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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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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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지휘자, 작곡가, 1864 뮌헨-1949 가르미슈)




◈ 사진
위 : Max Liebermann이 그린 초상화, 1918년 제작
아래 : 슈트라우스 가족

◈ 유투브 감상
Richard Strauss : Horn Concerto Op. 11
독주 : Radek Baborak
지휘 : Charles Olivieri-Munroe
National Philharmonic of Russia
http://youtu.be/SS8ey4g6jYo

Richard Strauss : Also sprach Zarathustra op.30
L'Orchestra Nazionale di Santa Cecilia, Roma
지휘 : Antonio Pappano
http://youtu.be/o5bU7ibqGko

슈트라우스는 가난하고 생전에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음악가와는 거리가 멀다. 금수저 물
태어나 부모와 친척, 여러 단체의 지원과 협력을 받아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고,
작곡가로 또한 지휘자로 초반기부터 성공과 인기를 누렸다. 85년을 살았으니 이 또한 많은 작곡
가들과 비교되며, 거의 70년 동안 창작 활동을 했다. 이 기간에 독일의 사회와 정치 체제가 여러
번 바뀌었듯이 음악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슈트라우스가 청년기인 1882년에 바그너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의 작사 작곡을 마쳤
으며, 바그너의 적수로 간주되는 브람스는 1885년에 제3, 4번 교향곡을 완성했고, 1909년엔 쇤
베르크가 무조음악의 효시라는 <3개의 피아노 소품 op. 11>을 발표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말
하면, 바그너에 의한 정통 오페라 프레임의 파괴(악극)와 반음계 사용의 과감한 확대, 브람스의
고전주의에 대한 수구적 태도, 쇤베르크에 의한 조성을 파괴한 12음기법과 음렬주의 출현 등 서
로 너무나도 다른 음악언어의 혼재와 변화가 있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초기엔 진보적인 작품을 쓰는 작곡가로 알려졌는데 오페라 <살로메>와 <엘렉트라>
를 정점으로 해서 그 이후엔 조성 음악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후대에 '낙후한 작곡가'
또는 ‘바그너-브루크너 전통의 계승자’로 평가되었다. 12음기법과 음렬주의를 사용한 제2빈
(Wien)악파를 지나 2차대전 이후 전통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던 다름슈타트
(Darmstadt)악파의 등장으로 슈트라우스 음악은 1980년대까지도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별 주목
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10년대에 발생한 조성의 파괴와 여기에 수반된 지나친 난해함과 급진성 때문에 대중들
과 유리되어 있는 음악적 상황이 지속되자 1970년대부터 이에 대한 반동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1960년대 전위음악을 이끌어 가던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가 <히로시마 희생자에게 바치는 애가>
<성 루카 수난곡> 같은 작품에서 전통적인 화성과 아방가르드적 기법을 융합시킨 새로운 조성
텍스처를 사용하면서 슈트라우스는 물론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또한 조성을 바탕으로 한 많은 현대작곡가들의 작품이 새로 발견되면서 제2빈악파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결정적 영향을 모든 작곡가에게 끼친 것은 아니었다는 판단을 내리
게 되었다.

슈트라우스가 죽은지 70여년이 지난 지금, 다행스럽게도 전위니 전통이니 하는 범주를 떠나 다
원론적으로 각 작곡가의 음악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 덕분에 19세기 후반부터 20
세기 중반에 이르는 격동의 유럽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슈트라우스의 일생은 큰 호기심과 흥미를
불어 일으키고 있다.

아버지 프란츠(Franz)는 뮌헨 궁정관현악단에 소속된 유명한 호른 주자였다. 음악의 기초를 어머
니에게 배웠고, 삼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작곡법은 뮌헨 궁정악단의 악장으로 있던 마이어
(Friedrich Wilhelm Meyer) 문하에서 공부했다.

슈트라우스 최초의 작품은 <크리스마스 축가>로 1870년 6살 때 일이다. 악보는 그가 그렸지만
아직 글씨를 작게 쓸 수 없어서 가사는 그의 어머니가 대신 써 넣었다고 한다. 그 뒤 <쉬나이더
폴카 Schneider Polka>, 피아노 소나타, 가곡, 호른과 클라리넷을 위한 곡, 합창곡을 썼고, 마
이어에게 관현악법을 배운 후로는 관현악곡도 쓰기 시작했다. 2년 뒤에 슈트라우스 아버지는 피
아노곡 <쉬나이더 폴카>를 관현악으로 편곡해서 친구와 친척으로 구성된 하르브니 악단
(Harbni-Orchester)과 함께 연주해서 슈트라우스 작품 첫 초연도 성사됐다.

이토록 슈트라우스는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1875년부터 1896년
까지 그의 부친이 30여명의 아마추어 음악가(대부분 고급 공무원임)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지휘
하면서 주로 고전파와 낭만파 음악가의 교향곡을 연습했는데, 이런 환경을 통해서 슈트라우스는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악단의 연주로 16세 때 자기 작품 <가보
트>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1882년 가을 뮌헨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철학, 미학, 미술사였다. 이보다 두 달 전 7월엔 아버
지와 바이로이트에 가서 바그너의 <파르지팔> 초연을 봤고, 그 무렵 자신의 <13개의 금관을 위
한 세레나데 op.7>이 드레스덴에서, 라단조 바이올린 협주곡이 빈에서 연주되면서 비로소 음악
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슈트라우스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기 전해인 1881년 3월(17세)에
작곡가로서 공식 데뷔를 했었다.  그의 라단조 교향곡이 뮌헨 오데온 회관 정기연주회에서 궁정
악장 헤르만 레비(Hermann Levi)의 지휘로 연주된바 있었다.

