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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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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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사의 보고(演奏史의 寶庫)/축음기와 음반



◈ 사진  
위 : The Edison Standard Model C
아래 : 디스크 발명자 Emile Berliner (1851–1929)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발명된 전화기. 방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나 연주를 담아 두었다가 언제든 원할 때 몇 번이고 되풀이 그때의 소리를 재생시킬
수 있도록 발명된 축음기와 레코드. 소리를 공간적 시간적 장애를 넘어 전달하게 한 이 위대한
발명들은 불과 1년 10개월 10일의 차이를 두고 잇달아 첫 소리를 냈다.

전화기는 알렉산더 그레함 벨에 의해 1876년 2월 14일에 특허신청이 됐고,
축음기(포노그라프)는 이듬해인 1877년 12월 24일에 토마스 알바 에디슨에 의해서 특허 출원이
행해졌다.

이로써, 13세기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 의해 시도되었던 소리의 재생장치 원리와, 6백년 뒤인
1667년에 런던에서 로버트 후크가 두 개의 공명상자 사이에 실을 팽팽하게 연결해서 음성전달을
시도했던 실험은 209년 만에 각각 현실로서 성취됐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에디슨의 포노그라프 발명 아이디어가 순전히 벨의 전화기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기의 송화구에 입을 갖다 대고 노래를 부르니까
전선의 진동에 의해서 가느다란 강철 바늘이 내 손가락을 찔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 바늘 끝의 움직임을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 그 표면을 다시
그 바늘로 재생시킬 수만 있다면 그 장치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 가늘고 긴 한 장의 전신지로 실험을 한 결과
바늘 끝이 신호를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송화구에다 대고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소리치고
종이 위에 바늘 끝을 다시 얹어 보았더니 희미하게
“여보세요, 여보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계를 만들 결심을 하고
조수들에게 나의 발견을 설명하면서 지시했다.
조수들의 웃음거리가 된 나는
그 중의 하나인 애덤스와 담배 내기를 걸어 이긴 적이 있었다.“

이 발견의 모티브는 바늘이 손가락을 찌른 사실이었다. 축음기와 레코드의 역사는 이 작은 우연
에서 착상되어 “여보세요”로 시작되었다. 아울러 새로운 차원의 연주의 역사도 곧 시작되기에 이
른다.

1878년 1월 24일, 에디슨은 뉴욕 브로드웨이 203번지에 <에디슨 스피킹 포노그라프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통해 녹음용 錫箔을 붙인 축음기를 3개월 단위로 내 놓았다. 그는 이 새로
운 발명품의 보급을 위해 녹음의 용도를 다양하게 확대했는데, 편지 대용, 스피치의 기록, 맹인을
위한 소리 나는 책, 웅변술 지도용, 음악 녹음, 저명인사들의 연설 녹음, 교육용 등 각가지 아이
디어를 창출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연주를 담는 것이 포노그라프의 상업적 성공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는 사
실이 곧 알게 되었다.

최초의 음악 녹음은 1878년 뉴욕에서 코넷 연주자 쥴스 레뷔의 연주 <양키 두들>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미국 헤이즈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짤막한 스피치를 녹음했다.

클래식 음악의 최초 녹음은 1888년에 실현되었다. 당시 12살의 천재 소년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
프만(1876-1957)이 에디슨의 연구실을 방문해서 2분짜리 실린더를 몇 개 취입했다.

영국에서는 구로오드 대령이 런던의 수정궁(크리스탈 펠리스) 기자석에 포노그라프를 설치하고
헨델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일부를 녹음했는데 (1888년 6월29일),
이것이 세계 최초의 실황 녹음이었다.

