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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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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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Sydney Opera House



◈ 유투브 영상
Vivid LIVE 2012: URBANSCREEN Light Sydney Opera House
http://youtu.be/o5ZvCv7yUKk

◈ 애물단지에서 보물단지가 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바람을 잔뜩 머금은 채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어디론가 떠가는 흰 돛단
배의 형상을 떠올리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캥거루, 코알라, 오리너구리와
함께 호주(濠洲)라고도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종이
를 접어 만든 듯,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날렵해 보이는 오페라 하우스의 하얀
쉘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태양빛의 세기와 방향과 각도에 따라 색깔과 명암을
바꾸며 시드니 항구 도시 전체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연한 브라운 색의 거대한 기단(基壇 podium)위에 다소곳이 내려앉아있
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방금 물속에서 떠올라 은빛 비늘이 덮인 피부를
드러낸 채 북쪽 바다를 향하여 헤엄치는 두 마리의 하얀 돌고래와도 닮은 오페
라 하우스는 “현대건축 최고의 걸작”,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엄청나게
크지만 “조각 작품과도 같은 건축”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온갖 찬사 가운데 절정은 아마 20세기 최고의 건
축가 중 하나인 루이스 칸(Louis Khan)의 것일 것 같다. “태양빛이 이 건물로부
터 반사되기 전까지 태양은 자신의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그 생김새만큼이나 독특하고도 복잡한 사연을
안고 태어났다.

이야기는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존 캐힐(John Joseph Cahill)을 수반으
로 하는 뉴사우스웨일스 주 정부는 전 세계의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시드니 복
합문화공간에 대한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설계지침은 3,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대공연장과 1,2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소공연장을 갖춘 건물을 설
계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고, 건설비용 또한 제한하지 않았으며, 건
물은 당선작품 그대로 변경 없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모전에는 전 세계로부터 933명의 건축가가 233점의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심
사결과 덴마크의 건축가, 당시 약관 38세였던, 외른 웃존(Jørn Utzon)의 작품
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웃존의 작품은 실격처리 되었어야
하는 처지였다. 웃존이 제출한 도면은 배치도 1장, 평면도 3장, 입면도 5장, 단
면도 2장, 건물 사이의 계단에서 북쪽을 바라본 부분투시도 1장을 포함하여 모
두 12장으로 건물은 대지경계선을 넘었으며, 설계지침에서 요구하는 인원을 수
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웃존의 안은 실격처리 되었다. 웃존을 살려
낸 사람은 미국 세인트루이스 시의 제퍼슨 기념 아취라고도 불리는 게이트웨
이 아취(1947∼1965)를 설계한 저명한 건축가 이로 사리넨(Eero Saarinen)이었
다. 당시 항공 교통편이 오늘날과 같이 발달하지 않았던 탓에 사리넨은 다른
세 사람의 심사위원이 이미 심사를 시작한 이후 시드니에 도착하였다. 뒤늦게
심사위원회에 합류하여 먼저 탈락한 작품들을 훑어보던 사리넨의 눈은 웃존의
비범한 작품에 멈추었고, 이후 사리넨의 강력한 추천과 설득에 의하여 심사위
원 전원은 웃존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전의 건축물에서
는 볼 수 없는 풍부한 창의적 독창성과 함께 가장 경제적이라는 선정이유도 붙
여졌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독특하고도 복잡한 사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58년부터 시작한 공사는 1단계 기단(1958∼1961), 2단계 콘크리트 쉘(1962∼
1967), 3단계 외부 유리벽 및 인테리어(1967∼1973)로 나누어 무려 16년간 진행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크고 복잡한 복합건물의 건립을 12장의 도면으로 시작
한 필연적인 결과, 공사를 마치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설계는 계속되었다. 오
늘날 TV 드라마를 제작할 때 시청률에 민감한 나머지 배우들이 촬영 당일 또
는 촬영 순간에 받는다는 시나리오, 소위 ‘쪽 대본’의 개념과 유사한 ‘쪽 도면’
방식으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공사는 진행되었다. 구조, 기계, 전기 및 시
공엔지니어들은 웃존만 바라보고 도면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작업하였으니 공
사의 진척은 자연스레 매우 늦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설계와 함께 공사가 진척
되다보니 1973년 준공 당시 파이프 오르간을 제외한 최종공사비는 모두 여덟
번의 수정을 거쳐 공모전 당시 웃존이 제출한 12장의 도면에 의하여 책정되었
던 최초 예정공사비의 무려 15배가 되었다. 예정 공사비가 수정 증액될 때마다
공사비 증액에 대한 모든 비난은 공사를 총괄 지휘하던 웃존에게 쏠렸고, 1965
년 뉴사우스웨일스 주 정부의 정권이 교체되자 이를 빌미로 웃존에게 사임 압
력이 가해졌다. 결국 웃존은 2단계 콘크리트 쉘 공사가 마무리되기 바로 전 해
인 1966년 초에, 3단계 공사를 위한 외부 유리벽 및 인테리어 설계를 진행하던
중,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프로젝트 총괄책임 건축가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
다.

