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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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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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지휘자, 작곡가, 1864 뮌헨-1949 가르미슈)



◈ 유투브 감상
Richard Strauss : Also sprach Zarathustra op.30
L'Orchestra Nazionale di Santa Cecilia, Roma
Direttore d'orchestra: Antonio Pappano
http://youtu.be/o5bU7ibqGko

독일의 작곡가요 지휘자였던 슈트라우스는 가난하고 생전에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수 많은 음악가상과는 거리가 멀다. 행운아로 태어나서 부모와 친척 그리
고 여러 단체의 원조와 보조를 받아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
뿐더러 작곡가로 또한 지휘자로 초반기부터 성공과 인기를 누렸다. 그렇다고
일찍 세상을 떠난 작곡가도 아니었고,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생을 마감하면서
거의 70년 동안이나 창작 활동을 했다. 이 기간에 독일의 사회와 정치 체제가
여러 번 바뀌었듯이 음악사에도 커다란 변천이 있었다. 슈트라우스가 청년기
인 1880년대에 바그너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의 작사 작곡을 마쳤
고 일반적으로 그의 적수로 간주되는 브람스는 제3, 제4 교향곡을 완성하였는
가 하면, 1909년엔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3개의 피아노 곡(Drei
Klavierstuecke op. 11)"이 나왔다.

슈트라우스는 초기에 아주 진보적인 작품을 내놓는 작곡가로 알려졌는데 오페
라 '살로메'와 '엘렉트라'를 정점으로 하여 조성 음악을 떠나지 않았다. 한 작
곡가로서 취한 이런 시종 일관한 태도는 후대에 '낙후한 작곡가' 또는 '바그너-
브룩크너 전통의 계승자"로만 해석되었다. 12음 기법을 사용한 제2의 빈(Wien)
악파를 지나 전쟁 후 다름슈타트(Darmstadt) 악파의 등장으로 슈트라우스 음
악은 1980년대까지도 젊은 작곡가들로부터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
이다. 그러나 1910년대 불협화음의 긴장상태를 해소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협
화음과 동렬에 놓아 작곡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면, 1970년대부터는 거꾸
로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의 전위를 이끌어 가던 펜데레츠
키같은 작곡가들이 조성을 새롭게 발견하여 그들 작품에 융합시킴으로써 슈트
라우스나 그의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또한 조성
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많은 작품이 새로 발견되면서 제2의 빈악파가 1945년
까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결정적인 영향을 모든 작곡가에게 끼친 것
은 아니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슈트라우스가 죽은지 60여년이 지난 지
금, 다행스럽게도 전위니 전통이니 하는 범주를 떠나, 다원론적으로 각 작곡가
의 음악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
에 이르는 격동의 유럽 역사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이 음악가의 일생은
오늘도 그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큰 호기심과 흥미를 불어 일으킨다 하겠다.

아버지 프란츠(Franz)는 뮌헨 궁정관현악단에 소속된 유명한 호른 주자였다.
음악의 기초를 어머니에게 배웠고, 삼촌으로부터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작곡
법은 뮌헨 궁정악단의 악장으로 있던 마이어(Friedrich Wilhelm Meyer) 문하에
서 공부했다.

슈트라우스가 처음으로 작곡한 것은 '크리스마스 축가'로 1870년 6살 때 일이
다. 악보는 그가 그렸지만 아직 글씨를 작게 쓸 수 없어서 가사는 그의 어머니
가 대신 써 넣었다고 한다. 그 뒤 '쉬나이더 폴카 (Schneider Polka)', 피아노
소나타, 가곡, 호른과 클라리넷을 위한 곡, 합창곡을 썼으며 마이어에게 관현
악법을 배운 후로는 관현악곡도 쓰기 시작했다. 이년 뒤에 슈트라우스 아버지
는 피아노곡인 "쉬나이더 폴카"를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친구와 친척으로 구성
된 하릅니 악단 (Harbni-Orchester)과 함께 연주하여 슈트라우스 작품 첫번째
의 초연도 마련되었다. 요컨대 슈트라우스는 음악가가 될 사람으로서 이상적
인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으니 1875년부터 (1896년 까지) 그의 부친이
30명 가량의 아마추어 음악가(대부분 고급 공무원임)로 구성된 관현악단 "빌
데 궁을 (Wilde Gung'l)"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주로 고전파와 낭만파 음악가의
교향곡을 연습하였는데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들 뿐만 아니라 음향기구로서 관
현악단이 무엇인지 일람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또한 이 관현악단의 연주로
16세 때 자기 작품 '가봇트'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1882년 가을 뮌헨 대학에 적을 두었다. 전공 과목은 철학, 미학, 미술사였다.
7월 아버지를 따라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여 '파르지팔' 초연을 듣고, 자신의 내
림 마장조 세레나데(Serenade forr 13 Blass in Eb op.7)가 드레스덴에서, 라단
조 바이올린 협주곡이 빈에서 연주되면서 그는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사실 슈트라우스는 이미 김나지움을 졸업하기 전해인 1881년 3월 작곡가로서
공식적인 데뷔를 한 셈이었다. 즉 그의 라단조 교향곡이, 지금은 세계 대전 중
(1944)에 파괴되어 없어진 오데온 회관의 정기연주회 행사 중에 궁정악장 헤
르만 레비(Hermann Levi)의 지휘로 18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연주되었던
것이다.

그의 초기의 작품에는 멘델스존과 슈만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16세 때 지휘자
이자 평론가인 한스 폰 뷜로와 만났고 그를 통해서 바그너의 작품을 알게 되었
으며, 18세 때 파르지팔 초연에 참석하여 결정적인 감명을 받았다. 한편, 뷜로
는 리하트트 슈트라우스의 초기 주요 작품을 지휘했고 호른 협주곡 제1번의
연주 때(1885)는 솔리스트로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를 초청했었다.

