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음악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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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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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 Festival)



▶ 사진 /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루트비히 2세

▣ 유투브 감상
1978년 페스티발, Tannhäuser 제2막 실황
http://youtu.be/JAWBJ9yjJ-Q

바그너의 오페라와 악극만을 전문적으로 상연하는 페스티발로서 바그너 자신의 포
부와 프로모션으로 독일 바이로이트 지방의 언덕위에 건설된 축제극장에서 매년 7
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개최되고 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하우스는 바그너 자신의 설계 컨셉에 따라 건설되었다. 자신
이 작곡한 오페라와 악극을 자신의 이상에 따라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
고, 그때까지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 하우스와는 완전히
차별되도록 지어졌다. 이 극장은 바그너의 작품을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에겐 마치
성지순례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축제 기간에 올려지는 작품을 보기 위해서 티켓
을 신청하고서 수년간을 기다려야하는 전통도 이 축제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 축제의 기원
축제의 기원은 바그너가 경제적 독립을 원했던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가장
강력하고 열렬한 후원자였던 바바리아의 루트비히 2세가 애초에 축제를 벌이겠다
고 생각했던 뮌헨에서 자기를 축출 하는 등 둘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바그너는 <마
이스터징거> 같은 작품의 주제적 의미를 강조할 수 있는 뉴렘베르크를 다음 후보지
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스 리히터의 권유에 따라서 3가지 뚜렷한 장점이
있는 바이로이트를 주목했다.

첫째, 바이로이트는 프레데릭 대제(大帝)의 누이인 소피 빌헤르미네(Friederike
Sophie Wilhelmine)와 그녀의 남편 마르그라베  프레데릭(Margrave Frederick)을 위
해서 1747년에 마르그라베 오페라 하우스(Margravial Opera House)가 건립된 도시
였다. 이 극장은 크기도 컸고, 음향도 매우 좋아서 바그너의 이상에 딱 들어맞는 곳
이었다. 둘째, 바이로이트는 재정적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서 1864년에 판권을 팔았
던 자신의 작품을 독점적으로 상연할 수 있는 도시였다. 셋째, 바그너 자신의 예술
적 행위를 방해할만한 경쟁이 없는 도시였다. 축제가 열린다면 바그너의 문화적 지
배력이 성공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도시였다.

그러나 1870년, 바그너와 코지마가 바이로이트를 방문하고 오페라 하우스를 점검
한 결과 자기들의 작품을 상연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극장은 18세
기 바로크 오케스트라에 적합하도록 지어진 건물이었고, 따라서 큰 편성의 오케스
트라와 복잡한 무대조건을 요구하는 바그너의 작품을 상연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이
었다. 바그너는 새로운 극장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1873년엔 축제를 열겠다는 계획
도 확정했다. 기금 마련을 위해 당시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를 만났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자 라이프치히와 프랑크푸르트 등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기금모금 연주
회를 여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금모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 무렵 바그너의 친구이자 옹호자인 에밀 헤케
르(Emil Heckel)의 제안으로 라이프치히, 베를린, 빈에 바그너 협회가 조직되었다.

1872년 말까지 바그너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위해 바그너 협회와 기타 모금활동의
모든 채널이 가동되었지만 목표에 이르지 못했고, 또 다시 비스마르크에게 기금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바그너는 하는 수 없이 루트비히 2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왕은 이를 허락하면서 1874년 1월에 10만 탈러(Thaler)를 제공했다. 설계는 고트프
리트 젬퍼(Gottfried Semper)가 했고 건축도 착수되었다.  