작곡가로서 최초로 녹음한 인물은 브람스였다. 1888년, 에디슨의 독일 대리자가 브람스를 방문
하고 그가 직접 연주하는 <헝가리 무곡 제1번>을 녹음했다. 이 역사적인 에디슨 실린더는 1935
년에 발견되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재생상태가 극히 좋지 않았다. 포노그라프를 피
아노 바로 밑에 두고 녹음을 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오케스트라 녹음과 교향곡 전곡 녹음은 포노그라프가 발명된 지 12년만인 188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였다. 에디슨은 두 대의 포노그라프를 무대 위에 설치했다. 지휘자는
한스 폰 뷜로였고, 작품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전주곡과 하이든의 내림 D장
조 교향곡,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이었다. 물론 실황녹음이었다.

포노그라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녹음된 실린더의 레퍼토리도 늘어나게 되자 1888
년에 Coin in The Slot(주크박스)가 개발되었고, 상업적인 실린더 생산도 시작됐다.

이 무렵 알프 암레인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로 수록된 오베르의 <왕관의 다이아몬드> 서곡
이 상업용 실린더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한번 녹음에 1개의 실린더만 제작할 수
있어서 본격적인 상업화 시도는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889년 6월 3일, 드디어 최초의 복수 녹음이 시도됐다. 프랑크 게데의 연주를 7대의 기계로 동
시 녹음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소량이긴 하지만 대량 생산을 향한 길이 열리게 됐다.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기악에 비해 성악은 녹음하기도 쉬웠고 재생 음질도 제일 좋아서 이 분야의
기대가 높았다. 최초의 여성 성악 녹음은 1891년 7월 9일에 미스 스튜어트에 의해 행해졌다. 곡
목은 <연인과 나> <학생들의 목장>이었다. 남성 가수로서 최초 녹음은 흑인 코미디언 조지 존슨
이었다. 존슨은 1891년 6월 1일에 역사적인 녹음을 행했다.

1892년 3월 18일, 최초로 녹음 복사가 행해져 마스터에서 더빙하는 방법으로 150개의 카피가
생산됐다. 초기 레코드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해 4월부터는 가정용 실
린더가 판매되기 시작했고 곧이어 사상 최초의 레코드 캐털로그를 워싱턴의 콜롬비아 포노그라프
사가 발행했는데, 편집은 10쪽으로 되어 있었다. 이 카탈로그에 소개된 실린더는 다음과 같다.
21곡의 행진곡(숫자의 행진곡 포함)
13곡의 폴카
34종의 각종 녹음(다수의 국가포함)
36개의 휘파람(존 에틀리)
13곡의 클라리넷과 피아노 녹음(연주자 불명)
32곡의 여러 가지 노래

1893년에 카탈로그가 32쪽으로 불어날 정도로 영업 신장세가 대폭 확장되었고, 이듬해엔 토마스
맥도널드가 세계 최초로 발명한 태엽으로 작동되는 실린더 플레이어가 75불에 판매되기 시작했
다. 상표는 콜롬비아였다.

이에 긴장한 에디슨은 콜롬비아에 못지않은 플레이어 개발에 나서서 1896년에 역시 태엽식 플레
이어를 40달러에 내 놓았다. 이때부터 에디슨의 내셔날 포노그라프사와 콜롬비아사의 가격 전쟁
이 불붙게 되는데 1897년엔 10불짜리 <이글스>(콜롬비아)라는 제품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값싼 플레이어의 대량 보급과 날로 인기가 높아지는 실린더에 대한 관심으로 포노그라프 산업은
대형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1887년 9월 26일, 에밀 베르리너라는 독일인 발명의 천재에
의해 레코드의 역사는 일대 혁명을 맞게 된다.

이날 베를리너가 신청한 특허는 에디슨의 실린더형이 아닌 평평하고 둥근 원반형의 디스크였다.
그는 최초의 디스크 시청회를 1888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었다. 이 디스크는 하나의 마
스터에서 여러 개의 복사가 가능한 강점을 가져 에디슨의 실린더보다 유리했고, 나아가서는 예술
가들에게 인세라는 새로운 수입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베를리너는 자기의 상표를 <그라모폰>이라고 이름 짓고 독일, 영국, 미국에 각각 상표 등록을 마
쳤다. 디스크가 처음 나왔을 때 에디슨은 자기의 실린더가 휠씬 양호한 음질을 갖고 있다는데 자
신을 갖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실린더에 비해 엄청 값싼 디스크
가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1903년이 되자 콜롬비아는 디스크만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실린더의 종말이 예고된 것이다.

