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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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Subject  
   음악의 민주화


제법 오래 전의 일이지만 [한 지붕 세 가족]은 매주 일요일 오전 MBC-TV에
서 방송되었던 시츄에이션 드라마다. 도시서민들의 꾸밈없는 삶의 체취가 물
씬 풍기고 있는 데다, 적당히 웃음과 눈물도 가미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서민중의 서민이라 할 수 있는 순
돌이네 가족이 난생처럼 오페라 관람을 가게되는 상황을 설정했다.

오페라 관람, 순돌이네의 지금까지의 삶의 패턴으로 본다면 이건 어마어마하
게 큰 사건이었다. 세 식구 중 가장 흥분한 인물은 이번에도 역시 순돌 아빠
다. 어디서 구했는지 낡아빠진 포니까지 빌려서 모처럼의 품위 있는 외출에 나
선다. 우선 나비넥타이 맨 웨이터가 시중드는 고급 레스토랑 行, 순돌 아빠는
한껏 혀를 굴려서 웨이터를 부른다. 완전한 美國式 발음으로 "웨이러!". 연신
외국어 섞어가며 음식 주문을 하지만 웨이터의 표정이 묘해진다. 들은 풍월로
줏어대긴 했지만 그게 통할 리가…. 순돌아빠도 사실은 이런 고급 식당이 처음
이니 말이다. 세 식구는 난생처음의 레스토랑 나들이에서 너무도 거북하게 저
녁을 먹은 데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음식값에 주눅이 든다. 게다가 고물 포니마
져 고장이 나서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예술의 전당'에 도착한다. 난생처음 보
는 오페라, 순돌이는 집에 가자고 보채고 순돌 엄마는 큰소리로 아들과 얘기하
다 옆자리에 구박받고 순돌 아빠는 견디다 견디다 끝내 코를 곤다. 순돌이네
의 모처럼의 문화 나들이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거북스럽게만 진행되다가
순돌이 엄마의 짜증 폭발로 끝을 맺는다.

고도로 발달한 오늘의 산업사회는 사람들에게 일찍이 어느 시대의 인간도 누
릴 수 없었던 풍요로운 물질과 문명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도시는 물론 농
촌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가전제품이 보급되어 있고, 놀랄 만큼 빠르게 증가
하고 있는 자동차의 보급 사정도 현대 산업사회의 물질적 혜택을 실감하게 한
다. 게다가 통신시설의 발전, 교통의 발전은 지구촌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설정
하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반면, 현대의 조직화된 사회구조와 산업기능의 고도화는 인간을 한낱 부속적
인 존재로 비인격화시키는 역작용도 낳고있다. 그 결과 현대인은 극도의 고립
감과 소외감에서 고뇌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가 어떤 거대한 조직의 극히 미미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상대적 왜소감에 몰리게 된다. 물질적 풍요는 누릴지언
정 정신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빈곤의 상태에 놓여있는 셈인 것이다.

이러한 오늘의 상황은 문화현상이나 문화영역도 그대로 대입되고 있다. 대규
모의 건물, 최신의 설비를 갖춘 공연장은 속속 늘어나고 있으나 이들 공연장
을 채울 절대인구는 그만큼 늘어나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러한 공연장들을 '특정 계층'을 위한 시설물 정도로 치부한다. 또 어떤 사람
들은 '배부른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란 생각도 갖고있다. 실제로, 꽤 많은 사람
들은 음악감상에 대한 훈련이나 준비가 되어있지 못함으로 해서 음악회는 '나
와 상관없는 일'로 재껴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끌려서 음악회엘 가
게되면 순돌이네 같은 해프닝을 벌일 수도 있게되는 것이다.

음악에 있어서 대중성과 예술성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라고 보아진다. 대중
음악과 예술음악(혹은 순수음악)을 갈라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
지만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면 그러한 편짜기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명백
해 진다.

<예> :
(1)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대중음악인 동시에 예술음악이다. 이 작품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좋아하는 경우도 드문 것이니 정녕 대중음악이요, 아
울러 미학적인 높은 향훈을 지니고 있으니 예술음악인 것이다.

(2)예스터데이(Yesterday)는 예술음악인 동시에 대중음악이다. 이 곡이 갖고
있는 바로크 스타일의 복음악적 技法은 훌륭한 예술음악임을 증명하고 있고,
두고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애창하고 있으니 분명 대중음악이다.

결과적으로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이라는 二分法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오
늘 우리 나라의 음악상황은 극단적 이분법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예술음
악은 날로 제도화와 전문화의 벽을 쌓고있다.

1987년도 여름, 일본의 실내악 상황을 취재하던 중 82세의 老評論家 마끼氏로
부터 "한국인은 음악을 배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본인들은 음악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두 국민사이의 현
저한 인식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
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본질적으로 그런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
다. 오히려 그러한 인식의 씨를 뿌렸던 것은 우리의 교육적 오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영어교육이 살아있지 못한 것과 같다. 중·고교
6년간 영어를 배우고서도 회화 한마디 못하듯 우리 음악교육은 '음악은 어렵
다'는 쪽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음악 전문가와 일반인의 간격은 너무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
다 보니 음악회는 일부 식자층이나 고상한 취미의 소유자들이나 가는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현대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의 궁극적 관심과 목표는 인간답게 사는 것일 게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생활의 질적 향상은 이제 보편적인 삶의 목표가 되고 있
다. 그렇다고 한다면 음악에 있어서의 민주화도 필요한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
만이 참여하는 음악이 아니고 폭넓은 계층,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특히
예술음악을 공유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음악의 민주화일 것이다.

