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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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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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작곡가, 1811-1886)



◈ 음악듣기
Les Préludes  
Daniel Barenboim mit Berlin Philharmoniker, Staatsoper Berlin (1998)
http://youtu.be/jb2bkVQwtBs

할아버지 게오르크 아담은 상당한 권력가로서 세 번 결혼하여 27명의 자식을 거느렸고 음
악적인 재능도 뛰어나서 리스트의 재능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버
지 아담은 라이딩에서 헝가리의 전통 있는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토지 관리인으로 있으
면서 후작의 악단에서 첼로를 켜기도 했고 합창단에서 베이스 파트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811년 1월 11일, 오스트리아의 크렘스에서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고 그해 10월에 외아들
프란츠(Franz)를 낳았다. 이 때문에 프란츠는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배울 기회가 드물었고
오히려 그의 모국어는 독일어가 됐다.

프란츠는 6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8세 때는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그의 연주는
몇몇 귀족들을 놀라게 해 거액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이것이 그의 부친에게 용기를 주
어 그는 가산을 팔아 치우고 고향 라이딩을 떠나 빈으로 가서 베토벤의 제자인 체르니에게
아들을 맡겼다. 체르니는 일체의 사례금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악보를 제공하고 생활도
도와주었다. 11세 때 빈에 데뷔했고 이듬해엔 레드자르잘에서 독주회를 가졌는데 때마침 그
곳에 있던 베토벤이 소년 리스트를 포옹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원의 입학은 외
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개인 레슨을 받으며 공부를 계속했고 1824년
3월 오페라 극장에서 독주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뒀고 같은 달에 런던 데뷔도 감행해 선풍
적 인기를 차지하게 됐다. 그의 연주여행은 프랑스, 스위스의 여러 지방으로 확산됐는데 이
무리한 여행 때문에 아버지가 병을 얻어 1827년 8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를 잃
고나서 3년간 그는 많은 고생을 한다. 그러던 중 1830년 7월에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실의
를 딛고 일어서서 다시 제자도 받고 무대에도 섰다. 1831년에 처음으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던가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겠다"
라고 외쳤다.

리스트가 파리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을 때 다구 백작부인과 알게 됐다. 그녀는 파리 문학
계의 상당한 존재였으며 재색겸비의 여성으로서 한때 훔멜에게 피아노를 배운 일도 있었다.
두 사람은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의 정열에 빠졌다. 그리하여 1835년(24세), 백작부인은 남
편을 버리고 리스트를 따라 제네바로 가서 창설된지 얼마 안된 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들 사이에 두 딸이 출생했는데 둘째 딸 코지마는 후에 바그
너의 두 번째 아내가 됐다.

이 무렵 리스트는 이탈리아의 출판업자 리코르디를 알게 됐고 리스트의 작품 대부분이 그의
출판사에서 발간됐다. 장남 다니엘이 출생할 무렵 ('39년)부터 부인과 불화가 시작됐고 둘
의 관계는 몹시 불편하게 됐다. 부인은 리스트 보다 나이가 많았던 탓인지 질투심이 대단했
다. 결국 1844년에 둘은 완전히 헤어지고 말았다. 리스트는 부다페스트에 개선장군처럼 환
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17일간 조국에 있으면서 9번의 연주회를 개최하여 막대한 수입금을
모두 자선사업에 기부했다. 그는 명예시민으로 추대됐고 축하 연회가 끝나고 숙소로 가는
길엔 수천 명의 횃불 행렬이 그의 발길을 안내했다. 이때부터 10여 년 간 그의 연주가로서
의 생애는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1847년 2월, 러시아의 키에프에서 자선 연주회를 개최했을 때는 비트켄스타인 후작 부인으
로부터 많은 의연금을 받았다. 이에 대한 인사를 하기 위해 부인을 방문한 것이 초면이었으
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둘 사이엔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후작부인은 남편과 아이까지 둔
몸이었으나 남편과 별거하고 쓸쓸하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결혼 생활에 들어갈 것을 생각
하게 됐고 부인은 리스트에게 연주 생활을 중단하고 창작생활을 할 것을 권유했는데 리스트
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1847년 9월에 은퇴를 발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하려면
부인의 정식 이혼 승인이 필요했고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바이마르로 거처를 옮기고 이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바이마르의 大公妃가 러시아
황제의 누이 동생이며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의 지휘자였기 때문에 대공비를 통해서 일을
추진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 일은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됐기 때문에 부인은 로마에 가
서 교황을 알현하고 1860년 10월 22일로 결혼날자까지 잡고 두 사람의 오랜 소망이 성취
되기에 이르렀는데 또다시 그녀의 남편 쪽에서 이의를 제기하여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
다. 그리하여 부인은 모든 것을 단념하고 리스트와 이별하고 로마에 머물면서 신학(神學)공
부에 정진하며 종교 생활에 들어갔다. 리스트도 수도원에 들어가 죽을때까지 검은 수단을
입었다.