디스크의 최초 녹음은 1895년 10월 29일, 조지 더 커스틴의 노래였다. 또한 이 해에 에드리지
존슨의 고안으로 태엽식 그라모폰(축음기)이 최초로 제작됐다. 3년 뒤엔 독일 하노버에 레코드
프레스 전문 공장이 세워졌고, 여기에서 1908년까지 620만장의 레코드가 생산됐다. 이 공장의
이름이 도이치 그라마폰이다.

1895년 이후의 모든 레코드는 직경이 약 7인치였지만 1901년 1월 3일에 최초로 10인치 레코드
가 발매된 이후 10인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됐다. 또한 이때부터 오페라 가수의 레코드엔 붉은
레이블이 붙여졌다.

1901년 후반에 발매된 바리톤 샬리아핀의 레코드는 붉은 레이블로서는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됐
다. 이 시절의 명가수 중엔 프란체스코 타마뇨가 있다. 베르디가 그를 위해 <오텔로>를 썼을 만
큼 그는 뛰어난 오페라 가수였다. 런던 그라마폰사는 그에게 인세를 지불하고 레코드를 제작했는
데 <오텔로>중 "나를 두려워하랴" 레코드는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 대중적인 녹음시장의 문을 열다
1902년, 엔리코 카루소가 오페라 아리아를 녹음했다. 그런데, 테너 엔리코 카루소를 모르는 사람
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레드 가이스버그(Fred Gaisberg)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카
루소와 동갑인 가이스버그는 영국 그라마폰의 레코딩 엔지니어로 카루소 음반을 처음 녹음했던
전설적인 프로듀서다. 일본 최초의 원판도 그가 제작했으며 마지막 카스트라토였던 알렉산드로
모레스키의 목소리를 녹음한 사람도 가이스버그였다. 그리고 카루소의 첫 번째 음반이 출시된
1903년에는 무려 270개의 타이틀을 녹음한 대단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가이스버그는 그라마폰 창립자 에밀 베를리너(독일 태생의 발명가. 1870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1895년 워싱턴에서 그라마폰 회사 창립)에 의해 1898년에 영국으로 파견됐다. 그의 재능과 실
력은 녹음장비를 들고 전 세계를 돌며 발휘되었다.

1902년 4월에 가이스버그는 엔리코 카루소의 명성을 전해 듣고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서 그를
만났다. 10곡의 오페라 아리아를 녹음하는 조건으로 카루소는 100파운드(50달러)를 요구했다. 이
금액은 그 당시에는 대단한 액수였다. 가이스버그는 회사로 전보를 띄웠지만 “터무니없는 요구이
니 녹음을 취소하라”는 회답을 받았다. 그러나 가이스버그는 녹음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밀라노
그랜드 호텔에서 녹음을 강행했다.

카루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10곡의 오페라 아리아를 모두 녹음했다. 녹음에 걸린 시간은
불과 1시간 30분이었으며, 3개월 후 그라마폰사는 카루소에게 100파운드를 보냈다. 다음해에 출
시된 카루소의 음반(Red Seal)은 그라마폰에 무려 1만5천 파운드를 벌게 해 주었다. 투자한 금
액의 150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가 노래한 10곡의 아리아는 좋은 호흡과 진실한 가창이 무엇인가를 들려주는 표본이었다. 이
것은 동시에 카루소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1903년 11월 11일 그는 뉴욕 땅을 밟
고 2주 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리골레토>로 데뷔했다.