같은 해 슈트라우스는 뷜로의 추천에 의하여 마이닝겐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슈트라우스가 마이닝겐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기
간이었다. 마이닝겐 궁정악단의 제 1 바이올린주자이며 작곡가이기도한 알렉
산더 리터(Alexander Ritter)를 만나 작곡가로서 결정적인 전환을 하게 되기 때
문이었다. 리터는 바그너의 조카 사위며 드레스덴 학창 시절부터 뷜로의 친구
였는데 젊은 슈트라우스에게 리스트와 바그너의 작품과 저서를 소개하고 예술
사에 있어서 그들의 의미를 설명하여 주었다. 보수적인 가정 교육으로 그들의
음악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슈트라우스는 이 계기를 통하여 그들
의 미학적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즉 소나타 형식은 베토벤에 의해
극도로 확장되어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적인 표상
이 곧 외형을 형성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리스트의 근본 원리가 이 후로
는 슈트라우스의 관현악 음악을 위한 작곡에 길잡이가 되었다.

1886년, 아버지의 후원으로 이탈리아의 베로나, 볼로냐, 로마, 나폴리, 플로렌
츠를 돌아 보았는데 교향 환상곡 '이탈리아로부터(Aus Italien op.16)'는 이 여
행의 열매였다. 겉으로 보아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과 유사한 이 작품으로 리스
트의 원리에 따른 최초의 시도였다. 초연은 1887년 3월 뮌헨에서 슈트라우스
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곧 이어서 최초의 교향시 '맥베트 (Macbeth op. 23)' 작
곡에 착수했다. 이 곡은 마이닝겐 연극단이 공연한 동명의 섹스피어 작품에 크
게 감명을 받아 쓰게 되었는데 뷜로의 충고로 개정하여 1888년 완성한 작품이
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후에 빈 오케스트라의 제3지휘자가 된다. 그는 그곳에
서 3년 정도 머무는 사이에 '맥베드'와 특히 관현악곡의 영역에서 그의 걸작
이라고 할 수 있는 '돈환(Don Juan)'이라는 두 곡의 새로운 교향시를 작곡했다

1889년 뮌헨을 떠나 바이마르에 가서 궁정악장이 되었다. 지휘자 생활은 보
잘 것 없었지만 작곡은 꾸준하여 바이올린 소나타 op.18, 아돌프 폰 솩(Adolf
von Schack)과 페릭스 단(Felix Dahn) 의 시에 붙인 가곡(op.19, 21, 22)외에
대 규모의 교향시 돈 환(Don Juan op. 20)을 완성했다. 니콜라우스 레나우
(Nikolaus Lenau)의 시에 근거를 둔 이 교향시에 슈트라우스는 처음으로 이해
를 돕기 위한 서문을 두었는데, 19세기에 만연한, 여인의 사랑을 통해 구제되
는 것을 갈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죽음과 변용(Death and Transfiguration)'은 1889년에 작곡했다. 그러나 중병
을 얻어 수개월 동안 활동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고, 쾌유되자 그리스와 이
탈리아를 여행했으며 그곳에서 최초의 오페라 '군트람(Guntram)'의 초고를 작
성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매우 강한 이 작품은 1894년 바이마르에서 초연했으
나 실패로 끝났다. 사실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작품에 대한 엄청난 경외심으로
오페라 작곡에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오페라 작곡가는 반드시 대
본까지 직접 써야 한다는 견해였는데 자신이 별다른 문학적 소질을 가지고 있
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중세 수도원 회원인'군트
람'을 소재로 한 이 오페라를 빈의 한 신문(Neue Freie Presse) 기사에서 보고
착수하였다. 1888년 3월 초안을 잡아 1893년 9월에 완성한 "군트람"은 바이마
르에서 다음해 5월 초연되었으나 큰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당시의 궁정악
단 상황으로는 무리였던 대규모 관현악단을 요구하는 오페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든 성부 때문이었다. 그후 다른 도시에서 무대에 올려 보려
는 시도는 모두 좌초되고 뮌헨 공연(1895)은 여러 가지 이유로 큰 실패로 돌아
가고 말았다. 이 악극이 다시 상연된 것은 45년 후인 1940년 바이마르에서였
다.

189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탄호이저를 지휘했고 그 후 뮌헨에 제1지휘자
로서 돌아왔으며 그곳에 1898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이 시기에 '틸 오일렌슈
피겔의 유쾌한 장난(Till Eulenspiegel's Merry Pranks)' '짜라투스트라는 이렇
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 '동키호테(Don Quixote op.35)'를 작곡
했다. 이 세 곡의 표제작품에서 폴리포니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감각이 훌륭하
게 꽃을 피웠다.

개인적으로 이 뮌헨 시절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친구이자 최초의 슈트
라우스 전기를 쓴(1911년) 막스 슈타이니처 (Max Steinitzer)로부터 일생을 반
려할 파울리네 데 아나 (Pauline de Ahna)를 성악 학생으로 처음 소개받은 것
이다. 슈트라우스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한 파울리네가 보기 드문 소질
을 갖췄다고 판단했고 그녀도 슈트라우스의 잠재력을 확신했다. 그리하여 슈
트라우스가 바이마르로 갈 때 그녀도 그의 제자로 따라갔다. 파울리네는 곧 궁
정 극장의 솔로이스트로 활약했으며 후에 슈트라우스 가곡의 해석자로 이름을
떨쳤다.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 생애에 단 한명의 의미있는 여인이었다. 이로
써 그는 행복한 가정 생활도 영위한 음악가가 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47년에 파울리네와의 만남과 그녀의 뛰어난 가창 능력에
대한 찬사의 기록을 남겼다.