그의 초기의 작품에는 멘델스존과 슈만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16세 때 지휘자이자 평론가인 한
스 폰 뷜로와 만났고 그를 통해서 바그너의 작품을 알게 되었고, 파르지팔 초연을 보고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한편, 뷜로는 리하트트 슈트라우스의 초기 작품들을 지휘했고 호른 협주곡 제1번
의 연주 때(1885)는 독주자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를 초청했었다.

같은 해 슈트라우스는 뷜로의 추천으로 마이닝겐 궁정악단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슈트라우스가
마이닝겐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기간이었다. 악단의 제1 바이올린주자이면서 작곡
도 하고 있던 알렉산더 리터(Alexander Ritter)를 만나 작곡가로서 결정적 전환을 했기 때문이
다. 리터는 바그너의 조카사위였고 학창시절부터 뷜로의 절친이었다. 그는 젊은 슈트라우스에게
리스트와 바그너의 작품과 저서를 소개하고 예술사에서 그들의 음악이 갖고 있는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보수적인 가정교육으로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상당한 편견을 가졌던 슈트라우스는 이런
계기를 통해서 리스트와 바그너의 미학적 주장에 눈을 뜨게 되었고 전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즉
소나타 형식은 베토벤에 의해 극한까지 확장되어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잃었으니 새로운 길을 모
색해야 하는데 “시적인 표상이 곧 외형을 형성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리스트의 주장을 받아
들여서 이후 슈트라우스의 관현악 작곡에 길잡이로 삼았다.

1886년, 이탈리아의 베로나, 볼로냐, 로마, 나폴리, 피렌체를 여행했는데 교향 환상곡 <이탈리아
로부터>는 이 여행의 열매였다. 겉으로 보아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과 유사한 작품인데, 리스트의
미학적 원리에 따른 최초의 시도였다. 초연은 1887년 3월 뮌헨에서 슈트라우스의 지휘로 이루어
졌다. 이어서 최초의 교향시 <맥베트 Macbeth op. 23> 작곡에 착수했다. 이 곡은 마이닝겐 극
단이 공연한 동명의 섹스피어 희곡에서 크게 감명 받아서 작곡하게 되었는데 뷜로의 충고로 개정
해서 1888년에 완성했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후에 빈 오케스트라의 제3지휘자가 된다. 그곳에서 3년 정도 머무는 사이
에 <맥베드>와 특히 관현악곡의 영역에서 그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돈환 Don Juan>이라는
두 곡의 새로운 교향시를 작곡했다

1889년 뮌헨을 떠나 바이마르 궁정악장이 되었다. 지휘자 생활은 별로였지만 작곡은 꾸준한 성
과를 냈다. 바이올린 소나타 op.18, 아돌프 폰 샤크(Adolf Friedrich von Schack)와 페릭스 단
(Felix Dahn)의 시에 곡을 붙인 독일가곡(op.19, 21, 22), 대규모의 교향시 <돈환>을 완성했다.
니콜라우스 레나우(Nikolaus Lenau)의 시에 근거를 둔 이 교향시에 슈트라우스는 처음으로 이
해를 돕기 위한 서문을 썼는데, 19세기에 크게 유행했던 주제, “여인의 사랑을 통해 구원 받는
것”을 갈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죽음과 변용 Death and Transfiguration>은 1889년에 작곡했다. 그러나 중병을 얻어 수개월
동안 활동을 중단했다가 쾌유되자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곳에서 최초의 오페라 <군트
람 Guntram>의 초고를 작성했다. 사실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작품에 대한 엄청난 경외심 때문에
오페라 작곡에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게다가 바그너 영향 때문에 오페라 작곡가는 반드시 대본
까지 직접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같은 문학적 소
질을 갖지 못했다.

슈트라우스는 중세 수도원 수사 <군트람>을 소재로 한 이 오페라를 빈의 한 신문(Neue Freie
Presse) 기사에서 보고 대본작업을 시작했다. 1888년 3월에 시작해서 5년 뒤 1893년 9월에 완
성한 <군트람>은 바이마르에서 다음해 5월에 초연했지만 실패했다. 당시의 궁정악단 상황으로는
무리였던 대규모 관현악단을 요구하는 오페라인데다 연주하기도 너무 까다로운 부분이 많은 탓이
었다. 그 후 다른 도시에서 무대에 올려 보려는 시도는 모두 좌절되고, 뮌헨 공연(1895)은 성사
됐지만 이것마저 큰 실패를 봤다. 이 악극이 다시 상연된 것은 45년 후인 1940년 바이마르에서
였다.

189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탄호이저>를 지휘했고, 그 후 뮌헨에 제1지휘자로 부임해서 그
곳에 1898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이 시기에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동키호테>를 작곡했다. 이 세 곡의 표제작품에서 폴리포니에 대한 그의 독자적
인 감각이 멋지게 꽃을 피웠다.

개인적으로 뮌헨 시절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친구이자 최초의 슈트라우스 전기를 쓴
(1911년) 막스 슈타이니처(Max Steinitzer)에게서 일생을 반려할 파울리네 데 아나 (Pauline de
Ahna)를 소개받았다. 슈트라우스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파울리네가 대단한 가창력을 갖췄
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바이마르로 갈 때 그녀를 데리고 갔다. 파울리네는 곧 궁정극장의 독창자
로 활약했고, 후에 슈트라우스 가곡 해석의 권위자로 이름을 떨쳤다.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 생
애에 단 한명의 의미 있는 여인이었다. 이로써 그는 행복한 가정생활도 누린 음악가가 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1947년에 파울리네를 만나 것과 그녀의 뛰어난 가창 능력
에 대한 찬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1898년, 베를린의 프로이센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자전전 관현악곡 <영웅의 생애>를
완성했다. 이 작품에서 감정이 풍부한 그의 관현악법은 절정에 이르렀다. 독일적인 것을 이해하
려고 노력하던 프랑스 출신 비평가 로망 로랑 (Romain Rolland)은 <영웅의 생애>를 듣고 실제
로 누가 이 작품에 등장한 영웅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를 찾아가 물었는데, "작품에 바
탕이 되는 줄거리는 있지만, 그냥 한 영웅이 적과 싸우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
족하다"는 대답을 듣는다. 끊이지 않는 오해를 줄이기 위해 환상변주곡 <동키호테>의 목차를 나
중에 마지못해 발표했듯이 음악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야 할 교향시가 문학화 될까봐 크
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슈트라우스의 두 번째 오페라 <꺼진 불 Feuersnot>은 바그너를 향한 새로운 회귀를 나타내는데,
1901년 드레스덴에서에서 초연되었고, 다행하게도 초연도 성공해서 그의 희망에 부응한 작품이
되었다. 특히 처음 두 편의 오페라가 슈트라우스 자신의 대본으로 작곡됐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
할 만한 일이다. 1843년, 라이프치히에서 발행된 프랑드르 사람의 전설 모음집에 나오는 <아우
데나르데의 꺼진 불>을 읽고 좋은 소재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직접 대본을 썼다. 이 전설의 내용
은 대략 다음과 같다.

