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0
 1873   94   9
  View Articles

Name  
   곽근수 
File #1  
   pucciniSigar_toscanini[1].jpg (12.9 KB)   Download : 30
Subject  
   푸치니와 토스카니니(Puccini & Toscanini)


◈ 사진 / 나란히 앉아 있는 푸치니와 토스카니니(오른쪽)

◈ 유투브 감상
1946년, NBC 교행악단과 라보엠을 연습하면서 오케스트라에게 요구하는 토스
카니니의 푸치니 해석
http://www.youtube.com/watch?v=HJ5bl_3vnIs&feature=player_detailpage


◈ 푸치니의 오페라는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라는 위대한
지휘자가 있었기에 더욱 더 커다란 날개를 달고, 빛나는 광채를 뿜어낼 수 있
었다. 다음의 글은 자유기고가 이덕희씨가 쓴 것으로 이 두 거장의 오페라보다
도 더 흥미진진한 인간관계를 들려주고 있다.

♣ 거듭된 불화와 화해 속에서 만개한 예술혼

작곡가가 동시대인 가운데 자신의 작품을 빼어나게 해석하는 지휘자를 만나
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더욱이나 그러한 지휘자와  인간적인 유대감 속에
깊은 우의를 나눌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운도  없을 것이다. 때로 시대를 앞
지른 위대한 걸작은 다음 세기에 가서야 진정한 해석자를 발견할 수 있게 되
는 일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위대한 작곡가는 거의 모
두 위대한 지휘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전통은 바그너와 리스트에 이르
러 끝나고 있다. 이들 이후의 위대한 지휘자들은 대부분 작곡가가 아니었으
며, 모두가 해석의 분야에만 종사한 전문가들이었다. 예외적으로 위대한 작곡
가-지휘자의 옛 전통을 복원한 말러를 빼고는 이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창조
를 재창조하는 일에 전념했던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푸치니가 토스카니니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예
외적인 행운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단순히 작곡가와 지휘자란 관계
에 머물지 않고 인간적인 우의로도 결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이탈리
아의 특수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서 있었던 만
큼 이들 사이엔 일견 진정한 우정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예술을 통해
둘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비록 불화와 화해가 거듭된 순탄치 못한 관계이긴
했지만,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의 재능을 진심으로 찬미했고, 푸치니 쪽에선 자
신의 오페라를 아무도 토스카니니만큼 빼어나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끝까지 우정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토스카니니는 푸치
니보다 9년 늦게 태어나 그보다 33년이나 더 살았다. 푸치니가 태어난 1858년
부터 토스카니니가 사망한 1957년까지 꼭 한 세기를 헤아리는 이 시기는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오페라 작곡가와 지휘자를 위한 길을 지시해 준 역사의 이정
표 역할을 했다 할 수 있다.

♣ 토스카니니 지휘봉 아래 진정한 생명을 얻은 푸치니 오페라

푸치니와 토스카니니가 처음 만난 것은 1895년 말경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
엠’ 초연을 위한 리허설 때였다. 이때 푸치니는 이미 ‘르 빌리’(1884), ‘에드가’
(1889), 그리고 ‘마농 레스코’(1893) 같은 오페라를 발표한 뒤였고, ‘마농’의 굉
장한 성공으로 한창 성가가 오르고 있는 작곡가였다. 토리노의 테아트로 레지
오에서 초연될 ‘라 보엠’을 위해 푸치니는 당시 이탈리아의 저명한 지휘자 레오
폴도 무노네를 원했지만 그의 선택과는 달리 무노네보다 지명도가 훨씬 낮은
토스카니니에게 지휘가 맡겨졌다. 그러나 스물여덟 살의 이 젊은 지휘자가 리
허설하는 장면을 처음 목격하자마자 작곡자는 당장에 만족했다. 첫 대면에서
이미 푸치니는 토스카니니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도로 지적이며 대단히 매력적이고 멋있는 남자’ ‘비범한 음악가’ 따위의 묘
사로 유보 없이 토스카니니를 격찬했다.