카루소는 그후 18 시즌 동안 무려 607회의 무대 출연을 기록했다. 이 기간 중 66개의 타이틀로
판매된 음반만 6천 만장에 이른다. 특히 오페라 <팔리아치>(레온카발로)에 나오는 아리아 <의상
을 입어라, Vesti la giubba> 음반은 1백만 장이나 팔리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카루소는 이 곡
을 풍부한 감성으로 흐느끼며 열창했다. 실제로 사랑했던 여인 아다 지아게티가 운전사와 눈이
맞아 도망간 배신 탓인지 이 아리아를 절절하게 불렀다. 카루소는 1921년 고향 나폴리에서 운명
했으며 가이스버그는 1951년 영국에서 삶을 마쳤다.

음반이 문화적 산물로 자리 잡는데 공헌한 3명의 거인을 성정한다면, 에디슨이 녹음을 발명했고,
베를리너가 그라마폰을 발명했으며, 가이스버그는 음반을 산업으로 성공시킨 거인이었다.

1903년엔 피아니스트 라울 푸뇨와 작곡가 그리그(Grieg)가 피아노 곡을 녹음했고, 이듬해엔 드
뷔시가 성악가 메어리 가든의 반주자로 녹음에 나섰다. 오페라 전곡이 최초로 녹음된 것은 1903
년, 작품은 베르디의 <에르나니>였다. 10인치 디스크 40장으로 제작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디스
크 시장은 그라마폰과 빅터가 지배했지만 1902년에 콜롬비아도 뛰어들었다.

콜롬비아의 최초 디스크는 워드(Word)의 <시계포에서>라는 작품이었고 콜롬비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1911년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제1악장이, 1912년엔 아르트루 니키쉬가 지휘하
는 베를린 필의 연주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녹음됐다. 물론 이 시기에 <레너드 트리오><프론
자레이 4중주단>등이 수많은 실내악곡을 녹음하여 바야흐로 레코드 음악은 가정취미의 으뜸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디스크 녹음 초창기엔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엠마 칼베가 1902년 런던에서 비제의
<카르멘> 중 <세기디야>를 녹음한 음반엔 자기 목소리를 자랑하면서 프랑스어로 흥분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그대로 녹음되어 있다. 그녀는 노래 말미에 "자! 한번 잘 들어봐요!"라고 외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아주 점잖은 경우도 있다. 69세의 나이로 모차르트의 <나비는 이제 날지 못하리>를
훌륭하게 레코딩한 바리톤 찰스 산토리는 지휘자 랜든 로날드가 끝 부분을 지휘하고 있을 무렵에
"이 정도면 성공이겠지"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 1920년  
독일 피아니스트 빌헤름 캠프 음반이 완벽한 연주기록으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판단을 최초로 하고 녹음에 집중하였다. 그가 남긴 베토벤 소나타 전집은 지금까지도 가장 이상
적이고 위대한 녹음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95세까지 장수를 누린 캠프는 스튜디오의 장인이었다. 명료한 아티큘레이션, 투명한 소리결, 지
나침이 없는 중도적 곡 해석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 덕분에 돈도 많이 벌어서 바이로이트
근처의 성을 구입해서 살았다. 그러나 무대에서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녹음을 시작하고, 그래서
명성을 얻고 나서 비로소 무대에 섰는데(1951년), 대부분의 청중들은 그의 연주에서 큰 실망을
얻었다. 녹음기술의 마력에 의해서 완벽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무대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았
던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서 빌헤름 박하우스도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여 두 피아니스트의 예술을 비
교 평가하는 시장이 열렸고, 이로 인해서 컬렉터들 선반엔 같은 작품을 여러 연주가들이 녹음한
음반을 두루 갖추는 유행이 시작되었다. 스포츠에서나 있는 경쟁적 요소가 음반세계에도 찾아온
것이다.

캠프와 박하우스가 스튜디오 중심의 연주가였다면, 아르투르 슈나벨 (Artur Schnabel)은 무대에
서 청중들을 사로잡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스튜디오 녹음은 그에게 내키지 않는 작업
이었다. 때문에 슈나벨의 음반은 대부분 실황녹음 음반이다.