♣ 한 어린 하녀가 창 밖에 있는 구혼자를 광주리에 실어 자기 방으로 끌어 올리다가 도중에 중
단했다. 공중에 매달려 있게 된 그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한 늙은 마술사는
징벌로 그 도시의 모든 불과 빛을 꺼 버렸다. 그녀는 옷을 벗고 탁자 위에 올라서야 했고 모든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녀 등에서 튀어 나오는
불꽃으로 장작과 등불을 다시 점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가사를 담당한 에른스트 폰 볼초겐(Ernst von Wolzogen)은 12세기경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뮌
헨의 당시 상황에 맞추어 각색해서 줄거리에 시사성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진행되는 내
용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즉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바이에른 사람들 특유의 우락부락한 언
어까지 거리낌 없이 사용해서 이 오페라는 당시 큰 인기를 모았다. 각본에 걸맞게 슈트라우스는
군데군데 바그너 음악과 바그너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前作 오페라 <군트람>을 인용했지
만 그의 음악 양식이 뚜렷이 드러난 작품이다. 뮌헨에서 전통적으로 맥주 마실 때 부르던 노래
곡조를 수용했는가 하면, 슈트라우스가 약 10년 후에 쓰게 되는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자주
나오는 월츠 리듬도 썼고, 바이올린과 첼로 독주를 끼어 넣는 등 관현악기의 특별한 취급으로 슈
트라우스 특유의 음악적 어법과 무지개 빛깔 음색이 완연하다.

초연은 1901년 11월 드레스덴에서 오스트리아 지휘자 에른스트 폰 슈흐(Ernst von Schuch)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고, 베를린, 빈, 뮌헨에서도 상연되었다. 음란하거나 성애를 예찬하는 가사도
포함하고 있는 이 오페라는 엄격한 검열청의 관리를 받고 있던 빈이나 베를린에서 문제가 되었
다. 베를린에서는 각본을 수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황후가 불쾌한 반응을 보이자 일곱 번 상연 후
막을 내려야 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작품으로 슈트라우스가 오페라 작곡에 맛을 들였다는 사실
이다. 이후그는 오페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한편 작곡가로서의 국제적인 명성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04년 뉴욕에서 <가정
교향곡>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는데, 이 교향곡은 그의 교향적 자서전 가정편에 해당된다.
1905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슈트라우스는 <살로메 Salome>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했다. 이 작
품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프랑스어로 쓴 매우 대담한 희곡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새로운 창작물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살로메와 같은 획기적인 작품은 많은
사람을 어리둥절케 하였다. 그래서 이 오페라의 독창성과 시대적 중요성을 간파한 지휘자 구스타
프 말러나 아르투르 니키쉬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스캔들로 간주하거나 곧 사라져 버릴 오
페라라고 단정한 사람도 많았다. 평소에 호의적이던 코지마 바그너도 슈트라우스가 몇 군데 피아
노로 연주하자 한마디로 광란이라며 일축했고 초연 삼주 후엔 그녀의 사위인 하이델베르크의 교
수 헨리 토데(Henry Thode)가 베를린의 한 강연에서 슈트라우스가 성도착증을 묘사함으로써 신
성한 음악을 모독했다고 항의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 벌써 국내외 10여개 극장에서 이 오페라를 채택함으로써 슈트라우스는 오페라 작곡
가로서 확고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0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토스카니니가, 토리노
에서는 슈트라우스가 지휘했고 이어서 나폴리, 브뤼셀, 파리 등지에서 살로메가 상연되었는데 종
교적인 문제로 어디에서나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빈에서는 피플(Piffl) 주교와 까다로운
서신 왕래 후 1918년에야 연주될 수 있었고, 뉴욕에서는 청교도들의 항의로 초연 후 중단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낙천적인 결말이 나는 조건으로 상연허가를 내렸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상연할 때는 작품 끝에 동방박사들의 출현을 예시하는 샛별을 등장시켰다.

이후 슈트라우스는 후반생의 거의 전부를 극장음악에 바쳤고 이 분야에서 20세기 전반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가 되었다. 오페라 <엘렉트라 Elektra>에서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이 쓴 비극을 다룸으로써 전설적 리얼리즘의 흐름을 추구했다.

엘렉트라 이후,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자신의 관심사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었다고 확신한 호프만
스탈은 남은 30년간을 슈트라우스를 위해서 대본을 쓰는 일에 바쳤다. 이 같은 협력자를 얻었다
는 사실은 슈트라우스에게 굉장히 유리한 것이었다. 아울러서 그때까지의 오페라에는 없었던 강
한 힘을 엘렉트라에서 달성한 슈트라우스는 <장미의 기사>에서 놀라운 방향전환을 했다. 이때부
터 그는 줄기차게 극복하려고 노력한 바그너의 영향권에서 떠났다. 낭만파가 아니라 그 이전으로
돌아가서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에서 더없이 완벽하게 환기시킨 빈의 성격적 오페라의 전통
으로 되돌아갔다.