푸치니를 만나기 전 , 지휘자로서의 데뷔시절 이미 토스카니니는 브레시아에
서 이 작곡가의 첫 오페라 ‘르 빌리’를 지휘한 터였다(1899년). 그리고 이후 그
는 푸치니의 전 오페라(총 10편) 가운데 ‘에드가’와 ‘제비’ 및 ‘일 트리티코’(삼
부작)─즉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모두
지휘했으며, ‘서부의 아가씨’와 ‘투란도트’는 그의 지휘봉 아래서 세계 초연을
기록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싹튼 것은 아마도 1899∼1900년의 시
즌 때 ‘토스카’의 라 스칼라 초연을 위한 리허설 기간이었던 걸로 추정 된다
(이 오페라는 로마에서 이미 무노네의 지휘로 세계 초연을 기록했다). ‘토스
카’ 공연 후 친구 프리모 레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푸치니는 ‘이 까다로운 작품
이 최고로 빼어난 공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토스카니니의 강철 같은
훈련 덕분’이었다는 의견을 털어놓았다. 또한 1907∼8년의 스칼라 시즌 때 ‘토
스카’의 대성공 후 친구 클라우제티에게 쓴 편지에선 ‘토스카니니의 강력하고
날카로운 해석과 대단히 효과적인 무대의 앙상블’에 대해 격찬을 쏟아놓고 있
다.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의 음악적 판단을 너무나 신뢰했기 때문에 ‘나비부인’의
초연(1904년 봄)을 앞두고 토스카니니에게 스코어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다. 즉석에서 토스카니니는 2막 형식의 스코어가 크게 잘못됐음을 간파했지
만, 초연이 박두한 시점에서 작곡가의 확신을 깨뜨리게 될 것을 염려해서 자신
이 좋아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수정을 가할 것을 암시하지는 않았다.
결국 오페라의 반응이 신통치 않을 것을 예상하고 그는 공연을 참관하지도 않
았는데(이즈음 그는 한동안 스칼라의 지위에서 물러나 있었다) 캄파니니의 지
휘로 막을 올린 오페라는 예상한 대로 미온적인 반응 정도가 아니라 참담한 실
패였다. 그러나 1904년 겨울 시즌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토스카니니의 지
휘로 공연된 (3막 개작의) ‘나비부인’은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처럼 토스카니니의 지휘봉 아래서 탄생되는 푸치니의 오페라는 예외없이
성공적인 공연을 기록했다. 자신의 오페라가 토스카니니에 의해 진정한 생명
을 얻게 되는 현장을 목격할 때마다 푸치니는 더할 수 없는 만족과 경탄과 감
사의 마음을 거듭거듭 표명하게 된다. 이를테면 1910년,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공연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토스카니니는 1908∼15년까지 메트의 예술감독
으로 재직했다)의 ‘마농 레스코’가 파리에서 거둔 압도적인 성공에는 작곡자
자신이 오히려 놀랐을 정도였다. 이 오페라는 이미 17년 전에 탄생했지만, 이
보다 더 오래된 마스네의 ‘마농’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 때문에 그때까
지 파리엔 상륙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정한, 절대적인 승리였습니다. 참으로
유니크한 공연이었지요. ‘마농’에서 이와 같이 조직적이고 완벽한 앙상블을 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일찍이 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답니다”라고 그는 감격적
인 어조로 줄리오 리코르디(푸치니를 키운 유명한 음악출판업자)에게 쓰고 있
다.

이 파리 공연을 위해 토스카니니는 작곡가의 승인 하에 관현악 부분의 스코어
를 약간 수정했는데, 공연 후 밀라노로 돌아간 푸치니는 아직도 파리에 머물
고 있던 토스카니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게 된다. “리코르디 사(社)
는 마침내 ‘마농’의 ‘신판’을 출판하기로 했소. 당신이 교정하고 싶어할 사본을
보내드리겠소. 정말이지 그보다 더 큰 호의를 내게 베풀 수는 없을거요. 당신
의 수정에 의해─특히나 현악 부분의 손질에서─마침내 나는 나의 결정적인
‘마농’을 가질 수 있게 되겠지요. 그래서 이 오페라는 그동안 묶여 있던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거요. 나의 영혼은 그대의 공연과 그대의 유덕
한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오. 곧 만날 수 있기를 바라오.”