[성 엘리자베트의 전설] [작은 새에게 이야기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파도를 넘는
파울라의 성 프란시스코] 등 종교적 소재의 곡들은 이 시절의 작품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
들이 바이마르로 돌아 올 것을 열화처럼 권유하자 1869년에 그곳으로 돌아가 그의 만년을
전 세계에서 모여든 젊고 뛰어난 천재들에게 둘러 쌓여 보냈다. 1886년, 바이로이트에 사는
딸 코지마를 만나고 [트리스탄]도 보기 위해 그곳에 갔을 때 급성 폐렴을 일으켜 결국 객사
하고 말았다. 향년 74세.

리스트 남긴 작품은 대단히 많으나 작품번호가 붙어있지 않다. 젊은 시절엔 번호를 붙이기
도 했으나 출판사마다 번호가 틀려 결국은 정확한 분류가 되지 않아 포기한 것 같다. 페터
라베가 분류한 것으로는 673곡이지만  헝가리 광시곡의 경우만 해도 19곡이 같은 번호로
분류돼 실제로는 훨씬 더 많다.

그의 작품은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기악곡과 관현악에 의한 교향시로 분류된다. 피아노는
초인적 기교와 낭만주의적 악상으로 일관돼 있고 19곡의 라프소디는 마치 리스트의 대명사
같은 작품으로서 헝가리 민속음악을 소재로한 걸작이다. 만년에 속하는 관현악 작품으로는
[파우스트 교향곡] [단테 교향곡], 12곡의 교향시가 있다. 특히 교향시는 리스트에 의해서
창시되고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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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연주가가 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으나 그 희망을 이루지 못한 채 모차르트와 하
이든의 수제자였던 훔멜(Hummel)의 지배인이었고, 어머니 안나 라거는 음악을 몹시 애호
했던 교양 있는 부인이었으나, 리스트(Liszt)는 출생 후 줄곧 허약한 아이였고 한때는 너무
심하게 앓아 부모들이 관까지 준비할 정도였지만 6살이 되서야 겨우 건강을 찾을 수 있었
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아버지 아담이 리스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
었는데 여섯 살의 어린 리스트가 그 곡이 끝날 때까지 눈동자를 반짝이며 듣고 있더니 그  
날 저녁 식탁에서 그 곡을 끝까지 한음도 틀리지 않고 노래하여 부모를 놀라게 했다. 이튿
날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열흘이 지났을 때 자기 아들이 모차
르트 못지않은 천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아버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어린 프란츠
가 몸이 약하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무리하게 레슨을 시킨 나머지 석 달 후엔 또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만나게 됐다.

천신만고 끝에 병에서 회복된 프란츠는 다시 피아노 즉흥 연주의 포로가 됐다. 그는 악보도
없이 즉흥적으로 너무나 멋지게 피아노를 연주했고 이 소문이 퍼지자 매일 저녁 마을 사람
들이 그의 서재에 모여 이 신동의 연주를 신기한 표정으로 듣곤 했다. 이렇게 하여 헝가리
평야의 복판에 있는 라이딩이란 마을은 어린 소년 때문에 그 언제 보다도 즐거운 마을이 되
고 있었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너무도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여러 마을과 도시로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뽐냈고 소년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이 아이의 장
래를 축복했다.