<장미의 기사>에서는 신바로크양식을 탐구했는데 이 수법은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에서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 오페라에서는 장르의 혼합((희극과 정가극, 즉 오페라 코미크와 오페라 세리
아))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약 30명으로 구성된 작은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작곡한 이 작품의 토대가 된 것은, 호프만스탈에 의해서 독일어로 번역된 몰리에르의 <평
민귀족>을 위해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부수음악이다. 이 오페라는 본래 극의 마지막에서 거행되는
터키인의 의식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 후 오페라적 서막극이 작곡되고 이것이 몰리에르의 희극
부분 대신 공연되었다.

발레 뤼스의 디아길레프를 위해 작곡한 <요제프 전설>은 그의 많지 않은 발레곡이다.

1919년 10월 10일, 빈 국립오페라 예술감독에 임명된 그는 취임 때 호프만스탈 대본에 곡을 붙
인 <그림자 없는 여인>을 초연했다. 이 오페라는 상징주의와 형이상학적 관심이 반영된 가장 야
심적인 작품이다. 여기서 <그림자 없는 여인>이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을 가리킨다. 그림자
가 없어 아기를 갖지 못하는 황후가 평민 여인의 그림자를 사려고 하다가 “타인의 불행을 토대로
내 행복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고 그 시도를 철회하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에 이른다
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호프만스탈과 만든 오페라 중에서도 절정에 도달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
는다. 모차르트를 숭배해서 <장미의 기사>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모방했던 슈트라우스는 이 작
품에선 <마술 피리>를 염두에 뒀다. 진리와 진실에 대한 탐구와 휴머니즘이 주제인 것이 <마술피
리>와 유사하다.

결과적으로 이 일곱 번째 오페라에서 슈트라우스는 그때까지 시도한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모
두 종합했다. <군트람>에서는 바그너 모방, 조성의 경계를 넘나든 <엘렉트라>의 화성, <살로메>
의 인상주의적 색채감, <장미의 기사>에서 보여준 복고풍 등을 골고루 배치한 작품이다.

1925년 슈트라우스는 빈 오페라를 떠났고, 오페라 <이집트의 헬레나>를 썼지만 이것은 그의 원
숙기의 가장 잘못된 작품이 되고 말았다. 모차르트의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를 개작했다. 이
후 8년이 지난 1933년에 <장미의 기사>에서 사용한 빈 양식을 다시 교묘하게 도입시킨 <아라벨
라>에서 명예를 회복했는데, 이것은 1929년에 사망한 호프만스탈이 그를 위하여 쓴 최후의 작품
이었다.

슈트라우스는 호프만스탈을 대신할 대본작가를 결국 찾아내지 못했고, 후기 오페라는 음악적으로
는 틀림없이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프만스탈이 보여준 독특한 연극적 센스가 빠져 있다. 그
러나 <말없는 여인>에 대해서는 이 평가가 반드시 합당하다고 할 수 없다. 벤 존슨(Ben Jonson)
의 원작을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가 각색한 이 작품에서 슈트라우스는 도니체티의 <돈
파스콸레> 스타일 오페라 부파라는 그에게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

불행하게도 슈테판 츠바이크가 나치즘이 대두하기 전에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극작가라기
보다 시인이라고 해야 할 요제프 그레고르(Joseph Gregor)가 정치를 제재로 쓴 대본으로 작곡
한 오페라 <평화의 날>, 그리스 신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다프네>와 <다나에의 사랑>이라는 세
편의 오페라가 태어났다. 음악적으로는 다프네의 목가적 분위기가 잘 만들어졌고 주목할 만한 것
이 되었다.

그러나 최후의 오페라 <카프리치오>(부제 ‘음악을 위한 대화’)는 단막이었다. 지휘자 클레멘스 크
라우스(Clemens Krauss)와 공동 집필한 대본으로 작곡했는데, 소규모 무대에서 "음악과 언어,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주제를 대화식으로 공연한다. 결과적으로 이 오페라는 슈트라우스
가 평생을 통해서 몇 차례 경의를 표했던 프랑스 문화에 대한 마지막 경의가 되었다. 슈트라우스
가 엄중하고 비참했던 나치시대에 불쑥 글룩파(Gluckists)와 피치니파(Pccinnists)의 미학 논쟁
(파리에서 일어난 논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가 훌륭하냐? 프랑스 오페라가 훌륭하냐?로 편가르
기 논쟁이 치열했다)을 주제로 오페라를 썼다는 것은 분명 의외다. 슈트라우스는 사회참여적인
작곡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 궁금해지는 것. <카프리치오>는
1942년 10월에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됐다.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음악인가, 언어인가? 해답은 양자의 완전한 밸런스이
다. 이것이 슈트라우스의 주장이고 그 훌륭한 성과야말로 그의 말년의 주요한 극작품이 된 <카프
리치오>이다. 1945년에 23개의 현악기를 위한 에튀드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을 작곡
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의 평생의 최고 걸작인 동시에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작곡가에 의해서
낭만주의에 의도적으로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기도 하다. 1949년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수개월
전에 슈트라우스는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4곡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들은 그를 충
분히 만족시킨 일생에 다시없이 아름다운 고별작품이 되었다.

1949년 9월 8일, 슈트라우스는 85세를 일기로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85회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지휘했던 게오르그 솔티가 장례식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등장하는 트리오를 연주했는데, 세 사람의 가수들이 처음
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잘 마무리가 됐다. 슈
트라우스의 부인 파울리네는 8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88세였다.

