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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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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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콤 서전트(Sir Malcolm Watts Sargent, 1895.4.29-1967.10.3, 지휘자,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 유투브 감상
Brahms-Academic Festival Overture
http://www.youtube.com/watch?v=YjIGaL9HsDI&feature=player_detailpage

영국 켄트 주의 에쉬포드(Ashford) 출생의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지휘자이
다. <발레 뤼스, Ballets Russes, 1909년에 디아길레프가 조직한 러시아 발레
단> <왕립 합창협회, the Royal Choral Society> <도일리 칼트 오페라단,
the D'Oyly Carte Opera Company> <런던 필하모닉> <할레 필하모닉> <리
버풀 필하모닉> <BBC 교향악단> <로열 필하모닉>의 창설에 관여한 인물이
며, 1948년부터 1967년까지 무려 19년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름 축제
런던의 <프롬스, Proms>를 지휘했다. BBC 라디오 토크쇼의 인기 있는 페널
이었고, <사보이 오페라>라는 별명으로 불려지는 <길버트와 설리반>의 오페
레타 지휘와 음반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활기에 넘
친 지휘 스타일과 뛰어난 작곡가로서 전세계를 여행했다.  

아버지는 석탄 사업가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였고 파트타임으로 교회 오르가니
스트 일을 했다. 말콤은 고향을 떠나 링컨셔 주의 스탬포드(Stamford)로 보내
지고 그곳의 피터보로그 대성당(Peterborough Cathedral) 성가대원으로 노래
했고, 스탬포드 학교에서 오르간을 공부했다. 14살 때, 설리반의 오페라 <곤도
리어스, The Gondoliers>와 <보디가드, The Yeomen of the Guard>의 연습
반주자로 참여했고, 16살 때 <로열 오르가니스트 칼리지>의 조교 자격을 획득
했다. 18살 때는 두르햄 대학교에서 음악학사학위를 받았다.

레이체스터셔(Leicestershire)에서 가장 큰 교구교회인 쎄인트 메리 교회의 오
르가니스트를  1914년부터 1924년까지 10년간 지냈다. 150여명의 경쟁자를 물
리친 자리였다. 이곳에서 시무하는 동안 오르가니스트의 일 이외에 길버트의
오페레타를 제작하거나 지휘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당시 웨일즈 공
은 그의 측근들을 대동하고 이따금 그곳으로 사냥을 왔고 그때마다 길버트의
오페라를 요크 공 등 왕족들과 함께 관람했었다. 24살 때, 말콤은 영국에서 가
장 어린 나이에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1년 초, 헨리 우드 경(Sir Henry Wood)이 퀸즈 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레
이체스터셔를 방문했다. 관례에 따라 그 지역 작곡가에게 오케스트라가 연주
할 소품을 의뢰하게 됐는데 우드경은 말콤에게 <바람부는 날, Windy Day>이
라는 제목으로 소품을 쓰도록 의뢰했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이 늦어져 충분한
검토를 할 여유가 없자 첫 연주의 지휘를 말콤에게 맡겼다. 우드경은 작품의
가치를 평가했을 뿐 아니라 말콤의 지휘자로서의 자질을 평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런던에서 열리는 <프라머네이드 콘서트, Promnade concert>의 지휘자
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말콤은 그해 10월 11일, 퀸즈 홀
(Queen's Hall)에서 데뷔했다. 이 연주회에서 홀스트의 <행성, The
Planets> 모음곡과 자작곡을 지휘해서 호평을 받았다. 우드경은 다음 해 연주
회 프로그램에 말콤의 녹턴과 스케르조를 추가시키고 또 다시 말콤에게 지휘
를 맡겼다. 1923년 시즌에도 프롬스를 지휘했는데 이때 우드경 등의 조언을 받
아들여 작곡 작업을 중단하고 지휘에만 전념하기로 작정한다. 이에 앞서 1922
년에 레이체스터셔에 아마추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1939년까지
이 악단을 지휘했다. 그 기간에 오케스트라의 기량이 발전하였고, 말콤은 정상
급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아르트루 슈나벨, 솔로몬, 귈헤르미나 수기
아, 벤노 모이세이비치 등으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고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서도 인정을 받았다. 또한 우드경과 아드리안 불트의 추천으로 1923년부터 런
던 왕립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일도 시작했다.

