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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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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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벨저 뫼스트(Franz Welser-Möst, 지휘자, 1960- )


◈ 유투브 감상
Haydn : Symphony No.98 in B Flat major
Wien Philharmoniker
http://youtu.be/wASHLEuLbzA

오스트리아 린츠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18살 때 교통사고
로 손가락을 다쳐 지휘 전공으로 방향을 틀었다. 본격적인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1985년에 자신의 멘토인 리히텐슈타인의 남작 안드레아스 폰 베닝젠
(Andreas von Bennigsen)의 충고에 따라 자신의 풀 네임 Franz Leopold
Maria Möst에서 레오폴드 마리아를 빼고 프란츠가 성장했던 도시 벨스(Wells)
를 미들 네임으로 새로 넣어서 오늘의 이름 Franz Welser-Möst로 바꿨다.    
1986년(19세), 베닝젠 남작의 아들로 입적했다. 프란츠를 양자로 입적시키기
이전부터 이미 이 젊은이의 재능을 알아본 베닝겐은 프란츠를 대지휘자로 만
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지원 덕분에 1979년 카라얀 국제 지휘 콩
쿠르 결선에 진출했고, 1985년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지휘자로 데뷔할 수 있
었다.

이듬해엔 런던 필을 지휘했고, 1988년엔 스위스의 무직콜레기움 빈테르투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1989년엔 세인트 루이스 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 미
국에 데뷔했고, 내친김에 애틀랜타, 보스턴, 뉴욕, 시카고 교향악단을 지휘했
고, 1990년엔 클라우스 텐슈테트의 후임으로 런던 필 수석지휘자로 취임했다.
30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1992년에 베닝젠의 전처인 안젤리카(Angelika)와
결혼하면서부터 오케스트라의 오너인 런던 시가 프란츠를 왕따 시키기 시작했
다. 양부(養父)의 젊은 아내, 즉 법적으로는 어머니가 되는 여인과 결혼한 사실
을 런던 상류사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런던 시는 프란츠에게 “솔직히
최악보다 더 나쁜 뫼스트, Frankly Worse than Most”라는 별명까지 붙일 정도
였다. Franz를 Frankly로, Welser를 Worse로 바꿔서 비아냥거린 별명이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취리히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지냈는데, 그 기간 동안
바그너의 ‘반지’ 전곡 등 새로운 연출로 27개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그 결
과 이 오페라단이 유럽 정상급 수준으로 격상되었고, 프란츠 자신도 오페라 지
휘자로서 눈부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2000년에 음악감독직은 사임했지만
2005년에 이 오페라단의 총감독으로 다시 돌아가서 2011년까지 재임하는 것
으로 계약했다. 그러나 2008년에 사임했다. 빈 국립 오페라가 새로운 총감독
으로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외국인이 리더로 있던 빈 슈타츠오퍼가
비로소 자국인을 새로운 리더로 영입한 이 일은 당시 세계음악계의 빅뉴스였
다.  

한편, 프란츠는 2002년부터 클리브랜드 교향악단의 음악감독도 겸하고 있었
다. 처음 계약은 5년간이었지만 두 번에 걸친 연장 끝에 2018년까지 재임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2010년 9월부터 빈 국립 오페라 음악총감독의 임
기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 빈 슈타츠오퍼의 사령탑을 맡기는 1964
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사임한 후 46년만의 일이다. “나는 뼛속까지 오스
트리아인이다. 내게 독일권 음악은 자연스러운 모국어와 같다”고 말하면서 임
기를 시작했다. 이때 이 오페라단의 최고경영자인 총감독으로 도미니크 메이
어(Dominique Meyer)도 새로운 임기를 시작했다. 메이어는 파리 오페라 극장
장과 스위스 로잔 오페라 극장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러나 2014년 9월 5일,
프란츠는 음악총감독직에서 물러나며 이번 시즌에 예정된 모든 지휘 스케줄
을 취소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프란츠는 사임의 이유로 메이어 총감독과의 의견 충돌을 꼽았다. 오페라단의
예술적 방향에 관해 오래 계속된 의견 차이가 있었고 몇 차례 토의를 했으나
의견 차이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임이 매우 고통스러운 결정이
었다며 "이에 따른 결과는 받아들이겠다"고 덧붙였다. 메이어 총감독은 홈페이
지(http://www.wiener-staatsoper.at)를 통해 이날 아침 벨저-뫼스트 음악감독
이 제출한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이 두 사람은 2010년 9월 동시에 취임해
4년간 함께 일해 왔다. 메이어 총감독은 "이는 당연히 큰 손실이며, 프란츠 벨
저-뫼스트를 예술가로서, 또 음악감독으로서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
적으로도 슬프다"고 말했다. 메이어 총감독은 벨저-뫼스트가 이번 시즌에 베르
디 '리골레토'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엘렉트라'의 새 프로덕션 초연 등 적어
도 34회 공연을 지휘하도록 예정돼 있었다며 적절한 대체 지휘자를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벨저-뫼스트와 빈 슈타츠오퍼 사이의 계약 기간은 2018년
까지였다. 빈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 의견 충돌 등으로 물러나는 일은 과거
에도 자주 있었다. 말러(1897∼1907년 감독), 카라얀(1956∼1964년 예술감
독), 로린 마젤(1982∼1984년 총감독), 아바도(1986∼1991년 음악감독)가 그
랬다.

프란츠가 빈 국립 오페라를 처음 지휘한 것은 1987년이었다. 클라우디오 아바
도가 로시니의 ‘알제리의 이탈리아 아가씨’를 지휘할 예정이었다가 갑작스러
운 사정으로 프란츠에게 이 작품을 지휘할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나
서 10여년 만인 2006년에 이 오페라단에 다시 와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
졸데’를 지휘했다. 그해 12월엔 슈트라우스의 ‘아라벨라’를 지휘했다. 그리고
이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서 프랑코 제피렐리가 연출한 ‘탄호이저’
를 첫 작품으로 지휘했다. 이후 ‘돈 죠반니’ ‘휘가로의 결혼’ ‘카타 카바노바’
등을 지휘했다.

프란츠는 빈 악우협회 합창단인 Wiener Singverein의 명예회원이고, 2011년과
2013년의 ‘빈 필하모니커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1995년, 런던 필 내한공연
때 소프라노 조수미와 협연하면서 한국 팬들을 처음 만났다.

◈ 음반
런던 필 음악감독 시절에 EMI와 계약하고 음반작업을 시작했다. 1996년에 발
표한 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의 교향곡 제4번은 그라모폰의 ‘최고의 지
휘 부문’상을 받았고, 브루크너의 미사 제3번과 테 데움, 코른골트 앨범은 그
래미 어워드 ‘최고의 클래식 앨범’ 후보작에 올랐다. 취리히 오페라와도 상당
수의 CD와 DVD를 발표했다. 2008년엔 EMI가 프란츠의 초기 앨범들을 모아서
8장의 CD 세트를 발매했다. 2007년엔 도이체 그라모폰이 클리브랜드 교향악
단이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발매했고, 바그너의 가곡 앨범(솔로/ 캐나
다 소프라노 메아샤 브루에거고스만, Measha Brueggergosman),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과 8번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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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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