그는 20세기 전반이라는 음악언어의 혁명시대에 있으면서도 결코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와 같
은 개혁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과 양식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존재는 매우 중
요하다. 그는 19세기에서 계승한 전통을 그대로 유지시킴으로써 고전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면서
낭만주의를 통합한다는 현대적 통합을 실현시켰다. 우수한 작품에서는 그 이상을 달성하고 있는
한편, 그다지 우수하다고 할 수 없는 작품에서는 여러 가지 기교가 엿보였다. 히틀러는 슈트라우
스의 음악을 쇤베르크와 그 일파의 작곡가들과 같은 이른바 '데카당스'의 음악과 대립시키기로
하고 슈트라우스의 뜻과는 달리 그를 제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 만들었다. 슈트라우스는 이 지위
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기는커녕 박해받는 예술가를 위하여 사용했다.

◈ 슈트라우스와 나치
독일에서 나치당이 실권을 잡은 후의 슈트라우스의 역할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
은 그가 계속 비정치적이었으며 전혀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그는 제3제
국의 공직자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1933년 11월에, 슈트라우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요제
프 괴벨스는 그를 <제국음악원 Reichsmusikkammer>의 장으로 지목한다. 슈트라우스는 그의
공직을 유지하지만 비정치적으로 남기로 결정했는데, 순진한 것으로 비판받지만 주변 환경을 고
려했을 때 가장 현명한 것으로 보이는 결정이었다. 이 위치에 있는 동안 그는 1936년 올림픽을
위해 올림픽 송가(세계인이여! 우리 국민의 손님)를 작곡하고 지휘했으며, 또한 몇몇 고위 나치당
원과 친분을 맺었다. 명백히 그의 의도는 그의 며느리이며 유태인이었던 앨리스를 학살로부터 보
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35년, 슈트라우스는 <그림자 없는 여인>의 광고 전단에서 유태인 대본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스테판 즈바이크(Stefan Zweig)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을 거부한 후에 제국음악원 회장 지위로부
터 물러나도록 강요받았다. 1935년 6월 17일, 슈트라우스는 스테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
다. "자네는 어떤 경우든 간에 내가 독일인이라는 생각에 따라 행동한 적이 있다고 믿는가? 자네
는 모차르트가 작곡할 때 자신이 아리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나는 단지 두
종류의 사람들을 알 뿐이네, 재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재능이 없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네." 이
편지는 게슈타포가 가로챘고, 게슈타포는 이를 히틀러에게 보냈다. 결국 제국음악원 회장을 사임
하게 된다.

1938년, 나라 전체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 평화에 대한 송가이자 제3제국에 대한 비평
에 다름 아니었던 <평화의 날>(30년 전쟁 때 포위된 요새를 배경삼은 단막 오페라)을 제작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뜻밖에 용감해 보였다. 자유와 종속, 전쟁과 평화, 빛과 어둠의 대비를 반영한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의 다른 어떤 오페라보다도 베토벤의 <피델리오>와 연관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오페라 제작은 1939년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그의 유태인 며느리 앨리스가 1938년에 가택연금 되어 있을 때 슈트라우스는 그녀와 손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베를린 인맥을 이용했다. 게다가 그의 공직을 다른 유태인 친구와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려 했다는 제안도 있다. 불행히도 슈트라우스는 나치의 반유태주의에 대한
그의 느낌을 다룬 구체적인 기록이나 증언을 남기고 있지 않아서 그의 행적에 대한 재구성은 추
측에 불과하다. 1930년대 대부분의 그의 행동이 단순한 협력과 반항의 중간이었던 데에 반해,
그의 음악만은 되돌아보건대 평화주의자 드라마인 <평화의 날>과 같이 반항적인 행로가 명백했
다.

1942년에 슈트라우스는 그의 가족과 함께 빈으로 돌아왔으며, 거기서 앨리스와 그녀의 아이들은
빈(Wien)의 관구장이었던 쉬라흐(Baldur von Schirach)에 의해 보호될 수 있었다. 불행히도 그
조차도 슈트라우스의 유태인 친척을 완전히 보호할 수는 없어서 1944년 초에 슈트라우스가 나가
있는 동안에 앨리스와 작곡가의 아들이 게슈타포에 의해 유괴되어 이틀 밤을 갇혀 있었다. 이 시
점에서 오직 슈트라우스의 개인적인 개입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가택 연
금 상태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았다.

◈ 인간 슈트라우스
생활의 고난을 몰랐던 슈트라우스는 예술가로도 별 어려움 없이 성공의 길에 들어 설 수 있었다.
슈트라우스 삶의 특징이라면 바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위
적이거나 사색적 나아가서 번민하는 것은 그와는 먼 세상이었다. 작곡하는 것도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런 활동의 하나였다. 어떤 작곡가가 마침내 성공을 가져다 준 한 오페라 작곡을 위해 굉장
히 힘들고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도대체 그는 왜 작곡하기 어려울 때 작
곡을 한단 말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리가 길어 큰 키에 푸른 눈과 낭랑한 테너 목소리를 가진 슈트라우스는 겉으로 보기에 통상적
인 코밑수염을 길렀을 뿐 단정한 조발로 일반 시민과 별 다름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예술가로서
그는 감상적인 염세 감정이나 비장함 또는 당시 유행병이뎐 비관주의에 빠지는 일도 없었던 건강
한 예술가였다. 이렇듯 그는 또한 양면성을 적절히 소유한 사람으로 순박하나 빈틈이 없고 직관
적이지만 이성으로 통제하며 중용을 지키면서도 단호할 수 있어서 어떤 상황에 처해도 주권을 가
지고 있었다.

