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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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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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사의 보고(演奏史의 寶庫)/축음기와 음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발명된 전화기. 방금 이 자
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나 연주를 담아 두었다가 언제든 원할 때 몇 번이
고 되풀이 그때의 소리를 재생시킬 수 있도록 발명된 축음기와 레코드. 소리
를 공간적 시간적 장애를 넘어 전달하게 한 이 위대한 발명들은 불과 1년 10개
월 10일의 차이를 두고 잇달아 첫 소리를 냈다. 전화기는 알렉산더 그레함 벨
에 의해 1876년 2월 14일에 특허신청이 됐고, 축음기(포노그라프)는 이듬해인
1877년 12월 24일에 토마스 알바 에디슨에 의해서 특허 출원이 행해졌던 것이
다. 이로써, 13세기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 의해 시도되었던 소리의 재생장
치 원리와,6백년 뒤인 1667년에 런던에서 로버트 후크가 두개의 공명상자 사이
에 실을 팽팽하게 연결하여 음성전달을 시도했던 실험은 209년만에 각각 현실
로서 성취됐던 것이다. 특히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에디슨의 포노그라프 발
명이 순전히 벨의 전화기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전화기의 送話口에다 입을 갖다대고 노래를 부르니까 전선의 진동에 의
해 가느다란 강철 바늘이 내 손가락을 찔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 바늘
끝의 움직임을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그 표면을 다시 그 바늘로 재생시킬 수
만 있다면 그 장치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 가늘고 긴
한 장의 電信紙로 실험을 한 결과 바늘 끝이 신호를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그
래서 나는 송화구에다 대고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소리치고 종이 위에 바
늘 끝을 다시 얹어 보았더니 희미하게 '여보세요, 여보세요'라는 소리가 들렸
다. 나는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계를 만들 결심을 하고 조수들에게 나의
발견을 설명하면서 지시했다. 조수들의 웃음거리가 된 나는 그 중의 하나인 애
덤스와 담배 내기를 걸어 이긴 적이 있었다.

이 발견의 모티브는 바늘이 손가락을 찌른 바로 그것이었다. 축음기와 레코드
의 역사는 이 작은 우연에서 착상되어 '여보세요'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울
러서 새로운 차원의 연주의 역사도 곧 시작이 되기에 이른다. 1878년 1월 24
일, 에디슨은 뉴욕의 브로드웨이 203번지에 '에디슨 스피킹 포노그라프 컴퍼
니'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통해 녹음용 錫箔을 붙인 축음기를 3개월 단위로
내 놓았다. 그는 이 새로운 발명품의 보급을 위해 녹음의 용도를 다양하게 확
대했는데, 편지 代用, 스피치의 기록, 맹인을 위한 소리나는 책, 웅변술 지도
용, 음악 녹음, 저명 인사들의 연설 녹음, 교육용 등 각가지 아이디어를 창출한
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연주를 담는 것이 포노그라프의 상업적 성공을 위
한 최선의 방책이라는 사실이 곧 인식되기에 이른다.

최초의 음악 녹음은 1878년 뉴욕에서 행해진 코넷주자 '쥴스 레뷔'의 연주 <
양키 두들>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미국의 헤이즈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짤
막한 스피치를 녹음했다.

클래식 음악의 최초 녹음은 1888년에 행해졌다. 당시 12살의 천재 소년 피아
니스트 요제프 호프만(1876-1957)이 에디슨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수록시간 2
분 짜리 실린더를 몇 개 취입했던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구로오드 대령이
런던의 수정궁(크리스탈 펠리스)기자석에 포노그라프를 설치하고 헨델 페스티
벌의 일환으로 공연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의 일부를 녹음했는데 (1888년
6월 29일)이것이 세계 최초의 실황 녹음이었다. 작곡가로서 최초로 녹음에 나
섰던 인물은 놀랍게도 브람스였다. 1888년, 에디슨의 독일 대리자가 브람스를
방문하고 그가 직접 연주하는 <헝가리 무곡 제 1번>을 녹음했던 것이다. 이 역
사적인 에디슨 실린더는 1935년에 발견되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으
나 재생상태는 극히 좋지 않았다. 포노그라프를 피아노 바로 밑에 두고 녹음
을 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이 됐다.

최초의 오케스트라 녹음과 교향곡 전곡 녹음은 포노그라프가 발명된 지 12년
만인 1889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에디슨은 두
대의 포노그라프를 무대 위에 설치했다. 지휘자는 한스 폰 뷜로였고, 연주 곡
목은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 전주곡과 하이든의 내림 D장조 교향곡, 베토
벤의 <영웅> 교향곡이었다. 물론 실황녹음 이었다.