1817년 가을,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폰 브라운 남작이 에텐브르크에서 있을 연주회에
프란츠를 출연시키고 싶다는 전갈을 해오고 리스트가 여기에 응하자 곧 프로그램이 만들어
졌는데 리스의 피아노 협주곡과 몇 곡의 즉흥곡이었다. 드디어 연주일이 다가왔고 무대 위
에 올라선 프란츠는 이미 첫 소절부터 피아노의 거장으로 청중들을 압도했고 그들은 열화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 연주의 성공으로 에스테르하지 공작의 초대를 받았고 그의 저택에
서 리스트의 독주회가 있던 날 프레스부르크의 귀족이란 귀족은 모두 모였다. 베토벤의 작
품부터 시작된 그 날의 독주회는 귀족들을 감복시키기에 이르렀고 이 소년이 충분한 음악교
육을 받기엔 그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즉석에서 귀족들이 기부금 모금 운동
이 전개돼 즉각 많은 돈이 모아졌다.

이 일이 있은 뒤 1820년(10세)에 리스트의 가족은 빈(Wien)으로 이주했다. 맨 처음 그는
카를 체르니에게 레슨을 받기 위해 찾아갔다. 그의 앞에서 베토벤의 가장조 소나타를 연주
하자 크게 감탄하고 "너는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겠구나"라
고 말했다. 체르니는 한 시간에 1굴덴의 레슨비를 받기로 했지만 12번의 레슨이 끝나고 아
담이 사례를 지불하려고 하자 "아니오. 이런 짧은 기간에 이 정도로 진보를 했는데 내가 무
슨 수고를 했다고 수업료를 받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한편, 화성학과 작곡법은 모차르트
의 라이벌이었고 베토벤의 스승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엘리가 가르쳤다. 이 참을성 많은 노인
은 기악곡과 오페라의 악보 읽는 법을 가르치고 변주곡 만드는 방법, 간단한 소품을 쓰는
일을 가르쳤다.

이렇게 1년 반 동안 두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뒤 1822년 12월에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튿
날 어떤 비평가가 신문에 쓰기를 "우리들 속에 神이 있다"고 흥분했다. 이때만 해도 리스트
는 베토벤을 만나는 일이 평생의 가장 큰 소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 신틀러를 만나 이런
소망을 전달했고 그의 두 번째 빈 리사이틀에 베토벤을 초대하기로 했다. 이 무렵 베토벤은
가난과 귓병 때문에 사람들을 멀리하면서 집안에만 파묻혀서 교향곡 제9번을 명상하고 있
었다. 신틀러가 리스트 소년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베토벤의 표정은 그리 탐탁한 것이 않았
고 그의 연주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도 거절했다. 그런데 리스트의 리사이틀이 열린 4월
13일 밤, 4천명의 청중 속에 베토벤이 앉아 있었다. 연주가 끝난 뒤 베토벤은 무대 위로 뛰
어 올라와서 그를 끌어 앉고 그 얼굴에 마구 입을 맞췄다. 이 연주의 성공으로 프란츠는 일
약 빈의 으뜸가는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 됐고 다시 빈을 떠나도 좋을 만큼 넉넉한 돈도
벌었다. 그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길 희망하고 있었다.

1823년 12월 11일, 리스트 부자는 파리에 도착해 원장인 케루비니를 만났으나 그들이 프랑
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입학이 거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소지한 메테르
니히공의 소개장 덕분에 대여섯 군대의 살롱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줬고 그 결과 오히
려 빈에서보다 큰 음악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사귄 에라르의 주선으로
런던에 가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여기서도 큰 성공을 가졌으며 영국왕 조지 4세는 그를 직
접 윈저성으로 초대하여 "연주가 완전할 뿐 아니라 악상이 풍부한 점에서도 나는 이런 피
아노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이 소년은 크라머나 모셀레스를 앞지를 것이다"라고 격려했
다. 이 무렵 프란츠는 1824년 여름부터 쓰기 시작한 오페라 ‘동 상슈’의 완성을 서둘러서
1825년 10월 17일, 그랜드 오페라(Grand Opera) 극장에서 초연했는데 결과는 실패였다.