▶ 초기 역사
바이로이트 극장의 낙성식은 1876년 8월 13일에 <라인의 황금>을 상연하면서 거행
되었다. 낙성식엔 빌헬름 황제를 비롯해서 브라질의 돔 페드로 2세 황제, 루트비히
왕(왕은 비밀리에 참석했다. 황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라는 설이 있다), 수많은 귀
족들, 축제 설립에 많은 도움말을 주었던 철학자 니체, 작곡가 브루크너, 그리그, 차
이코프스키, 리스트, 아서 푸트 등이 참석했다. 축제는 성공적이었다. 차이코프스키
는 “바이로이트에서 일어난 이 일은 우리들의 손자와 그들의 자식에 까지 기억될 것
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재앙이었다. 바그너는 다음해에 제2회 축제
를 가지려던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런던으로 가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
한 방책의 하나로 콘서트 시리즈를 지휘했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축제가 살아남은 것은 정부의 개입과 바그너 협회의 캠페인, 무엇보다도 루트비히
2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축제의 초기엔 전세계에서 온 재능 있는 지휘자, 가수들이 무료로 무대에 섰다. 그
가운데는 1876년에 한스 리히터(Hans Richter)가 지휘한 <반지> 사이클, 바그너에
의해서 발탁된 젊은 지휘자 헤르만 레비(Hermann Levi)가 1882년에 지휘한 <파르
지팔> 이 있다. 이 공연엔 작곡가 잉글버트 훔퍼딩크의 조력도 있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자 코지마가 축제를 관리하면서 남편이 남긴 10곡의 오페라
를 축제를 통해서 완전히 소개하는 성과를 일구어 냈다. 헤르만 레비는 20여 년간
축제의 수석지휘자로 재임하면서 스승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데 진력했고, 펠릭
스 모틀(Felix Mottl)은 1876년부터 1901년까지 지휘자 등으로 간여했고, 1920년대
까지 루트비히 왕의 후원이 지속되었다. 코지마는 <파르지팔> <니벨룽의 반지>
등 남편의 작품에서 단 한 소절도 생략하거나 수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
도 긴 상연시간 때문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청중들의 편의를 고려해서 일부를
삭제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코지마는 모든 작품은 바그너가 악보에 표기한 그대
로 상연되는 원칙을 고수했다. 심지어는 아들 지그프리트의 제안도 그녀는 받아들
이지 않았다.

1906년에 코지마가 은퇴하고 아들 지그프리트가 축제를 운영하면서 새로운 무대와
공연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그러나 1930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축제
의 운영은 그의 아내 비니프레트 바그너(Winifred Wagner)에게 넘어갔고, 하인츠 티
에트엔(Heinz Tietjen)이 예술감독으로 들어왔다.

▶ 나치 치하의 바이로이트 축제
히틀러에게 바그너는 독일인의 이상적 모습이 투영된 완벽한 인물이었고, 그의 음
악은 독일 음악의 척도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수많은 강제수용소에 있
는 유대인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공포에 떨면서도 밤낮으로 스피커를 통해 나오
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어야 했고,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극장에서는 매번 바그너의
작품을 공연하며 히틀러를 찬양했다.

1920년대, 나치당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직전에 비니프레트는 히틀러와 매우 친밀
한 관계를 가졌다. 그녀를 비롯해서 축제의 지도자들 상당수가 “독일 문화를 위한
전투”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장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사상(로젠베르크는 모더니
즘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을 타락한 예술가라고 공격했다)에 동조하는 나치당원이 되
었다. 축제는 제3제국 관리 하에 들어갔다. 또한 아이러닉하게도 당시엔 유태인과
외국인 가수들이 출연하는 축제에 히틀러가 참석하기도 했다. 물론 후일 유태계와
외국인 가수들은 독일에서 모두 불법적인 존재가 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망명하게
되지만 나치 초창기엔 비독일인에 대한 눈에 띠는 차별은 없었다. 그 가운데는 히틀
러가 좋아했던 당시 최고의 스타 싱어이자 유태인 여성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던
헬덴테너 막스 로렌츠(Max Lorenz)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히틀러는 파시즘에 대해
서 격렬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토스카니니에게 편지를 보내서 바이로이트 축제를
이끌어 주기를 간청한 일도 있었다. 물론 이 배경엔 비니프레트 바그너가 있었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이 제의를 거절했다. 이후 나치당이 독일을 완전하게 지배하
면서부터 바이로이트에서 행해진 바그너 공연은 나치의 문화적 수준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카를 엘멘도르프(Karl
Elmendorff)가 축제의 수석지휘자를 지냈다.