베토벤 서거 100주년이었던 1927년에 베를린에서 7회의 리사이틀을 열고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
을 차례로 연주하였고, 같은 기획으로 런던에서 두 번 더 리사이틀을 열었는데 그 실황을 HMV
가 녹음해서 총 100장으로 구성된 전집음반을 발매하였다. 이로써 중산층 사람들은 셰익스피어
의 희곡전집이나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을 책장에 꽂듯 베토벤의 소나타 전집도 켐프, 박하우스,
슈나벨의 것을 나란히 비치하는 새로운 유행을 좇기 시작했다.  

◈ 1925년  
벨 연구소가 전기녹음방식을 시작되면서 음반의 음질개선이 획기적으로 이룩되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실제의 소리에 거의 가깝게 녹음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음반 한 면에 4
분밖에 녹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향곡을 녹음할 경우 음악을 어떻게 쪼갤 것인가를 먼저 계획
해야만 했다. 때문에 많은 지휘자들이 음반 녹음을 주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르트로 토스카니니,
빌헤름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같은 지휘자들은 녹음을 통해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성공한 지휘자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지휘자일지라도 자기가 활동하는 그 지역에 국한된 명성뿐이
었는데 음반이 이들을 국제적인 저명인사로 만들어준 것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토스카니니는 160종의 음반을 발표했고, 그 음반을 통해서 몰아붙이는 템포, 치밀한 구성력, 열
광적인 소노리티를 들려주었고 그것은 그 후의 모든 지휘자들이 본받아야하는 표준이 되었다.
푸르트벵글러도 EMI와 계약해서 음반을 발표하였고,
브루노 발터는 CBS에서 음반을 냈다.

1920년 11월 11일, 레코드 역사는 또 다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이날 조지 윌리엄과 호레이
스 메리만(그라마폰 소속 녹음기사)은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진행된 무명용사 매장식 실
황을 사상 최초로 전기로 작동되는 마이크로폰을 사용해서 레코딩했다.
이를 신호로 빅터는 1925년 3월 중순에,
콜롬비아는 3월 31일에 각각 최초의 전기녹음을 시작했다.

빅터의 첫 녹음은 <비야 비야 신의 아들 이발도>였다.
카루소의 음반들이 전기 처리로 리바이블 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레코드 사상 최초의 복각이 행해진 셈이다.

전기녹음 초창기의 역사적 명반으로는
알프레드 코르토가 연주한 쇼팽의 즉흥곡 제2번과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차이콥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일 것이다.

전기녹음에 의한 양질의 레코드가 쏟아져 나오자 이에 맞춰 모터를 사용하는 전기식 턴테이블도
선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주인은 태엽식 축음기였다.

1929년 한해에 미국에서 팔린 음반은 무려 1억400만장이나 되었다. 그러나 1930년엔 600만장
으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월가를 덮친 경제공황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도 3천만 장의 판매고가 450만장으로 떨어졌다. 이 위기에서 HMV와 컬럼비아는 합병
되어 EMI((Electric & Musical Industries Ltd)가 되었다. EMI가 1929년의 음반판매고를 회복
하는데 30년이 걸렸다. 이 어려운 시대에 돌파구를 마련한 사람은 역시 가이스버그였다. 그는 전
집물에 승부를 걸었다. 그 대표적인 기획물이 슈나벨의 연주실황을 담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이었다. 슈나벨의 전집은 50만 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EMI에 가져다주었다.

EMI는 에비로드에 스튜디오를 새로 차렸고 여기서
하이페츠,
예후디 메뉴인,
파블로 카잘스,
베니아미노 질리,
샬리아핀,
파데레브스키 등 당시의 재능 있는 에술가들의 연주를 녹음했다.