유럽 곳곳에서 지휘를 하던 슈트라우스는 1904년(2월 23일-4월 28일) 처음으로 미국 연주 여행
에 나섰다. 총 35회에 달하는 순회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는데 부인 파울리네도 가곡 연주로 성공
적인 연주 여행에 커다란 몫을 했다. 이 순회공연 중 슈트라우스는 뉴욕의 한 백화점에서 오전
공연을 해줄 것을 요청받자 조건을 살피고는 곧 응낙했다. 엄청난 광고 효과를 생각한 주최측이
충분한 사례를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이 사실이 고국에 알려지자 비판이 쇄도했다. 이에
슈트라우스는 베를린 알게마이네 무직짜이퉁에 글을 보내 자기 입장을 밝혔다. "진정한 예술은
모든 공간을 고귀하게 만들며, 처자식을 위해 진실하게 돈 버는 일은 결코 예술가를 모욕하는 일
이 아닙니다." 슈트라우스는 숨겨진 천재로 살지 않았던 것처럼 이상에만 빠져서 현실을 도외시
한 예술가도 아니었다.

그는 부모로부터 마치 좋은 것들만 골라서 물려받은 사람 같았다. 어머니에게서는 온화한 인간미
와 건강한 영리함을, 아버지에겐 자신에게 엄하고 단호한 만큼 강한 자신감과 자부심도 이어 받
아 항상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그는 남에게 관대하기도해서 성공한 음악가로
서 동료나 후배 중 누구든지 약간이라도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진 듯이 보이면 우선 도와주고
장려하였다. 과대평가하는 건지 모른다는 우려 보다는 시간이 판가름하게 될 테니 발전에 길을
터주자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등산으로 단련된 튼튼한 다리로 탄력 있는 걸음을 걸었던 슈트라우스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감
각을 가져 이재에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위태로운 음악가의 실존을 늘 의식해서 베를린으로 이주
한 1898년에 친구이자 작곡가인 프리드리히 뢰쉬, 한스 좀머와 <독일 작곡가조합>을 창립하고
작곡가의 이익을 위해 앞장섰다. 특히 지적소유권을 사회가 인정하도록 촉구하고 행동했다. 어떤
작곡가의 곡이 연주될 때마다 그 작곡가에게 저작권료가 반드시 지불되도록 했다. 그전에는 한
작품이 일단 출판되면 상연권까지 출판사에 속했다. 슈트라우스는 서류 작성과 취급에 많은 시간
을 할애해야했고 그 당시 적지 않은 동료들이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의심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여
실망한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추진시켜 저작권 보호 활동의 성공적인 개척자가 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인격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라면 세련된 문벌가의 자의식을 꼽을 수 있겠다.
1904년 연주 여행 중 뉴욕의 마지막 슈트라우스 축제날(3월 21일) 뉴욕 관현악단을 지휘하면서
카네기 홀에서 아내와 아들에게 헌정한 <가정 교향곡 Sinfonia domestica op.53>을 초연했다.
이 곡으로 그는 <영웅의 생애>와 <꺼진 불> 이후 또다시 노골적으로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서술
했다며 비난을 샀다.

그의 입장은 로망 롤랑에게 쓴 편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무슨 이유로 나와 관련된 교향
곡을 작곡해서는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나는 내 자신이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만큼
흥미롭다고 봅니다." 슈트라우스는 죽기 직전까지 예술작품은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반사경이라
는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슈트라우스는 문학사가들이 특히 괴테 작품의
한 문장을 놓고도 괴테라는 인물과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면밀하게 연구를 하는데 음악인들은 자기 작품의 이런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불만
을 토로했다.

◈ 슈트라우스의 죽음
1949년 9월 8일, 85세를 일기로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에서 슈트라
우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85회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지휘했던 게오르그 솔티가 장례식
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등장하는 3중창을 연주했는데, 세
사람의 가수들이 처음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잘
마무리가 됐다. 슈트라우스의 부인 파울리네는 8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88세였다.

◈ 파울리네 슈트라우스
음악가 슈트라우스와 50여년 해로한 부인 파울리네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사생활을 보
호하기 위해 슈트라우스가 그의 전기 작가에게 아내에 대한 언급을 절대 피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부모와 친구 그리고 하나 뿐인 여
동생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 반면 슈트라우스 자신은 희극 <간주곡>을 작사 작곡하면서 자신
의 결혼 생활 일부를 세상에 공개했다.(이 오페라를 통해 파울리네가 남편의 주변 환경을 그리
유쾌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세상의 호기심에 노출되어 있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울리네 데 아나(Pauline de Ahna)는 1863년 인골슈타트(Ingolstadt)에서 스웨덴 귀족 출신인
아버지 아돌프 데 아나(Adolf de Ahna)와 독일 어머니 마리아(Maria Huber) 사이에서 태어났
다. 군인으로 출세한 아나 장군은 1871년 베르사유 궁 독일 황제대관식 때 젊은 장교로 바이에
른 대표단 일원이었다. 파울리네는 아버지가 육군 소장으로 1874년 뮌헨에 오기 전까지 그의 근
무지를 따라 학교를 자주 옮겨야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음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슈트라우스 전
기를 쓴 막스 슈타이니처(Max Steinitzer)는 그녀의 개인교습 교사였다. 슈타이니처는 아나 장군
이 슈트라우스와 교제하는 것을 환영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둘의 만남을 주선했다.

당시 뮌헨궁정오페라 제3지휘자였던 슈트라우스와 아나 장군은 바그너를 좋아한다는 공통의 관심
사를 바탕으로 열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어서 슈타이니처는 고집 세고 까탈스러운 성격의
파울리네를 슈트라우스에게 가르쳐 보게 했다. 단 한 번의 교습을 끝내고 슈트라우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녀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재능이 있어. 단지 그걸 꺼집
어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실제로 그 작업을 조직적으로 시도했다. 매일 피아노
반주자와 연습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너의 여조카인 율리에 리터(Julie Ritter)에게 연기지도를 받
도록 했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여러 역(마탄의 사수의 아가테,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 구노의 그
레첸)을 연습시켰다.