이 작품의 실패로 그는 비로소 재능의 남용이 가져온 결과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패가 있은 뒤인 1826년 초 “12개의 연습곡”으로 스스로의 수치를 씻었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그에게 많은 돈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이 무렵 파리 음악원의 라이하 교수에게서
대위법을 배우게 됐다. 연주가로서 탄탄한 기반을 닦은 그는 스위스 등지로 연주여행을 다
니면서 명성과 부를 다 가질 수 있었지만 서서히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에 빠졌고 급기야는
성직(聖職)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갖게 되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성직자가 되겠다고 말한
다. 아버지는 "예술에 속해 있던 사람이 교회에 속할 수는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하고 아들
의 방에 있는 종교서적을 모조리 없애 버렸지만 그는 다시 종교 서적을 사다놓고 열심히 탐
독하는 한편, 아침, 저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일주일에 몇 번씩 단식을 하는 등 신앙생활
에 깊이 빠지게 됐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나머지 어느 날 피아노 옆에 실신해 쓰러지게 됐
고 의사의 권유로 전지요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아버지가 위염으로 중태에 빠
지게 됐는데 결국 1827년 8월 28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리스트는 파리의 모토론가 7번지 아파트에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는데 아침 8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스케줄이 잡혀 있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이때, 마르티냥 내각의 상
공대신인 생 에리크 백작의 딸 카롤리느--까무잡잡한 피부에 가냘픈 몸매의 17살의 처녀
--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됐는데 둘은 어느새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프란츠가 카롤리느
에게 "나는 끝내 참고 기다리겠노라"(시편40편 1절)는 글귀가 새겨진 반지를 주면서 둘은
굳게 결혼을 약속 하게됐다. 그러던 어느 날 백작이 그를 불러 "내 딸아이는 달티고 백작과
곧 결혼하게 됐으니 이젠 레슨을 그만하게"라고 통고했고 리스트는 달랠 수 없는 커다란 교
통을 안고 저택을 물러 나오게 되었다. 그는 또다시 성직자가 되기 위해 성당을 찾아갔으나
바르단 신부의 만류와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번민한 끝에 결국은 모든 레슨을 중지하고
병석에 눕게 된다. 그를 치료한 의사마저도 다시 소생할 수 없으리라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
고 그의 병상생활이 18개월째 접어들자 외국에까지 리스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신문
이 그의 사망기사를 다룰 지경이 됐다. 그러나 그의 친구 크리스티안 우르앙의 우정어린 간
병으로 그의 건강은 서서히 회복됐고 이제는 매일 성당에도 나갈 수 있었고 가난 때문에 레
슨도 다시 시작하게 됐다. 프란츠가 19살 되던 해 여름 프랑스엔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그
혁명의 대포소리에 감동된 리스트는 실로 오랜만에 피아노 뚜껑을 열고 ‘혁명 교향곡’을 작
곡했다.

이때부터 그에겐 정치와 철학의 열병이 시작됐다. 음악이 일순간의 예술이 아닌 사회와 진
리를 위한 영원한 예술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빠진 것이다. 파가니니(Paganini)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제1회 독주회를 개최한 것은 1832년 3월 9일 이었다. 리스트는 그 음악회
를 보러 갔다. 이 음악회에서 그 자신의 음악이 얼마나 유치한 것이며, 저러한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시 모든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이때부터 3년
간 그는 두문불출, 오로지 피아노 연마에만 열중하고 2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나 다시 연주
할 결심을 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소나타와 협주곡이었으며 음악회는 연속적으로 세 번
이 열렸다. 리스트가 받은 두 번의 충격은 그 해 겨울 베를리오즈(Berlioz)의 ‘환상 교향곡’
에서였다. 이 작품의 뼈대가 되는 ‘고정악상’은 그에게 분명한 또 하나의 충격이었을 뿐 아
니라 이를 통해서 표제음악의 방법론을 터득하게 됐다. 세 번째의 충격은 그 무렵 파리에
데뷔한 병약한 청년 피아니스트 쇼팽이었다. 최초의 음향부터 마음을 사로잡힌 리스트는 대
번에 천진난만한 열정으로 쇼팽을 사랑하게 됐다.