‘마농’의 파리 공연 당시 푸치니는 완성단계에 있던 신작 오페라 ‘서부의 아가
씨’를 1910∼11년의 시즌에 뉴욕에서 초연하기로 메트와 합의했다. 캘리포니
아의 대삼림이 무대인 데이비드 벨라스코의 희곡을 작가 자신의 대본으로 오
페라화한 이 작품은 오늘날의 시각에선 푸치니의 오페라 가운데 열등한 자리
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초연 당시엔 메트의 역사에서 굉장한 ‘사건’으
로 기록되었다. 작곡가 자신 역시 이 오페라를 ‘라 보엠’이나 ‘나비부인’ 같은
감상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보다 장대하고 대담한 새로운 양식의 작품을 개척
할 기회로 보았으며, 그때까지의 자신의 오페라 가운데 최고라고까지 생각했
다.

'서부의 아가씨’를 작곡하고 있을 당시 푸치니는 토스카니니를 비아렛조
(Viareggio)로 초청해서 함께 작품을 검토했는가 하면, 토스카니니 쪽에선 뉴
욕에서 오페라의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아직 이탈리아에 있던 작곡가에게
계속 상황을 보고하는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리허설이 계속되는 동안 너무나
굉장한 열광이 터져나왔기 때문에 당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는 마치
‘포위된 성’처럼 보였다고 한다. 1910년 12월 10일 막을 올린 공연의 성공은 폭
발적인 것이었다(카루소와 데스텡 주연). 첫날 밤 통상의 입장료의 두 배를 지
불한 관객들로 극장은 초만원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다 표를
구하지 못해 돌아가야만 했다. 작곡가는 무려 쉰다섯 번의 커튼 콜을 받았다.
음악비평가 리처드 앨드리지는 ‘서부의 아가씨’를 ‘토스카니니의 걸작’이라고
격찬했다.

푸치니는 뉴욕에서 왕족 같은 대우를 받았다. 자신의 오페라를 그처럼 흠없
이 완벽하게 해석해 준 토스카니니에게 너무나 감격한 푸치니는 유럽 귀환의
선상에서 토스카니니 부인 앞으로 자신의 기쁨과 토스카니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토로하는 감상적인 편지를 보내게 된다. “당신들은 내게 너무나 친절하
고 다정했어요. 그처럼 세심하게 마음 써주었구요. 토스카니니는 그처럼 참을
성 있고 다정하게 우정을 베풀어주었어요! 내 머릿속은 당신들 두 사람의 생각
으로 가득 차 있답니다. 당신들이 부러워요. 나도 당신들처럼 될 수 있다면! 가
족들이 모두 함께 있고, 애들은 부모를 그토록 사랑하고, 게다가  당신들을 신
뢰하는 친구들이 항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불행히도 나는 세상에서 혼자
라고 느낀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행복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나는 사랑하려
고 노력했지만 결코 이해받지 못했어요.─그렇다는 것은, 즉 항상 잘못 이해돼
왔다는 것이지요. 이젠 늦었어요. 게다가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나
에 대한 우정이 변치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적어도 나는 나를 참고 이해하
는 훌륭하고 지적인 사람들을 친구로 가질 수 있을테니까요.”

♣ 불화의 불씨가 돼버린 문제의 오페라 ‘일 트리티코(Il trittico, 외투)'