포노그라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녹음된 실린더의 레퍼토리도
늘어나게 되자 1888년에 'COIN IN THE SLOT'(주크박스)가 개발되기에 이르
렀고 상업적인 실린더 생산이 시작됐다. 이 무렵 알프 암레인이라는 바이얼리
니스트의 연주로 수록된 오베르의 <왕관의 다이아몬드> 서곡이 상업용 실린
더로 발매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한번 녹음에 1개의 실린더밖
에 제작되지 않아 본격적인 상업화 시도는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889년 6월 3일, 드디어 최초의 복수 녹음이 시도됐다. 프랑크 게데의 연주를
7대의 기계로 동시 녹음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소량이긴 하지만 대량 생산
을 향한 길이 열리게 됐던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기악에 비해 성악은 녹음하기도 쉬웠고 재생 음질도 제
일 양호하여 이 분야의 기대가 높았다. 최초의 여성 성악 녹음은 1891년 7월 9
일에 스튜어트 양에 의해 행해졌다. 곡목은 <연인과 나> <학생들의 목장> 이
었다. 남성 가수로서 최초 녹음의 영광을 안은 인물은 흑인 코미디언 조지 존
슨이었다. 존슨은 1891년 6월 1일에 역사적인 녹음을 행했다.

1892년 3월 18일, 최초로 녹음 복사가 행해져 마스터에서 더빙하는 방법으로
150개의 카피가 생산됐다. 초기 레코드史에서 획기적인 하나의 전환점이 만들
어진 것이다. 같은 해 4월부터는 가정용 실린더가 판매되기 시작했고 곧이어
사상 최초의 레코드 카탈로그가 워싱턴의 콜롬비아 포노그라프社 에 의해 발
행됐는데 편집은 10쪽으로 되어 있었다. 이 카탈로그에 소개된 실린더는 다음
과 같은 것이었다.

21곡의 행진곡(숫자의 행진곡 포함)
13곡의 폴카
34종의 각종 녹음(多數의 國歌포함)
36개의 휘파람(존 에틀리)
13곡의 클라리넷과 피아노 녹음(연주자 불명)
32곡의 여러 가지 노래

1893년에 카탈로그가 32쪽으로 불어나 영업 신장세를 짐작케 했으며, 이듬해
엔 토마스 맥도널드가 세계 최초로 발명한 태엽으로 작동되는 실린더 플레이
어가 75불의 정가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상표는 콜롬비아였다. 이에 긴장한 에
디슨은 콜롬비아에 못지 않은 플레이어 개발에 나선 결과 1896년에 역시 태엽
식 플레이어를 40달러에 내 놓았다. 이때부터 에디슨의 내셔날 포노그라프社
와 콜롬비아社의 가격 전쟁이 불붙게 되는데 1897년엔 10불 짜리 '이글스'(콜
롬비아)라는 제품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값싼 플레이어의 대량 보급과 날로 인기가 높아지는 실린더에의 관심으로 포
노그라프 산업은 대형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1887년 9월 26일, 에밀 베
르리너라는 독일인 발명의 천재에 의해 레코드의 역사는 일대 혁명을 맞게 된
다. 이날 베르리너가 신청한 특허는 에디슨의 실린더형이 아닌 평평하고 둥근
원반형의 디스크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최초의 디스크 시청회를 1888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의기양양하게 실시했다. 이 디스크는 하나의 마스터에
서 여러 개의 복사가 가능한 강점을 가져 에디슨의 실린더보다 유리했고, 나아
가서는 예술가들에게 인세(印稅)라는 새로운 수입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기
도 했다. 베를리너는 자기의 상표를 '그라모폰'이라고 이름짓고 독일, 영국, 미
국에 각각 상표 등록을 마쳤다. 디스크가 처음 나왔을 때 에디슨은 자기의 실
린더가 휠씬 양호한 음질을 갖고 있다는데 자신을 갖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
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실린더에 비해 휠씬 저렴한 가격의 디스크가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1903년이 되자 콜롬비아는 디스크만
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실린더의 종말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디스크의 최초 녹음은 1895년 10월 29일, 조지 더 커스틴의 노래로 이뤄졌다.
또한 이 해에 에드릿지 존슨의 고안으로 태엽식 그라모폰(축음기)이 최초로 제
작됐다. 3년 뒤엔 독일 하노버에 레코드 프레스 전문 공장이 세워졌고, 여기에
서 1908년까지 620만장의 레코드가 생산됐다. 이 공장의 이름이 저 유명한 '도
이치 그라모폰'이다.