드 프라뷔니 백작의 딸 마리 다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용교사인 아브라함에게서 무용을
도나듀에게서 검술, 고티에 사제에게서 신학을 공부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1827년에
기병 대령 사를르 다구 백작과 결혼했다. 백작은 그보다 20살이나 연상이었다. 세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매우 권태로웠다. 1834년 6월 그녀는 유명한 점쟁이 르놀
만양을 찾아갔다. "부인의 인생엔 이제 곧 큰 변동이 일어나겠군요. 그로 인해 부인은 이름
도 바꾸게 될 것이고 그 새 이름은 온 유럽에 크게 명성을 떨칠 것이오. 그리고 부인은 오
랜 세월 고국을 떠나 살 것입니다. 그리고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남성과 사랑하게 될 것입
니다"라는 예언을 듣는다.

리스트가 베를리오즈의 소개로 그녀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구 부인의 미모에 넋을 잃
고 말았다. 그런 리스트에게 조르쥬 상드가 "이성을 찾으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
성관계란 연애가 아니고 유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윽고 1835년 8월 21일 두 사람은 제
네바로 도피 여행을 감행했고 파리는 두 사람의 실종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두 사람은 베르
피유가(街)에 사랑의 보금자리를 폈다. 마리는 매일 매일이 행복했다. 이 무렵 철학자 피리
테가 그들의 벗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 마리가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자 그는 연주회를 열
준비를 했고, 음악회는 많은 귀족들이 모인 가운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연주회를 계기
로 그때까지 두 사람을 비방하던 귀족들이 마음을 돌리게 되었고, 리스트는 음악학교에 시
간을 얻게 됐다. 1835년 12월 8일 밤, 그들 사이의 첫 딸이 태어났다. 아이는 사생아로 출
생신고가 됐다. 리스트는 이때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를 써서 아기에게 선물했다.

이 무렵 마리는 공부에 깊이 빠져 거의 온종일 책과 함께 있었다. 이때 파리에는 탈베르크
라는 피아니스트가 나타나서 리스트는 상태도 안 된다고 큰 소리를 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파리로 가서 세 번에 걸친 대결을 벌였는데 어느 사람이 "탈베르크는 세계 제1의
피아니스트"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탈리아에서 다시 파리에 온 두 사람은 이미 1남 2녀의
부모가 되어 있었다. 리스트는 빈에서 6회의 독주회를 모두 성공시키면서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무렵 그에게 쇄도한 음악회 신청이 600건이나 되었다. 감정,
숙련도, 음악의 심오함, 사상, 의지, 천분(天分), 어느 것도 모두 완성되어 있었고 그는 이미
파가니니와 같은 피아노의 악마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리스트를 신처럼 떠받들고 그의
음악을 듣는 동안은 그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빈 연주를 마치고 20여 년 만에 감격적인 고
국 헝가리에 금의환양 했다. 그는 마치 황제처럼 국민적인 환영을 받았다. 황제는 그에게
귀족 칭호를 보냈고, 그가 작곡한 "라코치 행진곡"에 헝가리 국민은 열화처럼 흥분했다.

헝가리 연주를 마친 뒤 독일 라이프찌히로 가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고 병석에 눕게 됐으나 슈만과 멘델스존의 위로와 격려로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는 다시 여행을 계속해 파리, 런던, 함부르크, 바덴바덴, 본에서 음악회를 열고 큰 성공을
거뒀는데 런던 연주엔 마리가 그를 만나러 찾아온다. 그녀에게 어떤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마리에게 다른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리스트에게 들리기 시작했고 그 역시
마리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가을에 둘은 유감없이 헤어졌고 리스트는
베를린에서 모든 이들을 넉 다운시키는 열정적인 음악회를 열었다.

이때 리스트는 여배우 샬로테와 나이가 57세나 된 은퇴한 귀족부인 베티나 폰 아니므와 깊
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 뒤 1842년의 봄을 러시아에서 지내면서 또 한번 연주가로서의 위
대한 승리를 거뒀으나 왠지 마음은 공허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생활은 점점 더 호사스러워
졌다(마차, 수염 다듬는 하인, 넥타이 하인 등). 이 무렵 마리는 모친의 별세로 거액의 유산
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다니엘 스탄이란 필명(筆名)으로 단편소설 한 권과 몇 개의 평론을 출
판한 문필가로 변신해 있었다. 당시, 리스트는 아일랜드系의 무용가 론자 몬테스와 열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몇 주 안 가서 리스트는 그녀에게서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고 결
국 호텔 방문을 몰래 잠그고 뺑소니를 쳤지만 이 소문이 마리에게 전해지자 그녀는 헤어질
구실을 드디어 잡게 됐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두통의 편지가 오고가고 그리곤 마치
추수 때의 황량한 들판처럼 둘의 관계는 쓸쓸하게 종말을 고했다.