그러나 주정부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건립 개시와 함께 재원 마련을 위한 법
을 제정하여 복권판매를 시작하였었고, 실제로 웃존이 사임하기 전까지 투입
된 건설비용의 상당부분이 복권판매를 통하여 충당되었다. 또한 주정부는 건설
예산 마련에 대한 걱정과 여론악화를 우려한 나머지 설계공모 이후 1년여 만
에, 오페라 하우스의 설계가 완성되기도 전에, 1단계 기단 공사를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웃존에게 설계를 완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은 채 공사를
시작하게 하여 ‘쪽 도면’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공하였
다. 따라서 늦은 설계진척 및 변경으로 인한 공사비 증액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
로 웃존에게 전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언론
매체는 웃존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정치인들은 이를 답보상태에 빠진 오
페라 하우스 건설공사 지연 및 빈번한 공사비 증액으로 인하여 악화된 여론으
로부터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고자 국면전환용으로 활용하였다. 주정부나 웃
존 모두에게 나름대로의 사정은 있었겠지만 문제는 결국 상황파악 부족과 소통
의 부재에 있었다고 하겠다.

상황이 이처럼 어렵게 전개된 데에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건축물 자체의 복
잡한 특성도 한몫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건축구조물은
길이가 183m이고,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가 120m로 대지 17,800m2의 면적을
덮고 있으며, 제일 큰 쉘까지의 높이가 해발 65m에 이르는 규모다. 국제축구연
맹에서 규정하는 축구장의 크기가 길이 110m 이내이고, 너비가 75m 이내임을
감안하면 오페라 하우스 건축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두 개의 공연장
을 덮고 있는 두 그룹의 쉘의 축은 남북을 향하고 있으며, 남에서 북으로 갈수
록 사이가 벌어지며 서로 간에 약간 기울어져 있다. 이런 규모의 건물을 건립하
는 것이 당시의 장비 및 기술수준으로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지는 오페라 하우
스 건립에 따라붙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수식어를 보면 더욱 실감난다.  

●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크레인을 사용한 건축물
● 축소모형실험(縮小模型實驗 Scaled Model Test) 기법을 활용하여 설계한
최초의 건축물
●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구조해석을 수행한 최초의 건축물
●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건설공정관리를 수행한 최초의 건축물
● 풍동실험(風洞實驗 Wind Tunnel Test) 기법을 활용하여 설계한 최초의 건축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기단은 길이 183m, 폭 95m, 높이 해발 25m로 시드니
항구 베넬롱 곶(岬) 육지위에 해수면으로부터 25m 깊이까지 박힌 588개의 말
뚝에 의하여 지지되어있다. 결국 웃존의 설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1단
계 공사인 기단의 시공을 강행하였던 탓에 막상 2단계 공사인 쉘의 설계가 완
성된 후에는 애초의 예상보다 더 크고 무거워진 쉘을 지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미 완성된 기단부 기둥을 철거하고 다시 시공하여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였
다. 하지만 이는 쉘 자체의 설계 및 시공의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
다.