1895년 이후의 모든 레코드는 직경이 약 7인치였지만 1901년 1월 3일에 최초
로 10인치 레코드가 발매된 이후 10인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됐다. 또한 이때
부터 오페라 가수의 레코드엔 붉은 레이블이 붙여졌다. 1901년 후반에 발매된
바리톤 샬리아핀의 레코드는 붉은 레이블로서는 최초의 베스트 셀러가 됐다.
이 시절의 명가수 중엔 프란체스코 타마뇨가 있다. 베르디가 그를 위해 <오텔
로>를 썼을 만큼 그는 뛰어난 오페라 가수였다. 런던 그라모폰社는 그에게 인
세를 지불하고 레코드를 제작했는데 <오텔로>중 "나를 두려워하랴"레코드는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1903년엔 피아니스트 라울 푸뇨와 작곡가 그리그(Grieg)가 피아노 곡을 녹음
했고, 이듬해엔 드뷔시가 성악가 메어리 가든의 반주자로서 녹음에 나섰다.
오페라 전곡이 최초로 녹음된 것은 1903년이며 작품은 베르디의 <에르나니>
이었다. 10인치 디스크 40장으로 제작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디스크 시장은 그
라모폰과 빅터社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으나 1902년에 콜롬비아社도 뛰어들
게 된다.

콜롬비아의 최초 디스크는 워드(Word)의 <시계포에서>라는 작품이었고 콜롬
비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1911년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제 1악장이,
1912년엔 아르트루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필의 연주로 베토벤의 운명 교
향곡이 녹음됐다. 물론 이 시기에 '레너드 트리오''프론자레이 4중주단'등이 수
많은 실내악곡을 녹음하여 바야흐로 레코드 음악은 가정 취미의 으뜸으로 자
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디스크 녹음의 초창기엔 기묘한 일들이 많이 생겼다. 예를 들면, 엠마 칼베가
1902년 런던에서 비제의 <카르멘>中"세기디야"를 녹음한 음반 속에는 자기자
신의 성악적 재능에 대해서 프랑스어로 흥분하며 얘기한 것이 그대로 수록돼
있다. 그녀는 노래 말미에 "자! 들어봐 주세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아주 점잖은 경우도 있다. 69세의 나이로 모차르트의 <나비는 이제 날
지 못하리>를 훌륭하게 레코딩한 바리톤 찰스 산토리는 지휘자 랜든 로날드
가 끝부분을 지휘하고 있을 무렵에 "이 정도면 성공이겠지"라고 중얼거리고 있
다.

1920년 11월 11일, 레코드 역사는 또 다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이날 조지
윌리엄과 호레이스 메리만은 (그라모폰 소속 녹음기사)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에서 거행된 무명용사의 매장식 실황을 녹음했는데 사상 최초로 전기로 작동
되는 마이크로폰을 사용했다. 이를 신호로 빅터는 1925년 3월 중순에, 콜롬비
아는 3월 31일에 각각 최초의 전기녹음을 시작했다. 빅터의 첫 녹음은 "비야 비
야 신의 아들 이발도"였다. 카루소의 음반들이 전기 처리로 리바이블되기 시작
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를테면 레코드 史上 최초의 복각이 행해진 셈이다. 전
기녹음 초창기의 역사적 명반으로는 꼬르도가 연주한 쇼팽의 즉흥곡 제 2번과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녹음으로 된 생상
스의 <죽음의 무도>,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일 것이다. 전기녹음
에 의한 양질의 레코드가 쏟아져 나오자 이에 맞춰 모터를 사용하는 전기식 턴
테이블도 선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주인은 태엽식 축음기였다.

1948년 6월 26일, 레코드 역사는 또 한번의 개혁기를 맞는다. 이날 뉴욕의 윌
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사상 최초로 33 1/3회전의 장시간 레코드가 보도진
에게 공개된 것이다. 이날이 LP의 수레바퀴를 굴린 최초가 된 것이다. LP는 콜
롬비아의 단독으로 시작되어 이 회사에 부와 영광을 안겨 주었다. RCA는 이듬
해에 45회전 음반(EP)을 내놓아 78,45,33 1/3의 공존시대가 펼쳐진다. 그러나
약 1년 뒤 레코드 시장은 서서히 LP의 독주 상황으로 변화했다.

1954년, 영국의 데카는 SP음반의 생산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EMI는 이듬해
에 SP에서 손을 뗐다. 1962년엔 모든 카탈로그에서 SP는 사라졌다. 미국에선
1957년에 SP가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 나라에서도 1959년까지는 SP가 생산됐
으나 1962년에 이르러 LP에 밀려 사라졌다.

SP의 역사는 가장 화려한 명연주시대와 때를 같이한다. 오늘에 와서 새삼스
레 SP가 LP나 CD로 복각되고 있는 것은 과거의 그 화려했던 연주사를 재조명
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누구나 SP를 고물로서만 방치할 것인가?

*** 사진 / The Edison Standard Model C

** 이 글을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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