 바그너
를 대적할 작곡가는 앞으로 없을 것”이라며 흥분하게 된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브람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바그너 앞에서 두 번째의 연주를 가
지게 되면서 그만 깨지게 된다. 예상과 달리 바그너가 브람스를 “전통 속에 갇
힌 인물”이라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후에 바그너는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는 브람스를 “바흐나 작곡해야 할
인물”로 혹평하고 있다.

이 사건은 브람스로 하여금 바그너의 환상을 깨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
니라, 그 후 죽을 때까지 바그너를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
엔 호의적이었던 바그너가 왜 그처럼 표변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
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 문제 때문으로 보고 있다. 당시 브람스는 빈의
최대 평론가인 한슬릭에게 바그너의 여자문제를 폭로해버렸고, 이 때문에 바
그너는 한슬릭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슬릭으로부터 수세에 몰
린 바그너는 이 때문에 빈에서 공연하기로 하고 연습을 거듭했던 <트리스탄
과 이졸데>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바그너가 공격을 받았던
여자 문제란, 그에게 많은 돈을 빌려주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이 여인에게 연정의 뜻이 담긴 각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각서
가 그만 브람스에게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당시 브람스는 모차르트, 슈베르
트, 베토벤 등의 자필 서한을 비롯한 음악인들의 악보 수집을 취미로 삼고 있
었다. 때문에 바그너의 연서가 브람스에게 흘러들어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
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각서를 브람스가 자신의 후견인처럼 활약하
고 있는 한슬릭에게 공개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고, 더구나 그 시기가 바그너
가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던 리스트의 둘째 달 코지마에게 아이를 갖게 한
때였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바그너에 대한 브
람스의 폭로 사건은 하필이면 <니벨룽겐의 반지>의 성공으로 떠들썩한 유럽
음악계에 찬물을 끼얹은 일대 사건이었다. 졸지에 허를 찔린 바그너는 이에 질
세라 브람스의 음악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브람스가 낭만주의 시대에 바
로크와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한 것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람스의 독신을 끈질기게 헐뜯으면서, 그의 음악을 “오늘은 길거리
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가 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
인 깽깽이로 쏘다닐 것이다”라고 힐난했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브람스의 험담
을 해대는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침묵으로 고민만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독설과 공방은 마침내 유럽의 음악계가 양분되는 사태
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브람스 지지파와 바그너 지지파로 나뉜 것이다.

브람스 지지파는 슈만 부부를 비롯해, 아내를 바그너에게 빼앗긴 한스 폰 뷜
로, 당대 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 등이었고, 바그너 쪽으로는 리스트,
니체, 쇼펜하워, 마이어베어 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브람스의 지지파인 한
스 폰 뷜로가 그의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기기 전까지는 바그너의 숭배자였
다는 사실이다. 바그너와 브람스는 여자 문제에서도 격돌하게 되는데, 베젠동
크 부인과의 사랑이 그것이다. 두 번의 결혼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인을 가까
이했던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여인들을 사랑은 했으나 결혼까지 이르지 못
했었다. 이런 브람스를 두고 바그너는 '내시'니 '고자'니 하는 독설을 퍼부었는
데, 하필 이 두 사람이 모두 한 여인을 사랑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그너와 브람스가 함께 사랑한 여인은 베젠동크 부인이었다 이 여인이 두 사
람 중 누구를 더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전하며 경쟁을 했다. 결국은 무위로 끝났고, 또 하나의 상처만 각각
의 가슴에 남았다. 숱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가슴에 안을 수 없었던
브람스는 고독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모두 가슴에 안았지만 경제
적으로는 무능했던 바그너 역시 그의 삶에서는 실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두 사람의 치열했던 음악 혼은 설혹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
지언정 각자의 길에서 위대한 승리자 였다. 

♣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
“아침마다 제게 문안 전보를 쳐 주시리 않으렵니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
는 온종일 기쁘게 지낼 것입니다. 부인이 없이는 이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한탄해 보아도 부인이 옆에 계시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지만, 그래도 미칠 듯이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는 자의 슬픔은 다소나마 가라
앉습니다”