1889년 슈트라우스가 바이마르로 갈 때 파울리네도 그를 따라가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1890
년부터 4년 간 바이마르 오페라에 정식으로 채용되어 파미나, 피델리오, 이졸데 등의 배역을 맡
았다. 슈트라우스가 훔퍼딩크의 동화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의 초연을 지휘할 때 파울리네는 헨
젤 역을 맡아 이 오페라의 첫 헨젤이 되었다. 또한 슈트라우스 최초의 오페라 <군트람>에서 여자
주인공 프라이힐트를 노래했다. 마지막 총연습에서 일어난 에피소드 하나.

남자 주인공이 노래할 때 지휘자 슈트라우스가 자주 중지 신호를 보내 바로 잡아줬는데 그녀 차
례 때 중지 신호가 없자 파울리네가 노래 부르기를 멈추고 왜 자기에겐 중지 신호를 보내지 않
느냐고 따졌다. 슈트라우스가 “당신이 당신 역을 잘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파울리네는 "
나는 중지 신호를 받고 싶단 말이에요"하며 악보를 슈트라우스에게 던졌다.(악보는 슈트라우스에
게 가지 못하고 엉뚱하게 구트하일(Gutheil)이라는 제2바이올린주자에게 날아갔다)

이들은 군트람 초연 이틀 전 약혼했다. 파울리네의 가창능력을 높히 평가한 슈트라우스는 비록
오페라 초연이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녀가 바이마르와 뮌헨 상연 때 관중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혼 신청을 받고 행복감에 쌓이기도 했지만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
에서 파울리네가 직업이냐 음악가의 아내와 주부로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것이냐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그녀는 함부르크에서 온 초빙을 거절하고 슈트
라우스의 아내가 되기로 했다.

결혼 후 파울리네는 뮌헨 오페라 객원가수로 무대 활동을 잠시 계속했지만 외아들이 태어난 후
은퇴하고 가곡 리사이틀만 가졌다. 그녀는 남편의 많은 가곡을 청중에 소개했는데 슈트라우스는
그녀의 가곡 연주가 풍부한 표현력과 시적감성이 풍부했다고 높히 평가했다. 실제로 미국 순회
연주 때 한 비평가는 슈트라우스 부인이 남편의 가곡을 얼마나 생동적으로 부르는지 마치 자신이
직접 작곡한 듯했다고 칭찬했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나 오페라 작곡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곡 작곡에는
특별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성악가 롯테 레만(Lotte Lehmann)의 기억에 의하면 그녀가
슈트라우스의 별장에서 그의 반주에 맞춰 가곡을 부를 때면 파울리네가 자주 와서는 눈물을 흘리
며 남편을 껴안았다고 했다. 그 두 사람 외에 아무도 모르는 성스럽고 감동적인 순간을 상기한
것 아닐까.

슈트라우스의 아내 파울리네에 대한 여러가지 일화는 음악가나 주변 인물을 통해 알려졌다. 가르
미쉬 별장에서 식사할 때 거의 언제나 혼자만 말했다거나 2차 대전 중 빈에서 현악4중주 친구들
이 슈트라우스 집에 와서 식사 시간도 거르고 연주를 하니 그들을 초대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파울리네는 문지방에 눈 부릅뜨고 서서 그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슈트라우스는 한
연주자를 붙들고 옆 눈질을 아내 쪽으로 하며 말했다 한다. "오늘 오후에 다시 올 수 있어? 나는
다시 작곡을 해야 하거든!").

구스타프 말러는 부인 알마에게 말하길 그가 1907년 베를린에서 슈트라우스를 방문했을 때 파울
리네가 조용히 하라며 문을 열더니 거실로 안내하고는 온갖 잡담을 퍼붓고는 남편이 라이프치히
에서 힘든 연습을 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신들의 황혼>을 지휘하고 몹시 피곤해서 낮잠을
자고 있어 주의 깊게 지키고 있노라 말을 해서 나는 감동받았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불량배(슈트라우스) 깨울 시간이 되었다”며 말러를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큰 목소리로 "일어
나요. 구스타프가 왔소!"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한다.(파울리네는 그를 한 시간 동안 구스타프
라고 하더니 그 후 갑자기 악장님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1902년에 <꺼진 불>이 말러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 파울리네는 극장 특별석에 앉아 누구 맘에도
들지 않을 작품이며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들어 있지 않고 바그너 등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훔쳐
만들었다며 줄곧 소동을 부렸다고 한다. 상연이 끝나자 슈트라우스는 무대에 올라가 여러 번 인
사를 한 다음 상기된 채 파울리네가 앉은 곳으로 와 자기의 성공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
고 물으니 “이 도둑이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하며 들고양이처럼 덤벼들었다 한다. 나중에 슈
트라우스는 말러에게 사과하기를 "내 아내는 자주 지독히도 우악스럽지만 나는 바로 그런 것이
필요하답니다."  

단순하고 본능적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말하는 파울리네는 신혼 초 슈트라우스의 부모와  
화합을 잘 할 수 없었다. 슈트라우스는 부모에게 파울리네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연모하며 철저한 숙고 끝에 자기 아내로 선택했다고 변명했다. 슈트라우스가 <간주곡>의 카드놀
이 장면에서 아내의 특성을 옹호하며, 멍때리기 좋아하고 건들건들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 잘하는
자기가 이만한 위치에 다다른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이라고 하며 특히 건강관리를 빈틈없이 잘해
주었다고 했듯이 슈트라우스가 오랫동안 그렇게 활발한 작곡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슈트라우
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파울리네의 업적이라고 했다.

알맞은 식생활, 산책하기, 슈트라우스가 카드놀이 할 때면 담배연기가 가득찬 방을 규칙적으로
환기시키도록 지시 감독하였고, 어떤 때는 큰 소리로 작곡하기를 독촉했다고 한다. 행복한 가정
생활도 누린 슈트라우스는 그에게 유일하고 소중한 이 여인을 파욱썰(Pauxerl)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연주 여행 중엔 매일 편지를 썼고, 결혼 36년이 지난 1930년에도 "나는 오로지 당신
곁에서만 완전히 행복 하다오"라고 고백 했다고 한다.