1898년에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또 교향적
자서전 작품인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를 완성시켰다. 이 작품에서 감
정이 풍부한 그의 관현악법은 절정에 이르렀다. 독일적인 것을 이해하려고 노
력하던 프랑스 출신 비평가 로망 로랑 (Romain Rolland)은 '영웅의 생애'를 듣
고 실제로 누가 이 작품에 등장한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슈트라우스를 찾아가
물었는데, "사실 작품에 바탕이 되는 줄거리는 있지만, 그냥 한 영웅이 적과 싸
우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라고 알고 있으면 족하다"는 대답을 듣는다. 끊이지
않는 오해를 줄이기 위해 환상 변주곡 "동키호테"의 목차를 나중에 마지 못해
발표했듯이 음악 자체로 받아 들여지고 이해되어야 할 교향시가 문학화 될까
봐 크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슈트라우스의 두 번째 오페라 '꺼진 불(Feuersnot)'은 바그너를 향한 새로운 회
귀를 나타내는데, 1901년 드레스덴에서에서 초연되었고, 공연이 성공을 거두
어 그의 희망에 부응한 작품이 되었다. 특히 처음 두 편의 오페라가 슈트라우
스 자신의 대본으로 작곡됐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1843년, 라
이프치히에서 발행된 프랑드르 사람의 전설 모음집에 나오는 ‘아우데나르데
의 꺼진 불(Das erloschene Feuer von Audenarde)’을 읽고 좋은 소재를 찾았
다고 생각해서 직접 대본을 썼던 것이다. 이 전설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 한 어린 하녀가 창 밖에 있는 구혼자를 광주리에 실어 자기 방으로 끌어 올
리다가 도중에 중단했다. 공중에 매달려 있게 된 그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
고 말았다. 그러자 한 늙은 마술사는 징벌로 그 도시의 모든 불과 빛을 꺼 버렸
다. 그녀는 옷을 벗고 탁자 위에 올라서야 했고 모든 사람은 이 광경을 보고 크
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녀 등에서 튀어 나오는 불꽃으
로 장작과 등불을 다시 점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가사를 담당한 에른스트 폰 볼초겐(Ernst von Wolzogen)은 12세기경에 일어
났던 이야기를 뮌헨의 당시 상황에 맞추어 각색해서 줄거리에 시사성을 부여
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진행되는 내용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즉시 알 수 있었
다. 게다가 그는 바이에른 사람들 특유의 우락부락한 언어까지 거리낌 없이 사
용해서 이 오페라는 당시 큰 인기를 모았다. 각본에 걸맞게 슈트라우스는 군데
군데 바그너 음악과 바그너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前作 오페라 ‘군트
람’을 인용했지만 그의 음악 양식이 뚜렷이 드러난 작품이다. 뮌헨에서 전통적
으로 맥주 마실 때 부르던 노래 곡조를 수용했는가 하면, 슈트라우스가 약 10
년 후에 쓰게되는 오페라 ‘장미기사’에 자주 나오는 월츠 리듬도 썼고, 바이올
린과 첼로 독주를 끼어 넣는 등 관현악기의 특별한 취급으로 슈트라우스 특유
의 음악적 어법과 무지개빛 음색이 완연하다. 초연은 1901년 11월 드레스덴
(Dresden)에서 오스트리아 지휘자 에른스트 폰 슈흐(Ernst von Schuch)의 지
휘아래 진행되었고, 베를린, 빈, 뮌헨에서도 상연되었다. 음란스럽거나 성애
를 예찬하는 가사도 포함하고 있는 이 오페라는 엄격한 검열청의 관리를 받고
있던 빈이나 베를린에서 문제가 되었다. 베를린에서는 각본을 수정하였음에
도 불구하고 황후가 불쾌해해서 일곱 번 상연 후 막을 내려야 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작품으로 슈트라우스가 오페라 작곡에 맛을 들였다는 사실이다. 이후
그는 오페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한편 작곡가로서의 국제적인 명성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04
년 뉴욕에서 '가정교향곡(Symphonia Domestica)'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는
데, 이 교향곡은 그의 교향적 자서전의 가정편에 해당된다. 1905년, 우여곡절
이 있었지만 슈트라우스는 '살로메(Salome)'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했다. 이 작
품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프랑스어로 쓴 매우 대담한 희곡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새로운 창작물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살로메와 같은 획기
적인 작품은 많은 사람을 어리둥절케 하였다. 그래서 이 가극의 독창성과 시대
적 중요성을 간파한 지휘자 마알러나 니키쉬(Arthur Nikisch)같은 이들이 있었
는가 하면 스캔들로 간주하거나 곧 사라져 버릴 오페라라고 단정한 사람도 많
았다. 평소에 호의적이던 코지마 바그너도 슈트라우스가 몇 군데 피아노로 연
주하자 한마디로 광란이라며 일축했고 초연 삼주 후엔 그녀의 사위인 하이델
베르크 (Heidelberg)의 교수 헨리 토데(Henry Thode)가 베를린의 한 강연에서
슈트라우스가 성도착증을 묘사함으로 신성한 음악을 모독했다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이때 벌써 국내외 10여개 극장에서 이 오페라를 채택하여 슈트라우스
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0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
서 토스카니니가, 투린에서는 슈트라우스가 지휘하였고 이어서 나폴리, 브뤼
셀, 파리 등지에서 살로메가 상연되었는데 종교적인 문제로 어디에서나 순조
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빈에서는 피플(Piffl)이라는 주교와 까다로운 서신
왕래후 1918년에야 연주될 수 있었고, 뉴욕에서는 청교도들의 항의로 초연후
중단해야 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낙천적인 결말이 나는 조건으로 상연
허가를 내렸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상연할 때는 작품 끝에 세 동방박사의 출현
을 예시하는 샛별을 등장시켰다.

이후 슈트라우스는 후반생의 거의 전부를 극장음악에 바쳤으며 이 분야에서
20세기 전반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가 되었다. '엘렉트라'에서 후고 폰 호프만
스탈(Hugo von Hofmannsthal)이 쓴 비극을 다룸으로써 전설적 리얼리즘의 흐
름을 추구했다.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자신의 관심사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었다고 확신한 호
프만스탈은 남은 30년간을 슈트라우스를 위하여 대본을 쓰는 일에 바쳤다. 이
사실은 슈트라우스에게 상당히 유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오페라에
는 없었던 강한 힘을 '엘렉트라(Elektra, 1909)'에서 달성해 버린 슈트라우스는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 1911)'에서 놀랄 만한 방향전환을 했다. 이때
부터 그는 줄기차게 극복하려고 노력한 바그네리즘에서 떠났다. 낭만파가 아
니라 그 이전으로 돌아가서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에서 더없이 완벽하게
환기시킨 빈의 성격적 오페라의 전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장미의 기사에서는 신바로크양식을 탐구했는데 이 수법은 '낙소스섬의 아리아
드네(Ariadne auf Naxos, 1912)'에서도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오페라에
서는 장르의 혼합(코메디아 데라르테와 오페라 세리아)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약 30명으로 이루어진 소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작곡한 이 작품의 토대가 된 것은, 호프만스탈에 의해서 독일어로 번역된 몰리
에르의 '평민귀족'을 위해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부수음악이다. 이 오페라는 본
래 극의 마지막에서 거행되는 터키인의 의식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 후 오페
라적 서막극이 작곡되고 이것이 몰리에르의 희극부분 대신 공연되었다.