히틀러 치하에서 바그너가 창안했던 19세기 풍의 무대장치에 변화가 왔다. 이런 변
화에 대해서 토스카니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바그너의 작품을 지휘했던 지휘
자들과 바그너 일가는 바그너를 더럽히는 일이라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히
틀러는 변화를 승인했고, 이로써 축제는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2차대전 중,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나치에 인수되었고, 전선에서 후송된 부상병들
을 위한 공연을 했다. 부상병들은 공연에 앞서 바그너에 대한 강의를 반드시 들어야
했다. 이로써 축제는 매우 지루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총통의 손님이라는 자신들
의 신분 때문에 불평도 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비니프레트는 나치에 의해서 죽
임을 당했던 유태인 가수들을 위한 기념물을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
들을 추념하는 기념물은 비니프레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바이로이트에 세워졌다.

▶ 새로운 축제
2차대전 당시 바이로이트의 3/2가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 축제극
장은 폭격의 화를 면했다. 전쟁 후 열린 재판에 회부된 비니프레트는 바이로이트 축
제와 그 재산의 관리권을 몰수당하는 판결을 받았고, 관리권은 그녀의 두 아들 빌란
트(Wieland)와 볼프강(Wolfgang)에게 승계되었다. 그리고 축제극장은 이 지역을 점
령한 미군들의 리크리에이션과 종교시설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공연은 코미디, 무
용, 아크로바틱 등 대중적인 것만이 허용되었고, 오페라는 유일하게 리하르트 슈트
라우스의 <박쥐>가 상연되었을 뿐이다. 이 극장이 다시 바이로이트 시에 관리권이
넘어간 것은 1946년이었다. 바이로이트 교향악단의 콘서트와 피델리오, 나비부인,
라 트라비아타 등 몇 편의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가 정식으로 다시
시작된 것은 1951년으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과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이 연주되면서 부터였다.

바그너의 큰손자 빌란트(Wieland Wagner, 1917-1966)는 혁명적이라고 불릴만큼 과
감한 개혁을 통해서 <새로운 바이로이트>를 추진했다. 무대에서 자연주의적인 정
교한 세트는 사라지고, 근대의 미니멀리즘적 무대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바이로이
트 역사상 처음으로 오페라의 끝에 가서 청중들이 야유를 퍼붓는 현상도 나타났다.
특히 1956년에 상연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에서 관객의 조롱을 당했다.
“신성한 독일의 전통”을 깼다는 것이 당시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빌란트의 연출
은 '뉘른베르크 없는 명가수'라고 불릴 정도로 상징적인 것이었다. 꽃피는 나무는
무대 위에 커다란 볼을 매달아 대신했고, 중세의 꼬불꼬불한 골목길들은 무대 바닥
에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등 미니멀리즘이 충실하게 반영된 세트였다.  

빌란트는 눈에 보이는 세트나 의상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적 경험을 청중들
에게 제공하는 연출로 승부를 걸며 자신의 변화를 밀고 나아갔다. 그 결과 점차 그
의 새로운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확대되었고, 많은 평론가들이 그가 연출
한 바그너의 오페라가 보여주는 유니크한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
로써 빌란트는 바이로이트에서뿐 아니라 세계 여러 극장에서 오페라 연출가로서 명
성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빌란트는 1966년 10월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49살이었다.

빌란트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볼프강이 축제의 관리와 연출을 맡게 되었고, 당연히
형과 동생의 연출에 대한 비교가 등장했다. 빌란트가 혁신적인데 반해 볼프강은 그
혁신을 퇴보시켰다는 비판도 있었다. 형의 연출이 이성적이었다면 동생의 연출은
감성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볼프강은 자연적이고 낭만적인 전쟁 이전의 스타일
을 복원시키는데 진력했다.  

1973년, 바이로이트 축제의 자산은 바그너의 가족들과 주정부가 파견한 인사들로
구성해서 새롭게 조직된 바그너 기금(Wagner Foundation)으로 넘어갔다. 이 기금
의 회장은 볼프강이 맡았고, 축제의 관리도 그가 맡았다.