1920년대, 말콤은 이미 유명한 지휘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1925년, 영국 국립
오페라가 제작한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를 지휘했고, 1926년, 프린스 극장
의 런던 시즌을 지휘하고 새롭게 리모델링한 사보이 극장에서 1929-30년 시즌
을 지휘했다. 이 무렵, 작곡자 설리반이 말콤에게 보낸 필사본 악보는 상세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아닌 대강의 아우트라인만을 표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말콤은 작곡자의 의도 못지않게 악보를 해석해서 지휘했다고 오페라 단장
인 도들리 카트가 전하고 있다. The Times 등 미디어에서도 말콤에 대한 평
은 매우 호의적이었고, 그의 연주가 방송을 통해서 소개되면서 대중들 사이에
서도 그의 이름은 빛이 났다. 1926년에 방송된 설리반이 일본을 무대로 쓴 오
페레타 <미카도, Mikado>는 무려 8백만 명이 청취할 정도였다. 당시 이브닝
스탠다드는 “아마도 세계 역사상 단 한 번에 이 같은 엄청난 청취를 기록했다
는 사실을 들은 바가 없다”고 보도했다. 1927년, 디아길레프가 발레 뤼스 지휘
를 의뢰했고 1928년에도 이 발레단을 지휘했다. 1928년, 로열 코럴 소사이어티
(The Royal Choral Society)의 지휘자가 됐고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후 말콤의 이름과 로열 코럴의 이름은 동의어처럼 사람들에게 익숙
해 졌다. 평론가들은 말콤을 20세기 최고의 합창 지휘자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실업가 새무엘 쿨톨드(Samuel Courtauld)의 부인 엘리자베스 쿨톨드
의 제안으로 1928년부터 예약음악회 시리즈를 시작했다. 말콤이 수석지휘자
로 음악회를 주관했고 브루노 발터, 옷토 클렘펠러, 스트라빈스키 등을 객원지
휘자로 초빙해서 운영한 이 음악회는 이전에 콘서트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었고 말콤은 핵심적인
레퍼토리를 확장했다. 아서 브리스, 아르트루 오네게르, 졸탄 코다이, 마르티
누, 프로코피에프, 시마노브스키, 윌리엄 월튼 같은 새로운 작곡가들의 작품들
이 핵심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이 시리즈를 런던 교향악단이 맡도
록 되어 있었으나 단원들의 자치적인 결의에 의해서 운영되는 이 악단의 성격
상 말콤과 상충되는 일이 벌어져 결국은 새 오케스트라를 만들기로 하고 토마
스 비쳠과 협의하여 런던 필하모닉을 탄생시켰다.

이 무렵 말콤은 레퍼토리의 확대를 꾀하면서 합창음악, 특히 영국 합창음악에
집중한다. 헨델의 메시아를 대규모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연주
했고, <Boar's Head>에서 홀스트의 합창곡 <Hugh the Drover>를, 본 윌리암
스의 <사랑에 빠진 존 경, Sir John in Love>, 윌리엄 월튼의 오라토리오 <벨
샤짜르의 축제>등 대규모의 합창곡을 지휘했다. 아울러 청소년들을 위한 콘서
트를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이끌었다.  

1932년에 페결핵에 걸려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1936년에 회복하여 다시 무대
로 돌아왔다. 그해에 코번트 가든에서 그의 생애 처음으로 오페라를 지휘했
다. 샤르팡티에의 오페라 <루이스>였다. 콘서트 지휘자로서 말콤은 매우 엄격
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의 리허설은 너무도 엄격해서 단원들은 과연
이 직업을 천직으로 삼아야 할런지를 심각하게 생각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말콤은 많은 단원들을 잃었다. 게다가 그의 신병이 오래 끌면서 그를 돌
보는 일에도 단원들이 거부감을 갖기에 이르게 되는 등 오랜 세월 말콤은 오케
스트라와 많은 싸움을 했어야 했다.

