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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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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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Opera Bastille, 파리)




◈ 유투브 영상
정명훈이 바스티유의 예술감독이 되고 가진 TV 인터뷰
http://youtu.be/PebjR-10PtU

파리에 세워진 근대적 오페라 하우스로 1989년에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미테랑
의 <위대한 프로젝트, Grands Travaux> 정책에 의해서 건립된 일련의 근대적 건축
물 가운데 하나다. 이로써 파리엔 팔레 가르니에(Palais Garnier)와 바스티유 오페
라 하우스 등 2개의 오페라 극장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체로 팔레 가르니에에서는
오페라 중심의 공연이 이루어지고, 바스티유에서는 오페라, 발레, 콘서트 등이 무대
에 올려지는 것으로 역할분담이 형성되고 있다. 설계는 우루과이 출신의 카를로스
오트(Carlos Ott)가 맡았고, 12세기 이래로 감옥으로 사용되던 터에 세워졌다. 객석
은 메인 홀이 2,703석이고, 소극장과 스튜디오가 병설되어 있다.

◈ 역사
“대중 친화적이고 근대적인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아이디어는 가르니에가 설계
해서 개관된 파리 국립 오페라 극장이 개관된 이듬해부터 이미 관계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게 1880년대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빛을 보지 못
한 채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따금씩 국립 오페라 극장만으로 해소되기 어려
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근대적인 오페라 극장에 대한 담론이 고개를 내밀었고, 그
러던 가운데 1965년부터 1968년까지 국립극장에서 무대감독으로 일했던 쟝 빌라
(Jean Vilar)가 대중적인 극장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을 내 놓았고, 여기에 피에르 불
레즈 같은 영향력 있는 음악인이 화답을 하면서 새로운 오페라 극장 건설에 관한 담
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고위직 공무원이었던 프랑소와 블로흐 라이네
(Francois Bloch-Laine)가 1977년에 <오페라의 경영과 전망>이라는 리포트를 발표
하면서 공론화의 수순이 시작되었다.

1981년, 프랑스의 새 대통령에 당선된 미테랑의 <위대한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
으로 잘 알려진 크고 기념비적인 현대적 건물을 세우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파
리 북서부 지역에 음악을 연주하는 복합센터를 건립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주
요 내용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지역은 전통적으로 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
었던 곳인데다 프랑스 혁명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역사적 장소였기에 <대중친화적
>인 음악센터를 짓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정부는 이 프로젝트의 추진을 위해 <오페
라 바스티유 공사>를 설립하고 설계공모에 들어갔다. 그 결과 756명의 경쟁자를 제
치고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우루과이 출신의 카를로스 오트의 설계가 당선작
으로 결정되었다. 1983년의 일이었다.  

본격적인 공사는 1984년에 시작되었다. 우선 바스티유 기차역(1859-1969년)을 철
거했다. 그러나 1986년에 당시 파리 시장이었던 쟈크 시라크는 이 프로젝트를 취소
하려는 시도를 했다. 허지만 미테랑의 뚝심으로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되었다. 원래
의 계획은 작은 홀과 대형의 다목적 홀로 구성되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피에르 불레
즈가 파리엔 현대음악을 연주할 적절한 공간이 없다면서 그에 맞는 설계 변경을 강
력하게 요구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콘서트 홀은 원형극장의 형태로, 현대음
연주공간은 스튜디오 형태로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건축비도 당초의 예산을 훨씬
초과한 2천6백만 프랑이 들었다.

1989년 7월 13일,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1789년 7월 14일에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이 되었다)200주년이 되는
날에 미테랑 대통령이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개관식엔 33개 나라의 정상들이 참석
했다. 개관을 축하하는 갈라 콘서트는 조르즈 프레트르가 지휘하고 테레자 베르간
자, 플라시도 도밍고 등이 출연했다. 그러나 개관식이 열린 그날까지 건물은 미완성
이었다. 이 극장에서 처음 오페라가 상연된 것은 1990년 3월 17일이었다. 루이지 핏
치(Pier Luigi Pizzi)가 지휘한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인>이 개막작이었다.