디아길레프를 위하여 작곡한 '요제프 전설(Josephslegende, 1914)'은 그의 많
지 않은 발레곡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미완성 영화를 위한 거대한 '알프스 교
향곡'과 함께 그의 작품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이다.

1919년, 빈 국립 가극장 예술감독에 임명된 그는 취임 때 호프만스탈의 대본
에 의한 '그림자 없는 여인(Die schweigsame Frau)'을 초연했다. 이 오페라는
상징주의적 형이상학적 관심이 반영된 가장 야심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밖에
빈 스타일의 발레 '거품나는 크림'과 슈트라우스의 개인적인 모험에서 착상을
얻은 부르주아 희극인 '인테르메쪼(Intermezzo , 1923)'를 썼다. 인테르메쪼는
본래 가수였던 그의 아내 파울리네 드 아나(Pauline de Ahna)와 함께 상연했다

1925년 슈트라우스는 빈 가극장을 떠났고, 오페라 '이집트의 헬레나(Die
ägyptische Helena, 1927)'를 작곡했으나 이것은 그의 원숙기의 가장 잘못된
작품이 되었다. 또 모차르트의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를 개작했다. 1933년
장미의 기사의 빈양식을 다시 교묘하게 도입시킨 '아라벨라(Arabella, 1932)'에
서 명예를 회복했는데, 이것은 1929년에 사망한 호프만스탈이 그를 위하여 쓴
최후의 작품이었다.

슈트라우스는 호프만스탈을 대신할 대본작가를 결국 찾아내지 못했고, 후기
오페라는 음악적으로는 틀림없이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프만스탈이 보
여준 독특한 연극적 센스가 빠져 있다. 그러나 '말없는 여인(Die Frau ohne
Schatten, 1934)'에 대해서는 이 평가가 반드시 합당하다고 할 수 없다. 벤 존
슨(Ben Jonson)의 원작을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가 지극히 교묘하게
각색한 이 작품에서 슈트라우스는 돈 파스콸레풍의 오페라 부파라는, 그에게
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슈테판 츠바이크가 나치즘이 대두하기 전에 망명하지 않을 수 없
게 되자, 극작가라기 보다 오히려 장황한 시인 요제프 그레고르(Joseph
Gregor)가 대본을 제공하여 정치를 제재로 한 오페라 '평화의 날(Friedenstag,
1935-36)', 그리스 신화에서 착상을 얻은 '다프네(Daphne, 1937)'와 '다나에
의 사랑(Die Liebe der Danae, 1940)'이라는 세 편의 오페라가 태어났다. 음악
적으로는 다프네의 목가적 분위기가 매우 잘 만들어졌고 부자연스러운 장면설
정이 있는 이 작품은 주목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최후의 오페라 '카프리치오(Capriccio, 1942)'에서 슈트라우스는 80세
에 가까이 되면서도 더욱 자신을 고무시켰다. 친구인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
스(Clemens Krauss)와 공동 제작한 대본을 기초로 하여 작곡한 이 작품은 슈
트라우스가 평생을 통해서 몇 차례 경의를 표한 프랑스 문화에 대한 마지막 경
의가 되었다. 이 음악가가 비극적인 이 시대(카프리치오는 1942년에 뮌헨에
서 초연했다)에 글룩파와 피치니파의 미학상의 논쟁을 주제로 하여 작곡했다
는 것이 의외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슈트라우스는 사회참여적인 작곡가의
반대에 있었다.

오페라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음악인가, 언어인가? 해답은 양자
의 완전한 밸런스이다. 이것이 슈트라우스의 주장이고 그 훌륭한 성과야말로
그의 말년의 주요한 극작품이 된 카프리치오이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1945년
에 23개의 현악기를 위한 에튀드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 1945)'을 작
곡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의 평생의 최고 걸작인 동시에 20세기의 가장 위대
한 작곡가에 의하여 낭만주의에 의식적으로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기도 하다.
1949년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수개월 전에 슈트라우스는 소프라노와 오케
스트라를 위한 최후의 4곡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들은 그를 충분히 만족
시킨 일생에 다시없이 아름다운 고별작품이 되었다.

1949년 9월 8일, 슈트라우스는 85세를 일기로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
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85회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지휘했던 게오르그 솔
티가 장례식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등장
하는 트리오를 연주했는데, 세사람의 가수들이 처음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
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잘 마무리가 됐다. 슈트라우
스의 부인 파울리네는 8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88세였다.

그는 20세기 전반이라는 음악언어의 혁명시대에 있으면서도 결코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개혁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미학과 양식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그
는 19세기에서 계승한 전통을 그대로 유지시킴으로써 고전주의적 이상을 추구
하면서 낭만주의를 통합한다는 현대적 통합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우수한 작
품에서는 그 이상을 달성하고 있는 한편, 그다지 우수하다고 할 수 없는 작품
에서는 여러 가지 기교가 엿보였다. 히틀러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쇤베르크
와 그 일파의 작곡가들과 같은 이른바 '데카당스'의 음악과 대립시키기로 하고
슈트라우스의 뜻과는 달리 그를 제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 만들었다. 슈트라
우스는 이 지위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기는커녕 박해받는 예술가를 위하여 사
용했다.