공모전 당시 최초 예정공사비를 산출한 근거가 되었던 애초의 쉘은 지붕과 벽
의 역할을 하기에 적절한 기하학적 형태가 아니었다. 즉 엄청난 높이와 스팬으
로부터 가해지는 쉘 자체의 무게에 더하여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강풍 또는 가
끔씩 발생할 수도 있는 지진에 저항하려면 쉘의 두께를 상당하게 늘려야 하고,
이는 다시 쉘 자체의 무게를 증가시키는 과정이 반복되어 웃존이 공모전을 준
비하던 당시 상상하였던 형상의 쉘을 유지할 수 없었다. 더욱이 콘크리트를 현
장에서 부어넣기 위하여 거푸집을 설치할 경우 공사비와 공사기간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조엔지니어 오브
아럽(Ove Arup)과 그의 엔지니어들과 협력하여 수행한 많은 연구 결과, 쉘의
강성(剛性 rigidity)은 적정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무게를 줄이고 현장에서 거푸집
을 설치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으로, 현재 오페라 하우스에 적용된, 뼈대(ribs)
있는 조립식 콘크리트 쉘이 탄생하게 되었다. 본디 쉘(shell)이라 함은 조개나
달걀 등의 껍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건축에서는 넓은 공간을 덮는 얇고
가벼운 부재를 일컫는다. 따라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쉘’은 엄밀하게 말하
자면 쉘이라기보다는 조립식 콘크리트 뼈대가 지탱하는 조립식 콘크리트 패널
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원론적인 해법에는 도달하였지만, 아직도 웃존의 원안과 그 후 수정된 포물선
형 또는 타원형의 쉘로는 두께가 매우 두꺼워야 함은 물론이고 조립식 공법의
장점을 살릴 수도 없었다. 즉 건축물의 건립에 조립식 공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같은 모양과 크기의 부재를 가급적 많이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생산과 조립
을 용이하게 하고, 그 결과 대량생산방식으로 공사비용과 공사기간을 줄이려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쉘의 기학학적 형태를 웃존의 원안이나 포물선형
또는 타원형으로 유지할 경우 쉘을 이루는 다양한 곡선의 곡률(曲律 curvature)
로 인하여 모든 조립식 부재의 크기와 형상이 달라짐으로써 굳이 조립식 공법
을 사용하여야 할 이유가 없어지거나 현장타설(現場打設 cast-in-place)로 콘
크리트를 부어넣어 시공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예상되는 것이었
다. 문제는 쉘의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부분에 적용할 수 있는 곡률의 조립식
부재를 가능케 하는 기하학적 형상의 쉘이 과연 존재하는 가로 압축되었다.

이 문제는 1단계 기단 공사가 진행되는 기간 내내 웃존과 아럽을 괴롭혔으며,
따라서 2단계 쉘 공사를 위한 설계 작업은 매우 느리게 진척될 수밖에 없었다.
웃존과 아럽은 1957년부터 196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시공 가능
한 쉘의 기하학적 형태를 찾기 위하여 무려 12가지 이상의 대안을 만들며 이 문
제에 매달렸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는 법. 드디어 웃존과 아럽은
1961년 중반에 더없이 아름다운 해(解 solution)를 발견하게 된다. 즉 반지름
75.2m인 구(球 sphere)의 표면으로부터 떼어낸 여러 크기의 삼각곡면을 좌우
대칭으로 세워 오페라 하우스를 구성하는 다양한 크기의 쉘을 구현할 수 있었
다. 이는 쉘의 크기와 상관없이 동일한 곡률의 몰드를 사용하여 조립식 부재를
생산하게 되는 획기적인 안(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쉘의 바람직한 기
하학적 형태가 결정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형
태가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설계자가 의도한대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지
검증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처럼 선례(先例)가
없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를 위하여 설계팀은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의
쉘에 분포하는 복잡한 응력상태를 점검하고자 컴퓨터를 이용한 구조해석을 수
행하였다. 또한 축소모델을 이용하여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쉘에 미치는 영향
을 알고자 풍동실험을 수행하였다. 컴퓨터를 이용한 구조해석과 풍동실험을 이
용한 구조설계가 오늘날에는 그리 특별한 것으로 보이지 않겠지만,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기단과 쉘
의 설계 및 시공이 진행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동일한 구를 이용하여 다양한 크기의 쉘의 형태를 결정한 이와 같은 천재적인
해결책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누가 최초로 제안했는가의 논란이 있기 마련인
데,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웃존, 아럽, 또는 아럽의 엔지니
어 중 한 사람이겠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오페라 하우스
의 쉘은 모두 2400개의 뼈대부재와 4000장의 패널부재가 현장에서 생산되고
조립되어 만들어졌다. 그리고 쉘의 외부, 비늘로 덮인 듯 아름다운, 흰색 표면
은 100만장 이상의 세라믹 타일을 지상에서 생산된 4253매의 조립식 ‘V’형 콘크
리트 패널에 대각선 패턴으로 접착제를 사용하여 붙인 후 이미 완성된 쉘 구조
물에 고정하여 구현하였다.