▶ 바이로이트 워크샵
볼프강이 축제의 관리를 책임진 1970년대부터 바이로이트 워크샵으로 불려지는 새
로운 감독(연출자)들에 의해서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스템에 의
해서 연출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울러 볼프
강 자신도 축제의 관리와 연출을 동시에 감당하기가 벅차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
면서 연출은 새로운 감독들의 몫으로 넘기기 시작한다. 그 결과 같은 작품을 같은
방식으로 해마다 무대에 올리기보다는 매번의 연출에 새로움을 더하는 변화가 오
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 속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영화로 만들었던 스
웨덴의 감독 잉그마르 베르그만(Ingmar Bergman)이 축제 감독으로 초빙되었다.

바이로이트 워크샵 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제작은 프랑스 출신의 연출가 파트리
스 세로(Patrice Chéreau)의 연출로 무대에 올려진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 100주
년 기념 공연이었다. 그의 연출은 19세기의 무대 세트를 업그레이드한 것이었는데,
이는 버나드 쇼의 해석에 따른 것으로, 쇼는 19세기의 자본가들이 부유해진 것은 노
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얻은 것이라는 사회적 해석을 한바 있었다. 청중의 반
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파티루스의 새 연출을 환영하는 편과 이를 야유하고 공격하
는 편이 갈라져서 일대 소동을 벌였다. 축제 역사상 전례가 없던 소동이었다. 그러
나 무대에 선 공연자들과 중립적인 청중들은 오페라 세계의 최고의 장면들을 즐겼
다.  

바이로이트 워크샵은 이밖에도 쟝 피에르 폰넬레(Jean-Pierre Ponnelle), 피터 홀
(Sir Peter Hall), 괴츠 프리드리히(Götz Friedrich), 헤리 쿠퍼(Harry Kupfer),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 등 프랑스, 영국, 독일의 명연출가들을 초빙해서 무대를 맡겼
다. 결과적으로 이 시스템을 만든 볼프강으로 인해서 다수의 실험적 감독들의 조력
을 받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서 바이로이트 축제는 젊어졌고, 바그너의 오페라를
이끄는 세계적인 리더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 21세기의 바이로이트 축제
2008년 8월말, 볼프강이 은퇴하자 21인으로 구성된 축제 이사회는 그의 딸 에바 바
그너 파스퀴에(Eva Wagner-Pasquier)를 후임 회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볼프강은
은퇴 이후에도 한동안 그의 둘째 부인 구드룬(Gudrun)과 둘째 딸 카타리나
(Katharina)를 통해서 원격관리를 했다. 2007년에 구드룬이 죽자 에바와 카타리나
가 공동감독으로 축제를 이끌기 시작했다. 이로써 바이로이트 축제는 바그너의 직
계 후손들에 의해서 관리되는 전통이 지켜졌다. 에바와 카타리나는 그들의 사촌들
가운데 니케 바그너와 게라르트 모르티어를 연출진용에 영입하고, 지휘자 크리스티
안 틸레만은 새로운 연출자들의 수석고문직을 수락했다.

바그너 탄생 200주년에 해당되는 2013년 축제는 7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개최
됐다. 102번째의 축제였고, 약 한 달 동안 바그너의 작품 8곡이 공연되었다. 오프닝
무대는 7월 25일에 얀 필립 글로거(Jan Philipp Gloger)의 지휘 아래 <방랑하는 네덜
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이었다. 크리스티안 틸레만(Christian Thielemann)이
지휘했고 무대감독 크리스토프 헤처(Christof Hetzer)와 의상감독 카린 유트(Karin
Jud)의 참여로 상연되었다. 아울러 <로엔그린 Lohengrin>과 <탄호이저
Tannhäuser>가  한스 노이엔펠스(Hans Neuenfels)와 세바스티안 바움가르텐
(Sebastian Baumgarten) 지휘 아래 공연됐다.