◈ 슈트라우스와 나치
독일에서 나치당이 실권을 잡은 후의 슈트라우스의 역할을 둘러싼 많은 논란
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계속 비정치적이었으며 전혀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
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그는 제3제국의 공직자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1933
년 11월에, 슈트라우스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요제프 괴벨스는 그를 '제
국음악원(Reichsmusikkammer)'의 장으로 지목한다. 슈트라우스는 그의 공직
을 유지하지만 비정치적으로 남기로 결정했는데, 순진한 것으로 비판받지만
주변 환경을 고려했을 때 가장 현명한 것으로 보이는 결정이었다. 이 위치에
있는 동안 그는 1936년 올림픽을 위해 올림픽 송가(세계인이여! 우리 국민의
손님 /Völker! Seid des Volkes Gäste)를 작곡하고 지휘했으며, 또한 몇몇 고
위 나치당원과 친분을 맺었다. 명백히 그의 의도는 그의 며느리이며 유태인이
었던 앨리스를 학살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35년, 슈트라우스는
‘그림자 없는 여인’의 광고 전단으로부터 유태인 대본작가였던 그의 친구 스테
판 즈바이크(Stefan Zweig)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을 거부한 후에,  제국음악원
회장 지위로부터 은퇴하도록 강요받았다. 1935년 6월 17일, 스트라우스는 스
테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자네는 어떤 경우던 간에 내가 독일인이
라는 생각에 따라 행동한적이 있다고 믿는가? 자네는 모차르트가 작곡할 때
자신이 아리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나는 단지 두 종류의
사람들을 알 뿐이네, 재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재능이 없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네." 이 편지는 게슈타포가 가로챘고, 게슈타포는 이를 히틀러에게 보냈
다. 결국 제국음악원 회장을 사임하게 된다.

1938년, 나라 전체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 근본적으로 평화에 대한
송가이자 제3제국에 대한 비평에 다름 아니었던 ‘평화의 날’(30년 전쟁 때 포
위된 요새 안을 배경으로 한 단막 오페라)을 제작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뜻밖
으로 용감해 보였다. 작품 내의 자유와 종속, 전쟁과 평화, 빛과 어둠의 대비
로,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의 다른 어떤 최근 오페라보다도 베토벤의 ‘피델리
오’와 연관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오페라 제작은 1939년 전쟁의 발발로 중
단되었다.

그의 유태인 며느리인 앨리스가 1938년에 가르미슈(Garmisch)에서 가택연금
되어 있을 때 슈트라우스는 그녀와 손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베를린 인
맥을 이용했다. 게다가 그가 그의 공직을 다른 유태인 친구와 동료를 보호하
기 위해 사용하려 했다는 제안도 있다. 불행히도 슈트라우스는 나치의 반유태
주의에 대한 그의 느낌을 다룬 구체적인 기록이나 증언을 남기고 있지 않아
서, 그 기간의 그의 행적에 대한 재구성은 추측에 불과하다. 1930년대 대부분
의 그의 행동이 단순한 협력과 반항의 중간이었던 데에 반해, 그의 음악만은
되돌아보건대 평화주의자 드라마 ‘평화의 날’과 같이 반항적인 행로가 명백했
다.

1942년에 슈트라우스는 그의 가족과 함께 빈으로 돌아왔으며, 거기서 앨리스
와 그녀의 아이들은 비엔나의 수장이었던 쉬라흐(Baldur von Schirach)에 의
해 보호될 수 있었다. 불행히도 그조차도 슈트라우스의 유태인 친척을 완전히
보호할 수는 없어서 1944년 초에 슈트라우스가 나가 있는 동안에 앨리스와 작
곡가의 아들이 게슈타포에 의해 유괴되어 이틀 밤을 갇혀 있었다. 이 시점에
서 오직 슈트라우스의 개인적인 개입만이 그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는 그 두
명을 가르미슈로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 인간 슈트라우스
생활의 고난을 몰랐던 슈트라우스는 예술가로도 별 어려움 없이 성공의 길에
들어 설 수 있었다. 슈트라우스 삶의 특징이라면 바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당
연하고 자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이거나 사색적 나아가서 번민하는
것은 그와는 먼 세상이었다. 작곡하는 것도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런 활동의
하나였다. 어떤 작곡가가 마침내 성공을 가져다 준 한 오페라 작곡을 위해 굉
장히 힘들고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도대체 그는 왜 작
곡하기 어려울 때 작곡을 한단 말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리가 길어 큰 키에
푸른 눈과 낭랑한 테너 목소리를 가진 슈트라우스는 겉으로 보기에 통상적인
코밑수염을 길렀을 뿐 단정한 조발로 일반 시민과 별 다름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예술가로서 그는 감상적인 염세 감정이나 비장함 또는 당시 유행병이뎐
비관주의에 빠지는 일도 없었던 건강한 예술가였다. 이렇듯 그는 또한 양면성
을 적절히 소유한 사람으로 순박하나 빈틈이 없고 직관적이지만 이성으로 통
제하며 중용을 지키면서도 단호할 수 있어서 어떤 상황에 처하나 주권을 가지
고 있었다.

유럽의 곳곳에서 지휘를 하던 슈트라우스는 1904년(2월 23일-4월 28일) 처음
으로 미국 연주 여행에 나섰다. 총 35회에 달하는 순회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는
데 부인 파울리네도 가곡의 밤으로 성공적인 연주 여행에 커다란 몫을 하였
다. 이 미국 순회 공연중 슈트라우스는 뉴욕의 한 백화점에서 오전 공연을 해
줄 것을 요청받자 조건을 살피고는 곧 응낙하였다. 엄청난 광고 효과를 생각
한 주최측이 충분한 사례를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였다. 이 사실이 고국에
알려지자 비판이 쇄도하였다. 이러자 슈트라우스는 ‘베를린 알게마이네 무직
짜이퉁(Berliner Allgemeine Musikzeitung)에 글을 보내 자기 입장을 밝혔다. "진
정한 예술은 모든 회당을 고귀하게 만들며 처자를 위해 진실히 돈 버는 일은
결코 예술가를 모욕하는 일이 아닙니다." 슈트라우스는 숨겨진 천재로 살지 않
았던 것처럼 이상에만 잠겨 현실을 도외시한 예술가도 아니었다.