그러나 이로부터 9년 뒤 토스카니니에 대한 푸치니의 감정은 완전히 곤두박질
치게 된다. 푸치니의 과도한 자존심과 편협된 소견 때문에 빚어진 이 불화사건
은 결국 후에 푸치니 쪽에서 끈덕지게 화해를 모색함으로써 종식되지만 사실
이때 푸치니가 취한 태도는 거의 정신병리학적인 것이라 할 만했다. 이 불화사
건을 통해 푸치니의 가장 혐오스러운 성격의 일면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
나기 때문에 단순히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있을 뿐인 독자들은 확실히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같은 발견은 후세의 우리들에게 결코 유쾌한 일이 못된다. 푸
치니의 3부작 오페라(Il Trittico)인 ‘외투’와 ‘수녀 안젤리카’ 및 ‘잔니 스키키’는
1918년에 완성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뉴욕에서 초연됐는데, 이것은
푸치니가 그의 모든 오페라 가운데 처음으로 리허설에도 공연에도 참관하지
못한 경우였다. 이후 1919년 1월 11일, 로마의 테아트로 코스탄치에서 이 3부
작이 이탈리아 초연을 갖게 됐을 때(이 1막물의 세 오페라는 당시엔 하루 저녁
에 전부 공연하는 게 관례였다) 푸치니는 공연 전반에 걸쳐 세심한 주의와 감
독을 철저히 했다. 작곡가에겐 이것이 진짜 초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
데 그가 심혈을 기울였고 자신감에 넘쳐 기대했던 로마 초연에서 ‘토스카니니
가 공연 도중에 극장을 나가버렸다’는 사실을 작곡가가 알게 되었다. 또한 토
스카니니가 자신은 이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당연히 작곡가는 대단히 기분이 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3부작’의 런던 초연을 앞두고 토스카니니가 코번트 가든과 계
약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1915∼20년의 기간에 예년보다 지휘를 많이
하지 않고 있던 토스카니니는 1919년 봄에 런던에 가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
는데, 이것은 곧 푸치니의 ‘3부작’을 지휘한다는 걸 의미했다. 음악계의 친구들
에게서 이 같은 소식을 들은 푸치니는 격노했다. 작곡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좋
아하지 않는다고 공언하는 지휘자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푸치니
가 이때 보인 반응은 너무도 졸렬하고 거의 야비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
다. 이에 관련해서 그가 항상 마음속 비밀을 주저 없이 털어놓던 영국인 숙녀
시빌 셀리먼에게 보낸 편지는 차라리 외면해 버리고 싶을 만큼 불쾌한 것이다.
“나는 코번트 가든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리코르디에게 항의했어
요. 왜냐하면 나는 토스카니니 같은 ‘돼지’를 원치 않기 때문이지요. 그는 나의
오페라에 대해 온갖 고약한 험담을 했을 뿐 아니라 어떤 신문기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부추기기까지 했거든요. 그의 말은 어떤 기자에게도 먹혀들어가지 않
았지만, 그의 친구 중 하나(‘세콜로’지의)는 그에게 고무되어 아주 고약한 기사
를 썼답니다. ─따라서 나는 이 신(神)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는 내게 아무 소
용이 없어요. 이미 전에도 말했듯이 어느 지휘자가 자신이 지휘해야 할 오페라
를 신통치 않게 생각한다면 그가 그 작품을 적절히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명
약관화한 일이지요.”

♣ 푸치니의 극도의 이기심 때문에 흔들린 우정의 풍향계  

토스카니니가 이 ‘3부작’을 좋지 않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확실히 가능한 일이
었다. 훗날에도 그는 같은 태도를 견지했고, 결코 이들 오페라는 지휘하지 않
았다. 그러나 그가 기자들을 동원해서 악평을 쓰도록 부추겼을 만큼 그처럼 사
악하고 어리석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을 것 같다(푸치니 편지의 수신
인인 시빌 여사의 아들 빈센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결국 토스카니니는 런던
에 가지 않았다. 푸치니는 토스카니니가 런던행을 포기한 것은 그가 런던에 왔
을 경우 작곡가가 스캔들을 불러일으킬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라고 멋대로 생
각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코번트 가든의 매니저와 적절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화의 기간에 푸치니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나타나는 토스카니니
에 대한 언급은 거의 정신분열증이라 불릴 수 있는 경향마저 보인다. 그와 같
은 재능에 그처럼 걸맞지 않은 정신이라니! 재능과 성격의 극단적인 불균형에
천만 번 애석함을 느끼게 된다(예술적 창조의 천재들의 경우 흔히 그렇듯이).
그러나 이로부터 2년 뒤인 1921년 여름, 라 스칼라가 ‘일 트리티코’의 밀라노
초연을 계획하고 있었을 때 푸치니의 토스카니니에 대한 견해는 다시 변하게
된다. 이때 토스카니니는 전후(戰後) 재건된 스칼라의 예술감독으로 거의 전제
적인 지위에 있었던지라 푸치니 편에선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그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지 않는다면 오페라는 기필코
열등한 수준을 면치 못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통
해 토스카니니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백방으로 모색했지만, 그의 책략은 성공
하지 못했다.