오페라 바스티유는 일부 '가진 자들만의 향유물'이던 예술 주권을 시민들에게 나눠
주는 문화혁명의 발상지가 됐다. 오페라 바스티유가 생기기 전 파리의 유일한 오페
라극장이었던 팔레 가르니에(1875년 개관)의 입장료는 최고 1천5백프랑(약 23만
원)이었다. 오페라 바스티유는 그것을 절반이하인 6백70프랑(약10만원)으로 깎아
내렸다. 서민들의 발길이 하나둘 이어졌고 바스티유와 가르니에를 함께 관장하는
파리 국립 오페라(ONP)는 오늘날 연간 8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자랑한다. 과거
20%를 조금 웃돌던 10~30대 관람객들이 요즘엔 38%에 이르고 발레 공연에서는
47%까지 올라간다. 공연예술 중에서도 가장 귀족적인 오페라의 대중화를 통한 예술
인구의 저변 확대, 그것이 프랑스 정부의 문화정책이며 그 첫 단추를 꿴 사람은 프
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다. 오페라 바스티유는 루브르 박물관 광장의 피라미드,
라 데팡스의 신개선문, 프랑스 국립도서관 등과 함께 20세기말 프랑스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건축 사업 '그랑 트로제'의 일환이다.

◈ 디자인
거대한 선박의 모습을 형상화한 오페라 바스티유는 연면적 16만㎡, 높이80m(지하
30m), 총수용인원 3천5백명으로 파리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 재무부 청사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건물이다. 객석은 2,723석이었다가 2,703석으로 개조되었고, 홀의 후
방에 2개의 대형 발코니 좌석이, 측면엔 길고 좁은 발코니좌석이 있다. 18세기에 지
어진 오페라 극장에 필수적으로 있는 박스 석이 이 극장엔 없다. 물론 로열 박스나
프레지던트 박스 같은 좌석도 없다. 2005년에 싼 가격으로 공연을 보게 하는 스탠
딩 룸이 2개 신설되었다. 오케스트라 피트는 130명의 연주자들이 앉을 만큼 넉넉하
다. 그러나 전반적인 음향상태는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것이 중평이다. 오페라ㆍ발
레를 위한 대극장, 연극ㆍ무용 등을 공연하는 원형극장(4백50석), 기타 공연과 전시
가 열리는 스튜디오(2백37석)등을 갖춘 초대형 공간의 탄생으로 혁명의 거리가 문
화의 거리로 탈바꿈했다.

◈ 논쟁과 트러블
극장이 문을 열고 10여 년간은 트러블과 논쟁이 그치질 않았다. 1987년, 파리 국립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던 다니엘 바렌보임이 초대 예술감독에 임명되었
다. 그러나 1989년 1월, 바렌보임의 임기가 6개월이 남았을 무렵에 극장 회장인 피
에르 베르제(Pierre Berge)는 바렌보임을 해고한다. 바렌보임에게 지급되는 보수를
절반으로 깎겠다는 극장 측의 통보를 바렌보임이 거절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진
실은 그게 아니었다. 바렌보임을 임명한 것은 우파 정권이었는데 보르제는 좌파에
속한 인사였던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자 음악계는 발칵
뒤집혔다. 파트리스 쉐루(Patrice Chereau)는 갈라 콘서트의 출연을 보이콧 했고, 피
에르 불레즈는 감독이사 직에서 사임했으며, 카라얀, 솔티 등 저명한 지휘자들은 바
스티유 오페라에서 지휘하지 않겠다는 성명서에 사인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바
렌보임의 후임자를 선정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난항 끝에 당시 프랑스 악단에
매우 생소한 인물이었던 한국 출신의 정명훈이 제2대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90년 5월에 정명훈이 지휘하는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정명훈의 임기는 2000년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1994년의 선거에서 승리한 우파
연합이 정권을 잡자 상황이 급변했다. 정명훈을 밀어주던 베르게의 임기가 끝난 데
다 새로 회장에 취임한 위그 갈(Hugues Gall)이 정명훈의 사퇴를 밀어부쳤다. 프랑
스의 사법부가 정명훈의 임기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은 그의 극장 출입을
막았다. 결국 정명훈은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후임에 네덜란드 출신
의 후베르트 조단트가 임명되었다. 정파싸움을 예술계까지 끌어들인 연이은 해임조
치는 불미스런 일로 해석되어 프랑스 사회 내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 퍼 가는 것은 좋으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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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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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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