슈만이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하려다 구출된 것이 1854
년 2월 27일인데, 이 편지는 8개월이 지난 10월에 브람스가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편지이다. “부인이 없이는 이젠 더 이상 견딜 수 없을”만큼 클라라를 향
한 사랑은 맹렬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라 슈만은 브람스의
나이보다 14세나 많았다. 클라라는 21살 때인 1840년에 슈만과 결혼하여 남편
이 1855년 7월 29일 정신병원에서 별세할 때까지 불과 15년을 함께 살았다. 미
망인이 된 그녀에겐 여섯 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브람스가 요아힘의 소개로 처
음 슈만을 방문했던 것은 1853년 9월 30일이었다. 그날 슈만과 클라라는 브람
스가 지니고 있는 놀라운 작곡 재능에 크게 탄복했고, 슈만은 그가 주재하고
있는 ‘신음악신보’에 다음과 같이 브람스를 소개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나타났던 것이다. 그 젊은 사람의 요람은 세 명의 클라치
(우아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女神)와 영웅들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인데 함브르크에서 온 청년이다. 거기서 은밀
히 창작은 계속하고 있었으나, 이 예술의 가장 어려운 작문법을 어느 우수한
스승(에두아르크 마르크스젠)에게서 배웠고, 얼마 전에 어느 유명한 음악가의
소개를 받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외모부터 선천적인 소질을 타고났음을 우
리에게 알려주는 모든 표상을 갖고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신기한 영
역의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는 감미롭고 신비스런 세계로 끌려갔다.”

슈만은 이 간행물에 그때까지 10년 동안 아무 글도 쓰지 않았었다. 그가 갑자
기 펜을 들어 그때까지 아무도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요하네스 브람스라
는 젊은 작곡가의 등장을 화려하게 알린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이 찬양의 대
상이었던 브람스는 고마움보다 오히려  충격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당신
이 나한테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공적인 찬사는 내 능력에 대해서 너무 높은
예상을 불러 일으켜 어느 정도까지  내가 그 찬사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지 자
신이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나는 발표할 작품의 선정에 있어서 굉장
히 주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에 브람스는 많은 작품들을 없애 버렸는
데, 슈만이 쓴 기사는 그의 자신감을 다져주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저해했던
측면도 있었다.

슈만을 방문한 첫날,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거의 숙명적이었다. 클라라는 그
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의할 정도였다.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한 것은
그들이 처음 만난 날로부터 불과 5개월 후의 사건이었다. 그 무렵 브람스는 하
노버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스승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한편, 클라
라와 그녀의 자녀들을 돌보게 되는데 이런 일을 통해 클라라를 향한 사랑이 싹
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전 브람스와 클라라는 수많은 연
서를 교환했다. 다만 클라라는 그녀의 편지가 남의 눈에 띄는 것이 불안하여
“이 편지는 곧 태워 버리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앞으로 편지를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1854년11월)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
을 무렵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855년 이후까지 클라라에게 보낸 브람스의 편
지들 가운데 몇가지.

“죽도록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글로써만 아니라 오늘 제 자신의 입으로 부인
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하느님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부인에게 저의
눈물을 전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1854년 11월)

“제가 편지를 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요. 그리고 저를 믿어 주십시오. 부인
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는 글로도 잘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한 것입니다. 부
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저는 문득 부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
이 듭니다.”(1854년 12월)

“부인을 생각하고 부인이 보내 주신 편지를 거듭 읽고 부인의 사진을 바라보
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도대체 부인께서는 저를
어떻게   하신 것일까요? 이 마력을 저에게서 풀어 주실 수 없을까요?”(1855년
1월)

“부인의 편지가 이토록 큰 기쁨을 저에게 주신 것은 드문 일입니다. 아침부
터      한 마음으로 부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마음에는 너무나도 강하
게 부인의    존재가 느껴집니다. 얼마나 저를 행복하게 해 주셨던 것일까요!”
(1855년 3월)

“저는 지금 얼마나 부인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지 모릅니다. 무슨 소리만 들려
도   이내 창가에 달려갑니다. 부인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부탁 합니다. 저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1855년 5월)

“언제나 부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인은 한사코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
다. 부인이 계시지 않으면 저는 얼마나 불행하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부인
을 진정으로 포옹하게 해 주십시오.” (1855년 8월)

브람스의 음악어법(語法)은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비교하면 비교적 낡은 것
이었다. 바그너의 영향이 거의 모든 음악인들에게 끼쳐진 상태였기 때문에 고
전적 전통을 지키고 있는 브람스의 작곡 태도는 자연히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
다. 때문에 그에겐 적이 많았다. 그의 작품이 연주되는 곳에 바그너 음악이 추
종자들이 몰려 와서 연주를 방해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되고 있었다. 그러
나 클라라는 항상 브람스를 옹호하고 나섰다. 어느 날 클라라는 친구 루우젤에
게 “그 사람은 거의 모든 음악가들과 등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브람스가 자
기네들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그들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두둔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브람스는 1892년 12월 23일에 클라라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브람스는 59세
였고 클라라는 73세였다. “저는 벌써 오랫동안 부인의 집에서 성탄절을 같이
보내지 못하고 있군요. 그 무렵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
고 있었습니까?