푸치니는 토스카니니가 단순히 이 오페라를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토스카니니가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지 않기 위
해서 ‘팔스타프’와 또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작품들만 지휘할 것’이라면서 터무
니없이 그를 매도했다. “그는 진정으로 나쁜 사람입니다. 배신자 같다고나 할
까요. 나는 그가 예술가의 혼을 지녔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예술가의 혼을 지닌 사람들은 그처럼 악의에 가득 차 있지는 않으니까요. 또
한 시샘하는 마음도 없는 것이지요!”(슈나블-로시 백작에게 보낸 편지)

이쯤 되면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사실 이같은
비난의 말은 바로 푸치니 자신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그는 토스카니니가 단지 자신의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를 ‘돼지’라고 욕하며 자신에겐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고 단언했다. 하물며 그
의 런던행을 저지하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와선 토스카니니가
좋아하지 않는 바로 그 오페라를 지휘하지 않으려는 것을 자신에 대한 적의 때
문이라고 악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오페라는 많은 사람들
이 높이 평가하지 않는 작품이기도 했다. 토스카니니와 그는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왔고 그의 여러 오페라들이 오직 토스카니니에 의해 비로소 진정한 생명
을 지닐 수 있게 된 사실을 감안하면, 푸치니의 이 같은 태도는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추한 이기주의의 발로로밖에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의 친구에 대한 평가의 잣대는 자신의 이기심이 아니었던가, 의심하게 된
다. 사춘기 소년도, 20대 청년도 아닌 50대의 성숙한 남자의 의식수준이 과연
그 정도였던가?

푸치니의 이처럼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는 두 사람이 다시 화해한 뒤인 1923
년 6월 새로운 ‘라 보엠’의 스칼라 공연에서 토스카니니가 건강상 이유로 기오
네에게 지휘를 맡겼을 때 다시 한 번 표출됨을 보게 된다. 이 해에 토스카니니
는 열한 편의 오페라를 75회 공연했으며, 그 자신이 한 편 이상 지휘한 작품은
베르디의 오페라뿐이었다.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
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린애처럼 토라져서 기오네가 지휘하는 마지
막 리허설에 참석해달라는 토스카니니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리고는 공연 다
음날엔 슈나블-로시 백작에게 다시 한 번 토스카니니를 원망하는 편지를 보냈
다. “나는 화가 나 있습니다. 그는 이상한 녀석입니다. ‘마농’과 또 나의 영예
를 위해 그 모든 좋은 일을 해준다음에─그러고 나서, 내가 빈에서 초연일을
알려달라면서 보낸 전보에 회답조차 하지 않았어요(이건 사실과 다르다─필
자)…. 그가 앓고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약간의 우정만 있다면, 작은 친절
이나 선의만 있더라도… 충분히 가능할텐데 말입니다.”

이런 사람과 변함없는 우정을 지속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친구에겐 무
조건 희생을 강요하고 자신은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걸 언제까지
나 견딜 수 있겠는가? 오래 전 ‘서부의 아가씨’ 초연 후 푸치니는 격앙된 상태
에서 토스카니니 부처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에겐 진정으로 자기를 이해해 주
는 친구가 없다고 한탄했다. ‘자신은 항상 혼자였고 그 때문에 언제나 행복하
지 못하다’고 고백했을 때 그는 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
을까? 어느 정도는 그것이 그의 과도한 자기중심주의가 초래한 결과였다는 것
을?