가이스버그가 아니면 이룩될 수 없었던 위대한 업적이었다. 1951년 9월, 가이스버그가 78세의
나이로 별세했을 때 음반산업은 이미 규모의 산업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 Long-playing (LP) record
CBS의 엔지니어 피터 골드마크가 토스카니니와 호로비츠가 녹음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
번을 들으면서 음반을 바꿀 때가되자 짜증을 내면서 “이건 사랑을 한창 나누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울리는 것 같잖아!”라고 투덜대면서 줄자를 꺼내들고 1인치에 홈이 80개라는 것을 센 다음 교향
곡 한곡을 담으려면 디스크가 어떤 속도로 회전해야 하는가를 계산한 끝에 33과 ⅓회전이라는
답을 내 놓았다.

음반의 사이즈는 SP와 같았다.(10 또는 12인치).

처음에 이 기술을 적용한 회사는 RCA였지만(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지휘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
라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시장에서 먼저 성공을 거둔 회사는 CBS였다.
1948년,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를 담은 SP앨범을 리마스터링해서 담은 The Voice of Frank
Sinatra와
나탄 밀스타인의 바이올린 독주와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뉴욕 필의 협연으로 녹음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Op. 64였다.

당시 LP 레코드 한 장의 가격은 은행원의 2주간 봉급과 맞먹는 액수였다. CBS의 첫 LP가 나오
고 10년 후, 1958년에 스테레오 시스템이 개발되자 레코드 산업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LP
레코드는 텔레비전과 비디오, 카세트 테이프의 대중화에 의해 강력한 도전을 받기도 했으나, 언
제든지 고음질의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계속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CD가
개발된 1982년까지 아날로그 시대의 부동의 음반 포맷이었다.

1948년 6월 26일, 뉴욕 윌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사상 최초로 33과 1/3회전의 장시간 레코
드가 보도진에게 공개되었다. LP의 수레바퀴가 처음 굴러간 날이다. LP는 콜롬비아의 단독으로
시작되어 이 회사에 부와 영광을 안겨 주었다. RCA는 이듬해에 45회전 음반(EP)을 내놓아 rpm
78, 45, 33 1/3의 공존시대가 펼쳐진다. 그러나 약 1년 뒤 레코드 시장은 서서히 LP의 독주 상
황으로 변화했다.

1954년, 영국의 데카는 SP음반의 생산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EMI는 이듬해에 SP에서 손을 뗐
다. 1962년엔 모든 카탈로그에서 SP가 사라졌다. 미국에선 1957년에 SP가 완전히 사라졌다. 우
리나라에서도 1959년까지는 SP가 생산됐으나 1962년에 LP에 밀려 사라졌다.

SP의 역사는 가장 화려한 명연주시대와 때를 같이한다. 오늘에 와서 새삼스레 SP가 LP나 CD로
복각되고 있는 것은 과거의 그 화려했던 연주사를 재조명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 CD 시대
최초의 CD는 1981년에 독일 하노버에서 Polydor Pressing Operations사가 출판했다. 이 디
스크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커가 연주하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이 수록되었다. 이처럼 CD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끈 음반사는 도이치 그라마폰으
로 베를리너에 의해서 1898년에 설립되었다.

1941년, 지멘스가 이 회사를 인수해서 당시 상표권 분쟁이 있던 His Master's Voice 로고를
버리고 현재 사용하는 노란색깔의 튤립 로고로 바꾸었다. 현재는 프랑스 유니버설 레코드가 도이
치 그라모폰의 대주주다. 특히 이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컴팩트 디스
크 녹음에 적극적이어서 알프스 교향곡 이후 무려 330종의 음반을 작업했고 그 결과 DGG를 세
계 최고의 레이블로 만들었다.

도이치 그라마폰은 엄청난 양의 카탈로그를 보유하고 있다. 이 방대한 녹음들을 기반으로 최근에
는 LP 시절의 녹음들을 DG Originals 시리즈로 재발매하고 있고, 레트로 유행을 타고 또 다시
LP시장에서도 주도권을 슬슬 넘보고 있다.