그는 기질상 부모로부터 상호 보충하는 면을 다 물려 받았다. 어머니 쪽으로
는 온화한 인간미와 더불어 건강한 영리심을, 아버지 쪽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엄하고 단호한 만큼 강한 자신감과 자부심도 이어 받아 항상 더 많은 것을 이
루려고 노력하였다. 반면에 그는 남에게 관대하기도 하여 성공한 음악가로서
동료나 후배 중 누구든지 약간이라도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진 듯이 보이면 우
선 도와주고 장려하였다. 과대평가하는 건지 모른다는 우려 보다는 시간이 판
가름하게 될테니 발전에 길을 터주자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등산가로 단단하면서도 탄력있는 걸음을 걷던 그는 현실감과 더불어 실제적이
고 실천적인 감각을 가져 세재에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위태로운 음악가의 실
존을 늘 의식해 온 그는 베를린으로 온 해인 1898년에 친구 프리드리히 뢰쉬
(Friedrich Roesch), 한스 좀머(Hans Sommer)와 더불어 ‘독일 작곡가 조합
(Die Genossenschaft deutscher Komponisten)’을 창립한 이래 일반 작곡가의
이익을 위해 앞장섰다. 즉 사회가 음악작품을 각 작곡가의 정신적인 소유물로
인정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작곡가의 곡이 연주될 때마다 그 작곡가에
게 상연료가 지불되도록 하였다. 그전에는 한 작품이 일단 출판되면 상연권까
지 출판사에 속했다. 슈트라우스는 서류 작성과 취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그 당시 적지 않은 동료들이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의심스러워 하는 반응
을 보여 실망한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추진시켜 저작권 보호 활동의 성공적인
개척자가 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인격을 구성하는 또하나의 요소라면 세련된 문벌가의 자의식을
꼽을 수 있겠다. 1904년 연주 여행 중 뉴욕의 마지막 슈트라우스 축제음악회
날(3월 21일) 그는 뉴욕 관현악단을 지휘하면서 카네기 홀에서 아내와 아들에
게 헌정한 ‘가정 교향곡(Sinfonia domestica op.53)’을 초연했다. 이 곡으로 그
는 ‘영웅의 생애’와 ‘꺼진 불’ 이후 또다시 노골적으로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서술했다하여 비난을 샀다. 그의 입장은 로망 롤랑에게 쓴 편지에 분명히 나타
나 있다. "내가 무슨 이유로 나와 관련된 교향곡을 작곡해서는 안 되는지 이해
가 되지 않는군요. 나는 내 자신이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만큼 흥미롭다고 봅
니다." 슈트라우스는 죽기 직전까지 예술작품은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반사경
이라는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슈트라우스는 문학사
가들이 특히 괴테(J. W. von Goethe)작품의 한 문장을 놓고도 괴테라는 인물
과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면밀하게 연구
를 하는데 음악인들은 자기 작품의 이런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 슈트라우스의 죽음
1949년 9월 8일, 슈트라우스는 85세를 일기로 독일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에
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85회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지휘했던 게오르그 솔
티가 장례식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등장
하는 3중창을 연주했는데, 세 사람의 가수들이 처음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
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잘 마무리가 됐다. 슈트라우
스의 부인 파울리네는 8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88세였다.

◈ 파울리네 슈트라우스
음악가 슈트라우스와 50여년 해로한 부인 파울리네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쉬트라우스가 그의 전기 작가에게 아내에 대한
언급을 절대 피해 달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부모와 친구 그리고 하나 뿐인 여동생과 어떤 사이를 이
루고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반면 슈트라우스 자신은 희극 '간주곡'을 작사 작
곡함으로 자신의 결혼 생활 일부를 세상에 공개하게 되었다. (이 오페라를 통
해 파울리네가 작곡가의 주변 환경을 그리 유쾌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이 세상
호기심에 노출되어 있음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울리네 데 아나(Pauline de Ahna)는 1863년 인골슈타트(Ingolstadt)에서 스웨
덴의 귀족 출신인 아버지 아돌프 데 아나(Adolf de Ahna)와 독일 어머니 마리
아(Maria, 친정 성 후버 Huber) 사이에서 태어났다. 군인으로 주목할 만한 출세
를 한 데 아나 장군은 1871년 베르사이유의 독일 황제대관식 때 이미 젊은 장
교로 바이에른 대표단 일원에 속하였다. 파울리네는 어릴 적 아버지가 육군 소
장으로 1874년 뮌헨에 오기 전까지 그의 근무지를 따라 학교를 자주 옮겨야
했다고 한다. 그녀는 고운 음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음악 애호가인 데 아나 장
군이 이런 딸에게 성악 공부를 하게 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중
에 슈트라우스 전기를 쓴 막스 슈타이닛쩌 (Max Steinitzer)는 그녀의 개인 교
습 교사였다. 슈타이닛쩌는 데 아나 장군이 젊은 작곡가 슈트라우스와 교제하
는 것을 전적으로 환영하리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만남을 주선했다. 당시 뮌헨
궁정오페라의 제3 지휘자였던 슈트라우스와 데 아나 장군은 바그너를 좋아한
다는 공통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하여 바로 열띤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이
어서 슈타이닛쩌는 고집이 세고 까탈스러운 성격의 파울리네를 슈트라우스에
게 가르쳐 보도록 하였다. 단 한번의 교습을 끝내고 슈트라우스는 그에게 다음
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녀는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재능이 있어. 단지
그걸 끄집어 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실제로 그 끄집어내는
일을 조직적으로 시도했다. 매일 피아노 반주자와 연습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
너의 여조카인 율리에 리터(Julie Ritter)에게 연기 지도를 받도록 하였다. 그들
은 집중적으로 여러 역(마탄의 사수의 아가테,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 구노
의 그레첸)을 연습했다.