♣ ‘마농’의 리바이벌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진정한 화의에 도달

‘일 트리티코’ 불화 이후 끈덕지게 화해를 모색하던 푸치니는 다행히도 1922년
1월,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리골레토’의 스칼라 공연 때 그와의 우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음 시즌에 ‘마농’을 리바이벌하기로 했으며, 그해
8월에 토스카니니는 비아렛조에서 푸치니를 만나 함께 스코어의 수정문제를
논의했다. 오페라의 리허설에 참석한 푸치니는 토스카니니가 “감정과 세련, 감
수성 및 균형의 기적을 이룩했다”고 격찬했다. “나의 음악을 듣는 것이 그처럼
즐거웠던 적은 결코, 결코 없었던 일입니다.” ‘마농’의 리바이벌은 대중을 너무
나 감동시켜 17회의 공연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어떤 오페라도 누리지
못한 횟수였다. 개막 다음날 푸치니는 유력지인 ‘코리에라 델라 세라’에 “‘마농’
에다 진정한 생명을 불어넣어준 토스카니니의 ‘기적’”에 대한 찬사와 감사로
가득 찬 장문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여기서 그는 토스카니니가 작곡가의 참
된 의도를 정확하게 드러내줌으로써 옛 오페라를 대중에게 새로운 오페라로
보이게 했다면서 토스카니니가 스칼라에서 이룩한 저간(這間)의 업적에 대해
장황한 찬사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어젯밤 내가 우리의 토스카니니를 포옹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 그 포옹
은 나의 ‘마농’의 공연에 대한 이기적인 감사의 제스처만은 아니었습니다. 결단
코! 그것은 바로 라 스칼라를 예술적 성화(聖化)와 재성화(再聖化)를 위한 성
전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한 예술가에 대한 다른 예술가의 감사의 표시였던 것
입니다…. 토스카니니에 의해 지도되고 활성화된 에너지의 핵이 결국 어젯밤
일어난 것과 같은 기적을 이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농’을 새로운 오페라
로 보이게 해서─나 자신에게마저 이 오페라가 30년이나 더 젊어 보이도록 했
던 것이지요.”

결국 푸치니는 진정한 예술가의 혼을 지녔기에 이처럼 순수한 예술적 감동에
자신을 맡길 수 있었으며, 유보없는 찬사로 친구의 예술혼을 성화시킬 수 있었
던 것이다. 밀라노를 떠나기 전에 푸치니는 ‘생애 최고의 만족을 자신에게 베
풀어준 ‘마농’에 대한 감사를 담은 편지를 토스카니니에게 보냈다(1923년 2월
2일). “그대는 이 나의 음악을 비길 데 없는 시정과 유연성과 열정으로써 창조
했구려. 어제 저녁 나는 진정으로 그대의 위대한 정신을 온몸으로 느꼈소. 또
한 그대의 옛 친구요 젊은 시절 동료인 내게 품고 있는 그대의 사랑도. 그대가
30년 전의 젊음에 넘치는 나의 열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기에 나는 행복
하다오. 심중 깊이에서 그대에게 감사하오.”

이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푸치니는 후두암으로 타계하지만 (1924년 11월
29일) 결국 순수한 예술적 감동을 통해 두 예술가의 우정이 승화될 수 있었으
니 예술의 힘은 이처럼 위대한 것이다.

** 이덕희씨는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경향신문ㆍ조선일보 문화부 기
자, 서울대학신문 조사부장을 거쳐 중대ㆍ숙대 대학원 강사를 지냈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회생回生>, 산문집 <내 눈의 빛을 꺼다오> <마지막
불꽃이 더 아름답다><내 영혼을 존재케 하는 것은> 등이 있고, 발레 입문서
<발레에의 초대><매혹의 초대>, 평전 <불멸의 무용가들> <음악가의 만
년과 죽음><음악가와 연인들> <음악가와 친구들> <토스카니니> <위
대한 만남> <신화 속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전혜린>, <세기의 걸작
오페라를 찾아서>, 음악산문 <음악혼의 광맥을 찾아서> <짧은 갈채, 긴 험
로>, 편역서 <베토벤 이야기>,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의 <나의 오빠 니진
스키>, 역서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유저遺著<니체 최후의 고백>, 에바 르 갈
리엔느의 <무대의 마술사 두제>, 베르나라 가보티의 <쇼팽>, 리처드 바크
의 <갈매기의 꿈>,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의 <음악 에세이> 외 다수가 있
다. [북토피아 제공]

** 이 글을 퍼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JimmiXS
 ::: GBKBRyOFcydiX  

Name
Memo
Password
 
     
Prev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곽근수
Next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

곽근수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ty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