◈ 클래식 음반의 사양화
1990년, 일본 소니가 CBS Masterworks를 인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음반회사들은 비교적 소박
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소니 신화를 이룩했던 사장 오가 노리오(大賀典雄)의 용단으로 미
국의 대표적인 메이저 음반사를 사들였다. 그리고 클래식 부서 사장으로 DG의 프로듀서 귄터 브
레스트를 영입했다. 이때부터 소니는 돈을 물쓰듯 쓰면서 음반사들의 과거관행을 일시에 바꿨다.

DG가 카라얀의 비디오 출시에 눈독을 들이자 소니는 무려 1천만 달러의 저적권료를 제시했고,
제작과 홍보에도 1천만 불을 쓰겠다고 제안했다. 베를린 필이 세 번 세션을 하는데 12만5천불을
지불했다. 4만장 이상 음반을 팔야야 버는 액수였다. 데카에서 4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던 직
원을 소니로 데려와서 10만 달러를 주었다. 게다가 DG를 비롯한 메이저 음반사들이 보유하고
있던 인기 지휘자와 연주자를 거액의 비용을 들여 빼내었다. 그러자 많은 연주가나 지휘자들이
노골적으로 더 많은 전속료를 요구하기에 이르고 브레스트가 이를 거절하면 그들이 오가 사장에
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을 택했다. 오가는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다른 레이블도 전보다 훨씬 많은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수요는 그리
늘지 않았는데도 음반 생산은 해마다 세 자리 숫자로 늘어났다. 1980년대, 사람들은 한해에 평
균 10장 정도의 음반을 구입했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서 너 장 수준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시절이 끝나고 있었다. 음반사들이 서서히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소니 본사가 드디어 소
니 클래시컬에 대한 감사에 들어갔고 무려 1억 달러에 달하는 돈이 낭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
다.

가게마다 팔리지 않는 음반들은 쌓여만 갔다. 게다가 염가 음반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레이블
(낙소스)이 등장하면서 CD 한 장에 과거 가격 1/3 짜리 CD가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연주
자나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완성도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동구권에서 100달로 오케스트라를 급조해서 음반을 만드는 일이 빈번했
다. 지휘자나 독주자들은 1천불이면 즐겁게 녹음에 임했다.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예노 얀도가 녹
음한 베토벤의 소나타는 무려 25만장이나 팔렸다. 다른 레이블에 소속됐다면 큰돈을 벌었겠지만
낙소스는 이미 그에게 1천 달러를 출연료로 주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기의 이름으로
된 음반이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DG나 EMI가 발매한 아바도의 신보가 100여장밖에 팔리지 않았는데 낙소스에서 나온 힌데미트
의 현대음악은 1만8천장이 팔렸다. 싼값이 그런 현상을 만들었다. 대형할인점에 진열된 낙소스의
음반이 미국에서는 불과 2-3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1997년, 소니는 더 이상 클래식 음반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채택했다. 대신에 크로스오버
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슈아 벨이 영화 <아이리스>의 사운드트랙을,
요요마는 <와호장룡>과 <티베트에서의 7일>에서 연주하게 되었고,
Il Divo,
바비 맥퍼린,
힐러리 한 등이 여기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두자 모든 메이저 음반사들이 너도나도 클로스오버에 투자하기 시작했
다. 결국 클래식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2001년이 되자 메이저
음반사들의 매출을 다 합쳐도 10년 전 한 회사의 매출에도 미치지 못했다. 아바도가 베를린 필
의 감독으로 취임해서 녹음한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이 5년 동안 5천여 장 팔리는데 그쳤다. 5
만장을 팔아야 겨우 수지를 맞출 수 있었던 음반이었다. 이 음반은 나중에 DG에서 <아바도 에
디션>에 포함되어서 재발매 되었는데 불과 60장이 팔렸다.

사이먼 레틀의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2번과 5번은 2천 여 장,
하이팅크의 말러 제7번은 1년반 동안 고작 400장이 팔렸다(미국 경우).
결국 거의 모든 클래식 연주가와 지휘자들이 음반사에서 퇴출되었다.

