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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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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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과 격정의 로맨티스트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

  
** 음악 듣기
http://youtu.be/W9CYLAuKdtU
Berlioz - Symphonie fantastique (1830) - DRSymfoniOrkestret - Rafael Frühbeck de Burgos

1827년 9월 어느 날, 파리의 오데옹 극장, 영국에서 온 셰익스피어 극단의 <햄
릿>이 공연되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 뒤마, 죠르즈 상드, 프로스퍼 메리메, 발
자크 등 프랑스 예술계의 저명인사들 틈바구니에 무명의 작곡학도 베를리오즈
도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필리아 역은 아일랜드 출신의 핼리엣 스미
슨(Harriet Smithson)이 맡았다. 헬리엣은 <광란의 장면(제4막5장)> 연기 도
중 대사를 잊어버리는 위기를 맞았지만 임기응변으로 멋지게 대처해 오히려
원래의 대사보다도 월등한 극적 효과를 거뒸다. 이 멋진 연기로 그녀는 하룻
밤 사이에 일약 파리의 최고 인기스타가 됐다. 특히 베를리오즈는 꼼짝없이 그
녀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녀에 대한 열광은 연모로 발전했다. 풋나기 베를
리오즈에게 있어서 헬리엣의 출현은 멈추지 않는 충격이었고 마침내 그의 정
신은 외사랑의 사무침으로 병적인 징후마저 보이게 이르렀다. 이때의 심리상
태를 회상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셰익스피어와 영감에 찬 여배우에게 파리
사람 모두가 열광해 있는 기막히게 멋진 오필리아를 생각하며 찬란한 그녀의
영광에 대한 나의 이름 없음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나는 나섰
다. 그녀에 대해서 알려져 있지 않은 나의 이름을 불같은 노력으로 빛내겠다
고 결심한 것이다.”

이러한 단단한 결심에도 불구하고 2년의 세월이 흘러가도록 이름을 얻지 못하
고 있었다. 다시 1년이 흘렀을 때 그는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헬리엣에 대해 일
종의 보복적 성격을 갖는 <환상교향곡>을 발표했다. 정상인의 안목으로는 이
해하기 어려운 복수극인 셈이다. 환상교향곡은 다음과 같은 서문을 갖고 있
다. “병적인 감수성을 지닌 어떤 젊은 음악가가 절망적인 사랑의 상처를 참을
길 없어 자살하기 위해 다량의 아편을 먹었다. 그러나 죽음에는 이르지 못하
고 환상 속에 빠지게 된다. 그 환상 속에 예전 사랑의 추억이, 영혼의 떨림과
열정의 파도들이 우수와 함께 나타나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하고 만다. 그 미칠
듯한 고뇌, 미치광이 같은 질투, 부드럽고 종교적인 위로에 복귀, 그리고 무도
회, 여름저녁 나절의 산책, 이르는 곳마다 연인의 환영이 나타나 동경을 불러
일으킨다. 마침내 환상 속에서 그는 연인을 죽이고 그 죄로 인해 형장으로 향
한다. 형장에 다시 그녀의 환영이 나타나는 순간 운명의 일격이 그의 목을 습
격한다. 그의 영혼은 지옥에서 마녀의 향연에 초대된다. 그리고선 최후의 심
판 나팔이 울린다”. 이 서문은 이 악곡의 줄거리(프로그램)를 대신 하기도 한
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은 교향곡 역사의 혁명이었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
에 대한 복수로 치닫고 있는 이 교향곡은 실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허지만 정작 이 곡을 들려주고 싶었던 헬리엣은 이미 영국으로 돌아간 뒤였
다. 낙심은 이루 형언키 어려웠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와 헬리엣의 운명의 끈
은 2년 뒤에 극적으로 다시 이어졌다. 1832년 12월에 있었던 환상 교향곡의 재
연이 있었을 때 헬리엣이 우연히 객석에 있었다. 이때 그녀는 프랑스의 여러
지방에서 영어연극을 공연했지만 실패를 거듭한 나머지 빚을 잔뜩 짊어진데
다 인기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딱한 지경에 있었다. 반면, 베를리오즈는 환
상 교향곡의 성공으로 일약 유명한 작곡가로 변신해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베
를리오즈에게 헬리엣의 딱한 처지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청혼
했다. 스미슨은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이후 20여년에 걸쳐 숱한
상처만을 남기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긴 후 헬리엣은 무대에 복귀
하려는 강렬한 소망을 갖게 됐고, 베를리오즈는 작곡, 연구, 평론으로 분망했
다. 결혼 2년간은 몽마르뜨에서 함께 살았지만 활동 근거지가 파리 시내였던
베를리오즈는 2년 뒤 시내에 하숙을 정하게 됐다. 당시 그는 평론가로도 상당
한 권위를 갖고 있어서 신인들의 내방이 잦았는데 그중에 마리 레치오라는 가
수가 있었다. 소리도 음악적 재질도 볼품없는 인물이었지만 어떻게해서든 오
페라 무대에 서보기 위해 평론가로 유력한 베를리오즈에게 매달린 것이다. 스
미스는 남편이 하숙을 얻는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특히 마리에 대해
서 엄청난 질투심을 보였다.

음악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아내에 대해 언짢은 생각을 갖고 있던 그는 마
리에 대한 그녀의 격렬한 반응으로 더욱 더 아내를 피곤한 존재로 인식하게 됐
다. 결국  몽마르뜨의 자택에 가는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됐고 마리와 동거에 들
어갔다. 아내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묘한 이중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남편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아들 루이와 외롭게 살았던 헬리엣은 1848년에 뇌
일혈로 쓰러져 5년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단
지 2년에 그쳤고, 죽기까지 남편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버려지는 처지가 되
고 말았다. 아내가 죽자 베를리오즈는 슬픔을 가득 담은 편지를 그들의 결혼
식 입회인이었던 리스트에게 보냈다. 아내가 죽은 해에 베를리오즈는 그렇게
도 갈망했던 로마대상을 받았다.

베를리오즈는 헬리엣에게나 마리에게나 같은 실망과 좌절을 겪었다. 헬리엣
이 비록 음악에 관심은 없었다 해도 가정주부로서는 손색이 없었다는 것이 각
종 자료들의 증언이다. 마리 역시 음악에 소질이 없는데다 엄청난 질투의 화신
이긴 했어도 남편에겐 철저한 부덕을 제공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러나 둘
다 남편의 버림을 받았다. 베를리오즈는 헬리엣이 아닌 오필리아의 환영으로
첫 아내를, 마리가 아닌 정열적인 스페인의 화신으로 둘째 아내를 맞았기 때문
이었다. 그는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환상으로 자기류의 색채를 칠했
다. 환상이 깨어지고 색채가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실체를 믿으려 하지 않았
다. 그래서 두 아내를 외면했다.

1869년 3월 8일. 그는 최초로 사랑을 느꼈던 에스테르 포르니에가 자기의 임종
을 지켜주기를 희망했다. 죽음을 준비하면서조차 그는 환영을 고집했다. 그러
나 그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제자와 몇몇 친구들만이 그의 임종 옆에 있
었다.

** 환상교향곡을 수록한 명반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요즘 클래식 펜들에
게 크게 어필하고 있는 시대악기 편성으로 연주된 가디너(John Eliot
Gardiner) 지휘의  <혁명과 로맨틱 오케스트라, Orchestre Revolutionnaire
et Romantique> 연주를 추천한다. (Philips 레이블). 감상 / http://youtu.be/w6oPFcbOdfM
** 사진 / 헬리엣 스미슨(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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