2단계 쉘 공사가 완료되기 바로 전 해인 1966년 웃존이 물러난 후, 주정부 공공
사업성은 웃존을 대신하여 3단계 유리 외벽과 인테리어 설계를 완성하고 공사
를 총괄할 책임자로 오스트레일리아 건축가 피터 홀(Peter Hall), 데이비드 리틀
모어(David Littlemore), 리오넬 타드(Lionel Todd)를 임명하였다. 이들은 대공
연장과 소공연장의 용도 확정 및 음향문제 해결에 따른 좌석배치, 객석 사이의
통로, 기단 외벽마감, 유리 외벽 등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웃존의 안을 살리고
자 하였다. 이들이 특히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공연장 내 음향설계였다. 음향설
계는 빌헬름 요르단(Vilhelm Jordan)이 공연장의 축소모델을 만들어 작업하였
는데, 이 때 정립된 이론이 건축음향설계 및 음향과학의 발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을 정도이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973년 10월 20일 시드
니 오페라 하우스는 엘리자베스 2세(Queen Elizabeth II) 영국 왕에 의하여 준
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웃존을 대신한 건축가들의 설계에 의하여 대공연
장인 콘서트홀은 무대 좌우와 뒷면에까지 객석을 배치하여 2679석의 객석을 갖
추게 되었고, 현재 1만개 이상의 파이프가 장착된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
르간을 갖추고서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 전용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
면무대를 갖춘 소극장은 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단과 발레단의 전용공연장으
로 1503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다. 쉘을 지지하고 있는 기단에는 여러 소규모의
공연장 및 오페라 하우스 전체 공연장의 기능을 지원하는 각종 기계실을 비롯
하여 무려 1000여개의 방이 들어서 있다.

이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복잡하고도 독특한 사연을 마무리 하는 것으로
이글을 맺으려 한다. 창의적 상상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사교적이고 카리스
마가 넘치는 인물이었던 웃존은 사임할 당시의 상황에 크게 실망하여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났다. 웃존이 떠난 후 뉴사우스웨일
스 주정부는 웃존이 떠나기 전까지 투입했던 공사비 총액 이상의 금액을 추가
로 투입하고서야 오페라 하우스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웃존은 준
공식에 초대되지 않았으며, 이름조차 불리지 않았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공식적인 총공사비는 A$ 102,000,000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1973년 준공 이후
현재까지 10만회 이상의 공연에 45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입장하였고, 1억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총공사비의 서너 배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기록되었다. 한마디로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시드니를 넘어, 뉴사우스웨일스 주를 넘어, 오스트레
일리아 국민의 자부심이자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2007년에는
UNESCO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광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진가가 발휘되자 오페
라 하우스 이사회는 1990년대 후반부터 웃존과의 화해를 시도하였으며, 웃존
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사회는 1999년에 웃존을 오페라 하우스 미래의 수선 및
보수작업을 위한 자문건축가로 추대하였으며, 2004년에는 기단에 있는 연회
장 내부를 웃존의 설계로 개조하여 웃존의 이름을 따라 〈The Utzon Room〉
이라 명하였다. 그리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공로를 국제사회로부
터 인정받은 웃존은 2003년 건축계 최고 영예의 프리츠커 상(Pritzker Prize)을
수상하였다. 이래서 결말이 좋은 모든 과거는 다 아름답게 보이는가 보다.

◈ 출처 / 김장훈(아주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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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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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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