마리와 헤어진 리스트는 곧 스페인 여행을 시작하여 페레네에 머물었고 거기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 도시는 그의 첫사랑인 카를리느가 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연주당일 그는 둘째
줄에 앉아있는 그녀를 곧 알아 봤다. 다음날 답례로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놀랍게도 그녀
는 16년간이나 그를 그리워했고 육체는 신비스러운 처녀의 몸이었다. 자신의 추악했던 생활
에 비해서 카로리느의 그 참된 연정에 리스트는 크게 감동하고 가곡 ‘나는 노을처럼 사라지
리라’를 작곡하고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30년 뒤 그녀가 죽었을 때 리스트는
이렇게 썼다. "그녀야말로 지상에 있어서 신에게 축복 받은 가장 순결한 계시의 하나였습니
다. 너무도 많은 기독교도의 순결과 체념을 가진 그녀의 기나긴 고뇌는 이 세상의 것이 아
닐 만큼 그녀를 성장 시켰습니다. 지상의 방황으로부터 그녀를 불러들인 신에게 축복이 있
으리라. 그리고 그녀에 의해서 우리가 신에게 믿어지는 은혜를 얻게 해 주소서."

스페인을 떠나 본으로 온 리스트는 1845년 8월 12일부터 열리는 베토벤 기념비 제전의 사
흘 째 음악회에서 그의 위대한 교향시의 첫 작품인 '칸타타'를 지휘했다. 진정한 표제음악의
역사가 처음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또 다시 작곡가로서의 위대한 승리를 거둔 뒤
1841년에 처음으로 바이마르를 방문했다. 여기서 리히노프스키 공작 부인을 위한 세 번의
연주회를 가졌고 부인은 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다. 이 반지는 독일에 그를 묶어두
는 끄나풀이 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바이마르에 갔을 때 부인은 일련의 기획음악회 계획을
설명하고 그 모든 지휘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를 묶어두기 위한 조치였다. 리스트는
이를 쾌히 승낙했다. 1844년부터 그는 지휘를 시작했다. 지휘봉도 없이 지휘하는 그를 두고
청중들은 웃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사람이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인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뒤 그는 바이마르에 정착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됐으나 그의
생리로 보아 그가 여기서 살기 위해서는 이 도시를 사랑의 도시로 만들지 않으면 안됐다.

그가 예고된 독주회를 열었던 밤 청중 속에 앉아있던 28세의 비트겐스타인 공작부인의 영
혼을 사로잡았다. 부인이 자선기금으로 백루볼을 내 놓는데 대한 답례로 이튿날 리스트는
부인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녀에겐 10살의 딸과 별거 중인 러시아 사람 남편이 있는데, 출
신은 폴란드 였다. 그는 3만 명의 농노를 거느린 대 지주의 딸이기도 했다. 열흘 뒤 두 사
람은 그녀의 호화로운 별장으로 갔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4개월간 함께 생활했다. 부인은
남편과의 이혼 수속을 밟기 시작하고 둘은 바이마르에 정착할 계획을 세웠다.(리스트 35세,
부인28세). 이듬해 4월 그는 행복한 기분으로 ‘헝가리 광시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
마 뒤 드레스덴에 혁명이 일어나고 이 와중에서 추방령을 받은 바그너가 리스트에게 와서
자신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리스트와 공작부인의 도움으로 바그너는 스위스까지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다. 이후 리스트는 바그너를 성심을 다해 후원하는 한편 많은 작품을
지휘하고 평론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리고 '12곡의 교향시' '소나타 B단조' '파우스트‘ 교향곡'
'대 미사곡' '단테 교향곡', 기타 가곡 등을 작곡하며 그의 생애 중 가장 많은 곡을 썼다.