1889년 슈트라우스가 바이마르로 갈 때 파울리네도 그를 따라가 공부를 계속
했다. 그리고 1890년부터 4년 간 바이마르 오페라에 정식으로 채용되어 파미
나, 피델리오(Fidelio), 이졸데(Isolde) 등의 역을 맡았다. 슈트라우스가 훔퍼딩
크(Humperdinck)의 동화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Haensel und Gretel)’의 초연
을 지휘할 때 파울리네는 헨젤 역을 맡아 이 오페라의 첫  번째 헨젤이 되었다.
또한 슈트라우스 최초의 오페라 ‘군트람’에서는 여자 주인공인 프라이힐트를
맡아 활약했다. 마지막 총연습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는 파울리네의 독특한 기
질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남자 주인공이 노래할 때 지휘자 슈트라우스
가 자주 중지 신호를 보내어 교정을 하도록 했는데 그녀 차례 때 중지 신호가
없자 불안하기도 하고 샘도 난 파울리네는 노래 부르기를 멈추고는 왜 자신에
게 중지 신호를 보내지 않느냐고 따졌다. 슈트라우스가 당신이 당신 역을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라 말하자 파울리네는 "나는 중지 신호를 받고 싶단 말이에
요"하며 악보를 슈트라우스에게 던져 버렸다.(이 던지기는 실패로 돌아가 목표
물을 맞추지 못하고 굿하일 (Gutheil)이라는 제 2 바이올린주자에게 날아가고
말았다.) 이들은 군트람의 초연 이틀 전 약혼하였다. 소프라노로서 파울리네
의 능력을 높히 평가한 슈트라우스는 또한 전체적으로 실패로 돌아간 작품이
었지만 그녀가 바이마르와 뮌헨 상연 때 관중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혼 신청을 받고 행복감에 싸이기도 했지만 슈트라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파울리네가 직업 생활이냐 아니면 음악가의 아내로 그리고
주부로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것이냐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
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그녀는 함부르크에서 온 가수 초빙을 거절하였다.

결혼 후 파울리네는 뮌헨 오페라 객원가수로 무대 활동을 잠시 계속했지만 단
하나의 자식인 아들이 태어난 후 은퇴하고 가곡 리사이틀만 가졌다. 그녀는 남
편의 많은 가곡을 관중에 소개하였는데 슈트라우스는 그녀의 가곡 연주가 풍
부한 표현력을 지니며 시적이라고 높히 평가하였다. 실제로 미국 순회 연주
때 한 비평가는 슈트라우스 부인이 남편의 가곡을 얼마나 생동적으로 부르는
지 마치 자신이 직접 작곡한 듯했다고 칭찬하였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슈트라
우스의 대 교향시나 오페라 작곡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곡 작곡에는 특
별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같다. 성악가 롯테 레만(Lotte Lehmann)의 기억에 의
하면 그녀가 슈트라우스의 별장에서 그의 반주에 맞춰 그의 가곡을 부를 때면
파울리네가 자주 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을 껴안았다고 하였다. 그 두 사
람 외에 아무도 모르는 성스럽고 감동적인 순간을 상기한 것 아닐까.

슈트라우스의 아내 파울리네에 대한 여러 가지 믿기 어려운 일화는 음악가나
주변 인물을 통해 알려졌다. 예로 들면 가르미쉬 별장에서 식사할 때 거의 언
제나 혼자만 말했다거나 2차 대전 중 빈에서 현악4중주 친구들이 슈트라우스
집에 와 즐거워 식사 시간도 잊고 연주를 하니 그들을 초대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파울리네는 문지방에 우뚝 서서 그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슈
트라우스는 한 연주자를 붙들고 옆 눈질을 아내 쪽으로 하며 말했다 한다. "오
늘 오후에 다시 올 수 있어? 나는 다시 작곡을 해야 하거든!"). 구스타프 말러
는 부인 알마(Alma)에게 말하길 그가 1907년 베를린에서 슈트라우스를 방문
했을 때 파울리네가 쉿쉿하며 문을 열더니 거실에 안내하고는 온갖 잡담을 퍼
붓고는 대답을 기다리지고 않고 온갖 것을 묻더니 리하르트가 라이프치히에
서 힘든 연습을 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신들의 황혼’을 지휘하고 몹씨 피
곤해서 낮잠을 자고 있어서 주의 깊게 지키고 있노라 하여 감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불량배(슈트라우스) 깨울 시간이 되었다”며 말러
를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큰 목소리로 "일어나요. 구스타프가 왔소!"하고
소리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파울리네는 그를 한 시간 동안 구스타프라고 하
더니 그 후 갑자기 악장님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1902년 ‘꺼진 불’이 말러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 파울리네는 극장 특별석에 앉
아 누구 맘에도 들지 않을 작품이며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들어 있지 않고 바그
너 등 여러 작곡가의 음악을 훔쳐 만들었다며 줄곧 소동을 부렸다고 한다. 상
연이 끝나자 슈트라우스는 무대에 올라가 여러번 인사를 한 다음 상기된 채 파
울리네가 앉은 곳으로 와 자기의 성공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물으니
“이 도둑이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하며 들고양이처럼 덤벼들었다 한다. 나
중에 슈트라우스는 말러에게 사과하기를 "내 아내는 자주 지독히도 우악스럽
지만 나는 바로 그런 것이 필요하답니다."  

단순하고 본능적이어서 아무 생각없이 마구 말하는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의
부모와 처음 화합을 잘 할 수 없었다 한다. 슈트라우스는 부모에게 파울리네
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연모하며 철저한 숙고 끝에 자기 아내
로 선택했다고 전했다. 슈트라우스가 ‘간주곡’의 스캇놀이 장면에서 아내의 특
성을 옹호하며, 멍하니 지내기 좋아하고 빈들빈들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 잘하
는 자기가 이만한 위치에 다다른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이라고 하며 특히 건강
관리를 빈틈없이 잘해 주었다고 했듯이 슈트라우스가 오랫동안 그렇게 활발
한 작곡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슈트라우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많
은 사람들도 파울리네의 업적이라고 했다. 알맞는 식생활부터 시작하여 정기
적으로 산보하기 그리고 슈트라우스가 스캇놀이 할 때면 담배연기가 가득찬
방을 규칙적으로 환기시키도록 지시 감독하였고, 어떤 때는 또한 큰 소리로 작
곡하기를 독촉하였다 한다. 행복한 가정생활도 누린 예외적인 음악가 슈트라
우스는 그에게 유일하고 소중한 이 여인을 애칭하여 파욱썰(Pauxerl)이라고 불
렀는데 연주 여행 중엔 매일 편지를 썼으며 결혼한지 36년이 지난 1930년에도
"나는 오로지 당신 곁에서만 완전히 행복하다오"라는 고백을 하였다고 한다.