음악의 민주화를 가능케 하는 몇 가지 샘플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영국에서
1895년에 시작된 프라머네이드 콘서트(Promnade Concert, 약칭 <프롬>)이
다. 지휘자 헨리 우드(Henry Wood, 1969-1944)에 의해서 창설된 이 음악회는
런던의 퀸즈홀(Queen's Hall)에서 개최됐는데 값싼 입장료와 넓은 공간에 힘
입어서 다수의 청중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종래
의 음악회와는 달리 자유스러움을 제일로 삼았기 때문에 상당한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두 번째의 샘플은 러시아와 동구권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중음악회 People's
Concert'다. 이 음악회는 주로 구소련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문화적 질을 향
상시키기 위해 시도되어 온 것으로 수준급의 연주자나 앙상블이 공업도시를
순회하면서 개최하는 프로그램이다. 때문에 러시아와 동구권에서는 공장에 콘
서트 홀이 없는 곳이 거의 드물다. 여기에서 연주되는 음악의 곡목이나 내용
이 국가이익에 부합되는 것으로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것이 비판되기는 했지
만 중앙 집중적 문화정책을 탈피하고 있다는 점과 근로자 계층에 대한 문화적
서비스, 또는 문화적 삶의 베풂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될만한 것이다.

미국의 보스턴 팝스 콘서트, 별밤 음악회(Starlight Concert)도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음악회는 연주홀에서 해야한다"는 생각에 변화가 없는 한 음악의
대중화, 음악의 민주화는 어려울게다.

나는 이따금씩 산업체나 야외에서 음악회를 가져보았다. 그 음악회들은 통상 2
부로 나누어서 진행되는데, 1부에서는 연주가들의 생생한 음악으로, 2부에서
는 재생기기를 통한 오디오 혹은 비디오 감상의 내용이었다. 산업체의 근로자
들, 야외에 모여든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 산골에 모여든 등산객들...
그들은 한결같이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반응했다.

고전파 시대까지만 해도 음악의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구별은 희미했었다. 낭
만파 이후, 악기의 발달, 奏法의 개발, 작곡법의 복잡화가 전문과 비전문의 간
격을 만들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음악가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는 현상을
빚고, 나아가서는 음악을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려는 이데올로기를
낳고 말았다.

음악인구의 저변확대를 가장 소망하는 계층은 다름 아닌 연주가(음악가)들이
다. 그런데도 정작 전문가들은 음악의 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적극적인 것과는
먼듯하다. 그들은 '훌륭한 연주홀'에서 연주하길 원하고 높다란 무대 위에서
객석을 내려다보길 원한다. 일부 음악가들은 야외나 산업체의 공연을 제의하
면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피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보다 많은 청중이 그들
의 음악회에 오기를 원한다.

음악의 민주화를 위한 또 하나의 방법(길)은 연주곡목의 민주화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오케스트라의 어느 공연에서 프랑크(C, Franck)의 교향
곡을 연주했다. 연주홀은 고교생, 여군, 군악대, 대학생, 직장인등 다양한 청중
으로 거의 만원, 물론 프랑크의 교향곡은 뛰어난 예술작품이다. 단지 흠이 있
다면 [운명]보다는 대중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객석의 반응은 곡
의 3악장쯤에 가서는 [순돌이네]와 거의 닮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앙코르에
서 객석은 전례 없는 반응으로 즐거운 응답을 했다. 곡목은 비제의 카르멘 전
주곡, 청중은 시종 리듬에 맞춰 손뼉을 맞췄고 지휘자도 신명이 났다. 민주화
가 이룩된 순간이다. 이 연주회가 끝난 뒤 지휘자를  만났더니 "앙코르 곡목 선
정의 아이디어를 달라"는 주문이다.

청중의 편에서 본다면, 음악회의 성패는 레퍼토리의 선택에서 이미 절반은 결
정된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오늘의 우리 연주회는 '박물관 전시회'를 면치 못
하고 있다. 바하·헨델·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슈만·슈베르트·바그너·말러 등 이
미 옛 시대 작곡가들이 남긴 유물들을 무대 위에 펼쳐놓는 것이다. 게다가 연
주회 형식마저 (1)서곡 (2)협주곡 (3)교향곡의 범주를 크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요소들 역시 음악의 민주화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연
주자들의 학구적 욕심이나 잘못된 선곡 아이디어로 인해 근엄한(?) 골동품들
로 연주곡목이 채워지기 다반사니 음악회는 '어려운 것'이 되기 십상이다.

다행스럽게도 청중을 찾아 나서는 연주가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고무적 현
상이다. 음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연주자의 다양한 체험을 위해서, 장소와 때
를 가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주자는 선곡의 예술성과 대중성에 대한 지혜로
운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 또한 전문과 비전문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이 될 것
이다.

** 이 글을 퍼 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출처는 밝혀주시기 바랍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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