너무 튼튼해서 재구매가 발생하지 않는 CD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도 클래식 음반의 퇴출을 부
추긴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인터넷의 활성화가 클래식 음반업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런
데,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세상에 알려진 최고의 명곡들은 이미 너무도 많이 녹음되었고, 새롭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작품들이 나오지 않으니 클래식 음반 시장이 지속되기
가 어렵게 된 것이다.

1994년에 조사된 클래식 음반 현황을 살펴보면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이 79종이나 되었고,
2006년에 스웨덴의 한 웹사이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비발디의 4계는 무려 435종,
아마존 닷 컴의 카탈로그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276종,
카라얀,
네빌 마리너,
게오르그 솔티,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의 음반만 해도 2천종이 넘었다.

음반이 등장하기 이전의 오케스트라나 연주자들은 나름대로 고유한 음악적 개성을 지니고 있었
다. 그러나 음반이 등장하면서 오케스트라 기량은 평준화되었고, 연주자들의 기량도 동반 향상되
면서 이른바 몰개성의 길을 걸어왔는데, 비발디의 4계가 435종이나 되면 뭐하겠는가? 다들 거기
서 거기인데 ---.

뿐만 아니라, 60G의 MP3 플레이어에 CD 600장에 해당되는 교향곡과 오페라를 저장하는 시대
에 CD는 설 자리가 거의 없어졌다.

◈ 시대 연주
Archive 레이블의 새로운 책임자가 된 안드레아스 홀슈나이더는 바로크시대의 대중적인 레퍼토
리를 생산해왔던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작곡 당시의 스타일대로 연주하는 시대연주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때가지 이 레이블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카를 리히터는 “바흐를 옛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정보를 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때는 시간이 지
나면 시들해질 유행일 뿐이다”라면서 홀슈나이더의 시도에 반기를 들었다.

1948년, 네덜란드의 하프시코디스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의기투합
해서 시대연주에 정진하기로 하였고, 1954년에 레온하르트가 결성한 <바로크 앙상블>과 아르농
쿠르가 결성한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이 합동으로 바흐의 칸타타를 녹음했다.

영국의 알프레드 델러가 이들보다 조금 빠르게 시대음악 연주를 음반으로 발표했지만, 음악계는
물론 애호가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대연주는 이들이 작업한 바흐의 칸타타였다. 아
르농쿠르는 1969년의 미국순회공연을 계기로 아예 시대연주의 전도사로 나서기로 작정했다.

이후 레온하르트,
조르디 사발,
톤 쿠프만 등 다수의 시대연주자들이 등장해서 본격적인 시대음악의 문을 활짝 열었다.

1976년에 네덜란드의 한 교회에서 녹음하고 텔레푼켄 레이블로 발매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
주곡 음반엔 레온하르트가 길러낸 제자들
시위스발트 카위건 (바이올린),
안너 빌스마(첼로),
비란트 카위컨(하프시코드),
프란츠 브뤼헨(리코더),
봅 반 아스페렌(하프시코드)이 총출동했다.
이후 영국의 트레버 피노크와 존 엘리엇 가디너, 독일의 라인하르트 괴벨 등이 이 흐름의 주류에
들어왔다.

◈ 영국에서 있었던 일.
서스턴 다트라는 건반악기 연주자가 EMI의 세션 중에 가진 휴식시간에 평소보다 낮은 음높이와
빠른 템포로 바흐를 연주하면 훨씬 좋은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그는 1959년에
시대악기로 연주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발표했다.

시대음악연주는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무렵부터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국과 독일의 음
악가들이 이 새로운 도전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1976년부터이고, 일본에 시대연주
단체가 결성된 것이 1989년 무렵이니, 결과적으로 우리는 10수년 늦게 이 새로움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 셈이다.

설립 시기로 보아서 가장 늦은 단체라 할 수 있는 <18세기 관현악단>을 비롯해서 근래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실내악단은 대체로 고음악 연주를 표방하고 있다. 분명, 이것은 20세기와 21세기
의 가장 두드러진 연주의 변혁이라고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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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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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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