1936년, 1938년, 1939년, 세 번에 걸쳐 호주 연주에 나섰다. 호주 국영방송은
말콤이 호주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호주에 머물기를 계약하자는 제의를 끈질기
게 했다. 게다가 제2차대전의 와중이었던 때인지라 그 제안은 물리치기 어려
운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귀국했다. 전쟁 기간 동안 멘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Halle orchestra, 1939-1842), 리버풀 필하모닉(Liverpool
Phiharmonic, 1942-1948), BBC 방송교향악단(1941)의 지휘자로 일했고, 국민
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콘서트에도 나섰다. 1944년 어느 날,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을 연주하는 도중 적기의 공습이 들이 닥치는 사태를 만났다. 우선 연주
를 잠시 중단시킨 후, “공습을 피해 자리를 뜨는 것보다 연주회장 안에 있는 것
이 더 안전하다”는 말을 한 뒤 다시 지휘를 시작해서 연주를 다 마칠 수 있었
다. 후일, 말콤은 “내 생애를 통해서 그렇게 훌륭한 연주, 그토록 열심히 듣는
청중은 처음 이었다.”고 회고했다. 1941년, 퀸즈 홀의 마지막 콘서트를 지휘했
다. 그 날 밤, 홀은 공습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1945년, 토스카니니의 초빙을 받아 NBC 교향악단을 4번 지휘하게 됐다. 그는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7번과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1번을 제외한 모든 프로그
램을 영국 작곡가의 작품으로 채웠다. 월튼의 비올라 협주곡, 엘가의 바이올
린 협주곡 등이 무대에 올랐고, 이 연주에서 엘가의 협주곡을 협연한 유디 메
뉴힌은 “최고의 엘가 연주”였다고 평가했다.

♣ 프롬스, 만년
1947년, 말콤은 기사의 칭호(Sir)를 받았다. 그의 영국 작품 알리기 작업은 전
쟁 후에도 계속됐다. 월튼의 오페라 <트로일루스와 크레시다, Troilus and
Cressida>(1954년)와 본 윌리암스의 교향곡 제9번을 초연했다(1958년). 1948
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7년까지 <프롬스, Proms> 페스티발의 수석지휘
자로 일했다. 1950년부터 7년간은 BBC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의 자리를 겸했
다. 이 악단을 오랜 세월 지휘하면서 장악하고 있었던 아드리안 불트의 흔적
이 여전히 남아있을 뿐 아니라 그가 떠난 사실에 대해서 아쉬운 감정을 지니
고 있는 단원들도 여전히 많은 상태에서 이 악단을 말콤이 맡았다. 당연히 평
론가들과 BBC 조직에서조차 말콤을 겨냥하는 그런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에
전혀 개의치 않고 소신대로 악단을 리드해 나가고 결국은 이니시어티브를 손
에 넣었다. 그가 이 악단을 이끌고 어디엘 가든 청중들은 환호했다. 악단은 존
경을 받았고 말콤은 종신지휘자의 자리를 획득했다. 아울러 프롬스는 세계적
인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말콤과 BBC 교향악단은
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1966년 9월 17일, 마지막으로 프롬스를 지휘했다. 그의 <마지막 밤> 연주는 대
단한 열광과 관심 속에서 열렸다. 이해의 프롬스는 문호가 훨씬 개방되어 세
계 여러 나라에서 온 25명의 지휘자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결실들이
말콤의 역량에 의한 것이었다.

토마스 비쳠이 1961년에 사망하자 로열 필하모닉은 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말
콤은 그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움을 줬다. 그들을 이끌고 러시아, 미국, 캐나
다, 터키, 이스라엘, 인도, 극동지역, 호주 투어를 다녔다. 그러나 1960년대 중
반부터 다시 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1967년 7월, 췌장암 수술을 했
다. 그리고 프롬스의 마지막 연주를 위해 9월 17일에 무대에 섰고, 그 무대에
서 콜린 데이비스에게 지휘봉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2주 후, 72세를 일기로 세
상을 떠났다.

** 출처 / Wikipedia(번역/ 곽근수)
** 음반 / http://www.cduniverse.com/search/xx/music/conductor/Sargent,+Malcolm,+Sir/a/Sir+Malcolm+Sargen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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