▶ 티켓
바이로이트 축제 기간에 판매되는 티켓은 총 5만8천매인데 이를 구입하기를 희망하
는 사람들은 5십만명에 달한다. 티켓의 배정은 추첨으로 결정되고 각 나라와 지역
의 바그너 협회를 통해서 티켓을 주었다. 티켓구매를 신청하고 적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축제의 한 좌석을 차지하는 셈이다. 티켓의 일부는 바이로이
트 축제에 기부금을 내는 <바이로이트의 친구 협회, Society of Friends of
Bayreuth>의 회원들, 저명한 후원자들, 지역 또는 국제 바그너 협회 회원 등에게 구
입의 우선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지역 바그너협회를 통해서 티켓을 배급하는 관례
가 2012년부터 폐지되었고, 2012년과 2013년엔 하나의 오페라에 한해서 온라인 예
약이 시행됐다. 온라인 예약은 수초 만에 끝났다. 2014년에도 8개의 공연에 대한 온
라인 판매가 계획되어 있다. 개인이 표를 구하는 방법으로는 바이로이트 홈페이지
(www.bayreuther-festspiele.de)에 접속해서 8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신청한다. 물
론 신청한다고 다 표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길은 당일티켓을 구하는 방법이다. 가끔은 빈자리가 나기도 한다. 이 자리
를 구하기 위해 전날 밤에 침낭을 들고 와서 매표소 앞에 진을 치는 경우도 있다. 힘
든 일이지만 가장 싸게 정식으로 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당일티켓 매표소는
아벤트카세(Abendkasse)라고 하는데, 공연은 주로 밤에 있고 당일티켓은 공연 직전
(밤)에 풀리게 되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또 다른 방법. 암표를 사는 것인데 경로는 여러 가지다. 바이로이트 근처 호텔들은
티켓과 숙박을 패키지로 판매하는 경우도 많고, 호텔 도어맨들이 약간의 차익을 위
해 호텔 손님들에게 표를 개인적으로 팔거나 바이로이트 축제를 보러왔지만 몸이
안 좋아 공연을 보러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표를 대신 팔아주는 경우도 있다. 호텔
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아 표를 구해본 뒤에 표를 구할 수 없으면 공연장 앞에 가
서 Suche Karte(티켓 구함) 쪽지를 들고 서있는 방법도 있다.

▶ 니벨룽의 반지
축제는 <니벨룽의 반지>를 상연하는 ‘반지의 해’와 상연하지 않는 ‘반지 안식년’으
로 나눈다. 반지는 4개의 오페라를 연속적으로 상연하는 대작이어서 새로운 연출
이 확정되면 그 연출로 5년 내지 7년간 공연하고, 다시 새로운 연출을 준비하기 위
해서 1~2년을 쉬게 된다. 바그너 탄생 200주년에 해당되는 2013년은 2년의 휴식 이
후 열리는 ‘반지의 해’의 첫 해이다. 프랑크 카스토르프(Frank Castorf)가 연출하는
반지가 무대에 올랐고, 바이로이트 시는 ‘모두를 위한 바그너’라는 제목으로 바이로
이트 시장광장에서 무료로 야외 오페라 공연을 했다. 축제 본부에서 프랑크 카스토
르프가 반지의 연출을 맡게 될 것이라는 발표를 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회의적
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가 연극계사람이고, 원작을 해체하는 연출자이기 때문이라
는 이유였다. 그러나 축제측은 그가 연출한 어린이 관객을 위한 90분짜리 반지 공연
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중성 있는 작품을 만드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결
과는 성공적이었다.

‘반지의 해’에는 반지와 다른 2~3개의 작품이 그 해의 축제 프로그램이 되고, ‘반지
안식년’에는 나머지 5~7개의 작품이 한꺼번에 올라간다. ‘반지 안식년’인 2012년 프
로그램은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엔그린>, <탄호이저
>, <파르지팔>이었고, ‘반지의 해’인 2013년의 프로그램은 <반지>, <방랑하는 네
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이었다.

▶ 청중의 의상
기본적으로 서양식 정장을 입는 것이 관례다. 한국인 여성 청중 가운데 일부가 한복
을 입고 입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응이 호의적이다. 축제극장에 들어서면 정장을
입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서 적어도 3-5시간 이상 걸리는 바그너의 악극을 땀
을 줄줄 흘리며 감상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로엔그린>은 제1막(1
시간), 인터미션(1시간), 제2막(1시간 30분), 인터미션(1시간), 제3막(1시간)으로
총 5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한국 출신의 베이스 강병운, 연광철, 사무엘 윤이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대단한 활약
을 하고 있으며, 원로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이 오랜 세월 축제 오케스트라의 멤버로
활동했다.

** 퍼 가는 것은 좋으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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