이 무렵 그에겐 한스 폰 뷜러라는 제자가 있었다. 리스트는 이 제자를 자기 집에 기거시키
면서 피아노를 가르쳤고 그 결과 제1급의 피아니스트가 됐고 베를린 음악원의 최초의 음악
교수가 됐다. 한편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딸들을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
는 한편 그들이 음악교육을 뷜로에게 맡겼다. 딸들은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보여 뷜로를 놀
라게 했는데 특히 둘째 딸 코지마의 재주가 뛰어났다. 이때까지 리스트와 공작부인은 법적
인 문제의 해결을 기다리며 따로 살고 있었다. 여전히 황제는 부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
았기 때문이다. 부인은 서로 같이 살지 못하는 사실을 몹시 슬퍼하고 있었지만 리스트는 "
괴테는 자신의 정사를 정당화시키는데 20년이나 걸렸다."며 별로 괘념치 않았고 여전히 정
력적인 연주여행을 계속했고, 슈투트가르트에선 마리 칼레르기스라는 여인과 달콤한 사랑을
즐기기도 했다.

1857년 8월 18일, 코지마와 뷜로가 결혼했다. 첫딸은 10월 22일에 결혼했다. 그러나 이듬
해 9월부터 리스트와 부인은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오직 작곡과 제자들과의 모임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부터 공작부인은 서서히 종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그가 지
휘자로 있는 바이마르 극장의 지배인과 사이가 나빠져 악단을 그만둘 생각을 했다. 뿐만 아
니라 사소한 일로 바그너와의 사이도 벌어져 그의 편지를 받지 않을 정도였다. 후일 바그너
는 자기가 행한 일을 몹시 후회하고 그에게 사죄 했지만 리스트는 냉담했다. 리스트는 어느
새 48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생일을 홀로 지냈다. 그해에 아들이 병으로 숨지자 리스트의
마음은 더욱 공허해 졌다. 1860년 3월, 공작부인의 이혼이 선고돼 모처럼 둘은 기뻐했으나
후르다 주교가 이를 반대했기 때문에 부인은 이 문제를 교황청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나 이일 역시 1년이 넘도록 해결될 기미가 없었다. 마침내 리스트는 지쳐 버렸다. "나의
생애는 긴 방랑의 여정에 불과하다. 내게는 연애 이외엔 아무 것도 적합한 것이 없었다. 그
런데 이제껏 내 사랑은 슬프게도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나 신에게 감사를 드려야 겠다. 나
는 결코 사악한 사랑을 해본 일이 없다. 그때마다 나는 신중 하려고 애썼다."

리스트는 26년 만에 파리로 여행하여 헤어진지 16년 만에 마리를 만났으나 그녀는 역시 비
트겐스타인 부인에 견줄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그
너의 방문을 받고 그가 특사를 받고 곧 독일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시인 보
들레르를 소개받고 그와 친구가 됐다. 여섯 나라의 여행 끝에 돌아오니 로마에서 날아온 소
식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그는 바이마르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바그너의 방문
을 받고 비로소 그와 화해했다. 1861년 8월, 교황이 공작부인의 간청을 허락했다는 기별이
왔다. 드디어 공작부인과 리스트가 정식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결혼은 10월 22일
로마에서 열리기로 결정됐다.(50세 생일 2일 뒤) 10월 21일, 둘은 같은 아파트에서 오래간
만의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어떤 신부가 이들을 찾아온다. 공작부인
이 위증을 했기 때문에 비트겐스타인가(家)의 요구에 의해 교황이 종전의 판결을 무효처분
했다는 통고를 했다. 15년간의 희망과 노력은 완전히 깨져 버리고 말았다. 부인은 자기와는
달리 리스트에겐 더 이상 정식 결혼에 대한 욕망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교회의 그 절망적
인 선고도 그에게 그리 큰 충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리스트는 이때부터 교
회 음악에만 전념하게 됐다. 부인은 다시 열정적인 집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첫딸이 아
기를 낳다가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리스트는 몬테 마리오에 있는 마돈나 델 로자리오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날마다 부인
에게 편지를 쓰고 ‘성 엘리자베스’의 작곡을 계속했다. 이제야말로 영원한 생명 속에서 그
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가끔 교황 비오 9세가 수도원을 방문하고 리스트와
교회음악에 관한 토론을 즐겼다. 잠시 칼 수루에와 뮌헨을 방문하고 돌아온 리스트는 자기
에게 성품을 주기를 추기경에게 청했다. 1865년 4월 22일, 그는 승려가 됐다.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울었다. 몇 해 뒤 파리에서 ‘대미사곡’을 지휘하고 났을 때 마리가 찾아와서
참회록을 쓰겠다는 말을 듣고 이를 만류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야말로 둘의 인연이
완벽하게 끝난다는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런데 1861년, 25년의 연령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밀한 우정을 쌓아온 한스 폰 뷜
로와 바그너 사이에 큰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그너를 흠모해 온 코지마와 그녀의 미모
에 끌린 바그너가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리스트는 너무나 자기를 닮은 딸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사위 뷜로를 위로하는 한편 바그너를 만나 그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정작 바그
너를 만나자 아무 말도 없이 대좌하고 있다가 "미를 창조하는 사람들 사이엔 부디 모든 것
이 용서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바그너의 외로운 얼굴을 보고 그를 비난할 말이 더 이
상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돌아온 그는 뷜로에게 "나는 센트 헬레나의 나폴레옹을 보고 왔
다"고 말할 뿐이었다. 뷜로는 마약을 먹어야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리스트는 딸과 바그너
와 의절했다. 이후 매년 수개월을 바이마르에서 지냈고 1869년부터는 아예 정주 했다.