젊은이들이나 늙은이들의 눈빛도 그랬었구요. 저는 로베르트(슈만)의 변주곡
을 쉴새없이 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봄날의 오후에 꽃핀  나무 밑에서 졸
졸 흘러내리는 냇가를 거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곡입니다. 당신의 요
하네스.” 그리고 4년 뒤. 1896년 5월 7일, 클라라는 브람스의 생일을 축하하는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편지였다. 이틀 후, 클라라의 딸
마리가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 왔다.

브람스가 클라라를 향한 지극한 사랑의 헌신을 하고 있을 무렵, 괴팅겐에 있
는 그림이라는 친구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림의 부인 친구 중에 아가테
폰 지볼트라는 눈부신 미인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브람스는 아가테와 산책
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클라라와 우연히 부딪친 일이 있었다. 클라라는 두 사
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줄 알고 크게 놀라서 그 이튿날 당장 그곳을 떠
나고 말았다. 클라라는 비록 브람스처럼 그의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이런 행동이야말로 그녀가 얼마나 깊이 브람스를 사랑하고 있는가
를 보여준 것이리라. 브람스는 한때나마 아가테를 사랑한 것 같다. 그러나 결
혼에 이르지 못한 것은 역시 클라라를 향한 사랑이 더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아가테와의 덧없는 사랑에서 <현악6중주곡 제2번>과 몇 곡의 가곡이
만들어 지기도 했다.

1896년 5월 6일, 클라라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그녀는 브
람스의 생일(5월 7일)을 축하 하는 편지를 보냈다. 글씨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
울 정도였다. 클라라는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클라라의 부음이 브람스에
게 너무 늦게 통지된 데다 기차도 제때에 타지 못해서 그녀가 묘에 매장될 시
각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클라라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브람스는 새삼
스레 엄습해오는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그것은 급기야 그의 마음속에 한
가닥 남아 있었던 삶의 의미마저 거두어 가는 듯 했다. 게다가 클라라의 장례
때문에 그는 육체적으로도 몹시 지쳐있었다. 그해 8월 중순에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온천장으로의 전지요양을 권했다. 9월 2일, 브람스는 카를스바
트 온천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닥터 그뤈벨거의 정밀 진찰을 받았다. 병
명은 ‘악성 간장 비대’. 브람스는 마음씨 좋은 브뤼셀 태생 부부가 경영하는 작
은 여관에서 정양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이 여관은 ‘요하네스 브람스관’으로 불
려졌다.

10월에 빈으로 갔다. 10월 14일엔 브루크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1월 9일엔
<4개의 엄숙한 노래> 초연에 임석했다. 다음해 1월 2일엔 <현악5중주곡 사 장
조>가 요아힘 4중주단에 의해 연주됐고 브람스는 무대인사를 했다. 1897년 4
월 3일, 브람스는 운명했다. 1833년 5월 7일, 독일의 함브르크에서 술집 악사
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끝내 위대한 예술의 승리를
거둔 브람스. 그의 향년은 64년이었다. 그는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쉬고 있는
빈의 중앙묘지에 합류했다. 장례가 있었던 날, 그의 곁엔 마지막 여인 아리스
바르비만이 동행하고 있었다.

클라라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브람스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사람들
은 다만 모든 것을 잃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덤에 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 무덤 위에는 바람이 불지도 모르며 눈이 내릴는지도 모릅니
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모두 그전과 다름없이 매일 지나가는 것입니다.”

브람스가 운명한 날, 그의 고향 함부르크 항구에선 모든 선박들이 조기를 걸
고 애도했다.

** 출처 :
http://kmh.ync.ac.kr/composers/07_Romantic6/Brahms_1/index.html
http://kmh.ync.ac.kr/composers/07_Romantic6/Brahms_1/brahms.html
http://kmh.ync.ac.kr/composers/07_Romantic6/Brahms_1/brahms_bio.html
http://kmh.ync.ac.kr/composers/07_Romantic6/Brahms_1/189705brahms.html
http://kmh.ync.ac.kr/composers/07_Romantic6/Brahms_1/brahms3.html
http://kmh.ync.ac.kr/composers/07_Romantic6/Brahms_1/Brahms01.htm 

** 작품목록 / http://w3.rz-berlin.mpg.de/cmp/brahms_works.html
** 이 글을 퍼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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