◈ 지휘자 슈트라우스가 남긴 음반
자신의 작품은 물론,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작품 음반이 많다. 1929년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레코딩한 <틸 오일렌슈피겔>과 <돈 환>은 초기 전기녹음 시대가 거둔 가장
뛰어난 연주로 평가되었고, 1941년에 EMI가 녹음한 <알프스 교향곡>도 최초의 완전한 전곡 연
주라는 측면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이 작품이 요구하고 있는 타악기가 완벽하게 동원되
고 있는 점이 돋보이는 음반이다.

글루크, 베버, 코르넬리우스, 바그너 등 독일 출신 작곡가들의 서곡만을 수록한 음반은 1차대전
이후 대두된 독일 내셔널리즘을 자신만만하게 표출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 1930년대와
1940년대 방송용으로 연주된 음원들과 연주회 실황 음원들도 귀중한 소산으로 남아있다.  

1944년, 80회 생일을 맞아서 발레음악 <거품나는 크림 Schlagobers>등 자신의 오케스트라 작
품들을 빈 필과 레코딩했고, 후일 Vanguard Records가 이 음원을 LP로 발매했다. 최근엔
Preiser 레이블이 CD로 재발매 했다. 슈트라우스는 후프펠트(Ludwig Hupfeld) 제작사가 만든
발 페달(foot pedal)이 달린 피아노와 베르테-미뇽(Welte-Mignon) 피아노를 직접 연주해서 녹
음했는데, 이 음원들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카라얀이 1983년에 발표한 <알프스 교향곡>은 음반
사상 최초의 상업용 CD이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헤롤드 쇤버그(Harold C. Schonberg)는 슈트라우스의 음반들 중에서
도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등을 평가했는데,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나약하고, 매력도 없고, 절제도 없으며, 기계적인 연주”라고 혹평했고, 베토벤의 7번에 대해서는
“뉘앙스나 표현에 있어서 전혀 변화가 없다. 느린악장은 다음에 오는 비바체 악장처럼 빠르게 연
주하고, 마지막 악장은 마지막 부분을 짤라 버려서 결과적으로는 7-8분을 생략했다”고 혹평했다.
반면에 미국의 저명한 평론가 피터 굿맨(Peter Gutmann)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과 7번에 대
해서 “관습에 젖지 않은 연주”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주요 작품
[교향적 작품]
▶축전행진곡 Festmarsch(1876)
▶교향곡 f단조(1884)
▶이탈리아에서 Aus Italien(1886)
▶맥베드 Macbeth(1887)
▶돈 환 Don Juan(1887)
▶죽음과 변용 Tod und Verklarung(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Till Eulenspiegel(1894)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96)
▶돈키호테 Don Quixote(1897)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1898)
▶가정교향곡 Sinfonia domestica(1903)
▶두 곡의 군대행진곡 2 Militarmarsche(1905)
▶평민귀족 Der Bruger als Edelmann[관현악조곡](1912)
▶축전전주곡 Festlisches Praeludium(1917)
▶알프스교향곡 Eine Alpensymphonie(1915)
▶쿠프랭의 클라브생 작품에 의한 무용 모음곡 (1923)
▶일본건국축전음악 (1940)

[기악곡]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1881)
▶교향곡 E♭장조[16인의 관악기를 위한](1943)
▶메타모르포젠 Metamorphosen[23인의 현악기를 위한](1945)
▶호른협주곡 2집(1883, 1943)
▶바이올린협주곡(1882)
▶오보에협주곡(1946)
▶클라리넷, 바순, 현악합주와 하프를 위한 듀엣 콘체르티노(1947)
▶현악4중주곡(1880)
▶피아노4중주곡(1884)
▶첼로 소나타(1882)
▶바이올린 소나타(1887)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1881)
▶피아노 소나타(1881)

[부수음악]
▶에노크 아덴 Enoch Arden[A. 테니슨작](1897)
▶해변의 성 Das Schloss am Meere[L. 울란트작](1899)

[발레음악]
▶요제프 전설 Josephslegende(1913)
▶거품나는 크림 Schlagobers(1921)

[성악곡]
▶피아노 반주가 있는 가곡 140곡
▶오케스트라가 있는 가곡 18곡
▶아카펠라합창곡 8곡
▶독일 모테트 Eine deutsche Motett(1884)
▶재봉소 Taillefer[독창이 있는 칸타타](1903)
▶음유시인의 노래 Bardengesang(1905)
▶3곡의 찬가 3 Hymnes[가사 횔더린](1920)
▶하루의 시간 Die Tageszeiten[가사 아이헨도르프](1928)
▶오스트리아 Austria(1929)
▶올림픽찬가 Olympische Hymne(1936)

[오페라]
▶군트람 Guntram(1893, 개정 1939)
▶꺼진 불 Feuersnot(1901)
▶살로메 Salome(1905)
▶엘렉트라 Elektra(1908)
▶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1910)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Ariadne auf Naxos(1915)
▶그림자 없는 여인 Die Frau ohne Schatten(1917)
▶인테르메쪼 Intermezzo(1923)
▶이집트의 헬레나 Die agyptische Helena(1925)
▶아라벨라 Arabella(1933)
▶말없는 여인 Die schweigsame Frau(1934)
▶평화의 날 Friedenstag(1937)
▶다나에의 사랑 Die Liebe der Danae(1940)
▶카프리치오(1941)
▶글룩의 토리드의 이피제니의 신개정판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의 신개정판(1930)

◈ 출처 / 위키피디어(번역/곽근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생애와 작품 개론(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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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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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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