이때부터 그는 수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생활했다. 그는 무보수로 그들을 가르쳤다. 그 무
렵 자니나라는 여성이 끈질기게 리스트에게 구애했으나 그는 기도를 하며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자니나는 리스트를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며 떠들고 다녔다. 이 문제가 간신히 잠잠
해지자 이번엔 올가라는 귀족의 딸이 리스트에게 집요하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결국 리스트
는 굴복하고 그녀를 받아들였고 그녀를 통해서 새로운 창작의 힘을 얻기도 했다. 이때부터
공작부인과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철저히 그녀를 경원하기 시작했고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무시했다.

1872년 10월 22일, 바이로이트 극장의 초석(礎石)이 놓여졌다. 바이로이트에 도착한 그는
다섯 손자와 바그너, 코지마의 영접을 받았고 리스트를 위해 기초 공사가 진행중인 별장도
둘러보았다. 이때부터 해마다 바이로이트를 방문하게 됐고 빈에 설립된 리스트 협회가 주최
하는 리스트 음악제에도 참가했다. 1878년 성탄미사 때, 그는 진심으로 비트겐스타인 부인
을 위해 기도하고 “7개의 성례” “메피스토 왈츠”를 썼다. 그러나 부인은 20년 이상 일체 외
부와의 접촉을 끊고 집필에만 몰두했고 리스트가 찾아와도 10분이나 그를 기다리게 했다.

리스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의사는 수종이라고 진단했다. 1881년 7월, 바이마르
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뷜로와 그의 딸 다니엘라가 간호를
맡았다. 이 동안에도 그를 방문한 보로딘을 만나 그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 해 10월, 그는
70회 생일을 맞았다. 도처에서 낭비한 그는 몹시 가난해 있었다. 1883년 2월 13일 아침,
바그너의 사망 뉴스를 들었다. 1884년 봄, ‘성 스타니슬라우스의 전설’ 중 일부를 완성시키
고 대중 앞에서 지휘했다. 금요일부터는 헛소리를 했다. 31일 그는 ‘트리스탄’이라는 외마
디를 외치고 숨을 거뒀다. 온 시가는 국기와 만장으로 뒤 덮였다. 그의 유품은 사제복, 7장
의 손수건과 옷가지 뿐. 장례식에서는 그의 희망에 따라 연설도 음악도 없었다. 비트겐스타
인 부인은 그때부터 침대에서 꼼짝 않고 누워 있다가 1887년 3월에 리스트의 뒤를 따라 세
상을 하직했다.

◈ 리스트의 묘비명
“내 관을 운구할 땐 될 수 있으면 밤으로 해주기 바란다. 내 관을 옮기는 사람은 두 셋이면
족하다. 이젠 무슨 일을 하거나 남의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된 몸인데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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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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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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