◈ 지휘자 슈트라우스가 남긴 음반
자신의 작품은 물론,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작품 음반이 많다. 1929
년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레코딩한 ‘틸 오일렌슈피겔’과 ‘돈 환’
은 초기 전기녹음 시대가 거둔 가장 뛰어난 연주로 평가되었고, 1941년에 EMI
가 녹음한 ‘알프스 교향곡’도 최초의 완전한 전곡 연주라는 측면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이 작품이 요구하고 있는 타악기가 완벽하게 동원되고 있
는 점이 돋보이는 음반이다.

글루크, 베버, 코르넬리우스, 바그너 등 독일 출신 작곡가들의 서곡만을 수록
한 음반은 1차대전 이후 대두된 독일 내셔널리즘을 자신만만하게 표출시켰다
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 1930년대와 1940년대 방송용으로 연주된 음원들과
연주회 실황 음원들도 귀중한 소산으로 남아있다.  

1944년, 80회 생일을 맞아서 발레음악 '거품나는 크림(Schlagobers)'등 자신
의 오케스트라 작품들을 빈 필과 레코딩했고, 후일 Vanguard Records가 이 음
원을 LP로 발매했다. 최근엔 Preiser 레이블이 CD로 재발매 했다. 슈트라우스
는 후프펠트(Ludwig Hupfeld) 제작사가 만든 푸트페달(foot pedal)이 달린 피아
노와 베르테 -미뇽(Welte-Mignon) 피아노를 직접 연주해서 녹음했는데, 이 음
원들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카라얀이 1983년에 발표한 ‘알프스 교향곡’은 음
반사상 최초의 상업용 CD이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헤롤드 쇤버그(Harold C. Schonberg)는 슈트라우스
의 음반들 중에서도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등
을 평가했는데,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나약하고, 매력도 없고, 절제도 없으며,
기계적인 연주”라고 혹평했고, 베토벤의 7번에 대해서는 “뉘앙스나 표현에 있
어서 전혀 변화가 없다. 느린 악장은 다음에 오는 비바체 악장처럼 빠르게 연
주하고, 마지막 악장은 마지막 부분을 짤라버려서 결과적으로는 7-8분을 생략
했다”고 혹평했다. 반면에 미국의 저명한 평론가 피터 굿맨(Peter Gutmann)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과 7번에 대해서 “관습에 젖지 않은 연주”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주요 작품
[교향적 작품]
▶축전행진곡 Festmarsch(1876)
▶교향곡 f단조(1884)
▶이탈리아에서 Aus Italien(1886)
▶맥베드 Macbeth(1887)
▶돈 환 Don Juan(1887)
▶죽음과 변용 Tod und Verklarung(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Till Eulenspiegel(1894)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96)
▶돈키호테 Don Quixote(1897)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1898)
▶가정교향곡 Sinfonia domestica(1903)
▶두 곡의 군대행진곡 2 Militarmarsche(1905)
▶평민귀족 Der Bruger als Edelmann[관현악조곡](1912)
▶축전전주곡 Festlisches Praeludium(1917)
▶알프스교향곡 Eine Alpensymphonie(1915)
▶쿠프랭의 클라브생 작품에 의한 무용 모음곡 Tanzsuite nach Klavierstucken von Francois Couperin(1923)
▶일본건국축전음악 Festmusik zur Feider des 2600 jahrigen Bestehens des Kais erreiches Japan(1940)

[기악곡]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1881)
▶교향곡 E♭장조[16인의 관악기를 위한](1943)
▶메타모르포젠 Metamorphosen[23인의 현악기를 위한](1945)
▶호른협주곡 2집(1883, 1943)
▶바이올린협주곡(1882)
▶오보에협주곡(1946)
▶클라리넷, 바순, 현악합주와 하프를 위한 듀엣 콘체르티노(1947)
▶현악4중주곡(1880)
▶피아노4중주곡(1884)
▶첼로 소나타(1882)
▶바이올린 소나타(1887)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1881)
▶피아노 소나타(1881)

[부수음악]
▶에노크 아덴 Enoch Arden[A. 테니슨작](1897)
▶해변의 성 Das Schloss am Meere[L. 울란트작](1899)

[발레음악]
▶요제프 전설 Josephslegende(1913)
▶거품나는 크림 Schlagobers(1921)

[성악곡]
▶피아노 반주가 있는 가곡 140곡
▶오케스트라가 있는 가곡 18곡
▶아카펠라합창곡 8곡
▶독일 모테트 Eine deutsche Motett(1884)
▶재봉소 Taillefer[독창이 있는 칸타타](1903)
▶음유시인의 노래 Bardengesang(1905)
▶3곡의 찬가 3 Hymnes[가사 횔더린](1920)
▶하루의 시간 Die Tageszeiten[가사 아이헨도르프](1928)
▶오스트리아 Austria(1929)
▶올림픽찬가 Olympische Hymne(1936)

[오페라]
▶군트람 Guntram(1893, 개정 1939)
▶꺼진 불 Feuersnot(1901)
▶살로메 Salome(1905)
▶엘렉트라 Elektra(1908)
▶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1910)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Ariadne auf Naxos(1915)
▶그림자 없는 여인 Die Frau ohne Schatten(1917)
▶인테르메쪼 Intermezzo(1923)
▶이집트의 헬레나 Die agyptische Helena(1925)
▶아라벨라 Arabella(1933)
▶말없는 여인 Die schweigsame Frau(1934)
▶평화의 날 Friedenstag(1937)
▶다나에의 사랑 Die Liebe der Danae(1940)
▶카프리치오(1941)
▶글룩의 토리드의 이피제니의 신개정판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의 신개정판(1930)

◈ 출처 / 위키피디어(번역/곽근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생애와 작품 개론(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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