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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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Subject  
   막걸리와 홍탁


오늘 점심은 유별난 반찬을 곁들인 탓인지 식사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온지
벌써 두어식경이나 지났는데도 마음 한켠에 여운이 배부르다.

부산의 중앙동은 이름 값을 하고도 남을만큼 부산의 명실상부한 중앙지역이
다. 바로 곁에 바다가 있고, 좌우로는 부산의 마천루답게 고층 빌딩이 즐비하
고, 바로 길 건너편엔 광복동이 펼쳐져 있다. 그러다보니 점심시간의 중앙동
거리는 일대 장관이 연출된다. 월급쟁이 위장은 어김 없이 정오만되면 허기지
는지 약속이라도 하듯 빌딩마다 배고픈 군상들을 토해낸다. 때문에 중앙동엔
유난히 식당이 많다. 빌딩가 뒷골목의 집들은 식당 아니면 커피숍이다. 그런데
도, 매일매일 점심을 식당에서 해결해야 하는 월급쟁이들은 사무실을 나서면
서 "오늘은 뭘 먹나?" 전전긍긍이다.

오늘 점심도 그렇게 시작됐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 가운데 점심 약속
이 있는 사람들 제외하니 세 사람이 남았다. 셋은 별 대책 없이 무작정 엘리베
이터를 탔고, 지하도를 건넜다. 그때도 식당은 결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
이, 홍탁 어때?", 누군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홍어를 짚단에 넣고 썩힌다
는 전라도의 별미, 진한 초고추장을 잔뜩 바르고 거기에 시뻘건 고추가루를 듬
뿍 묻혀서 입안에 넣으면 "싸 ---"한 기운이 입으로 코로 마구 덤벼드는, 그 홍
탁이다.  뾰죽한 반론이 나오지 않으면 점심 행선지는 이런 식으로 결정되기
마련이다.

중앙동에서 제일 간다는 홍탁집은 용두산 계단 입구에 있었다. 옥호(屋號)는
[탁주와 홍어(洪魚)]다. 탁자 다섯개, 엉성하게 이은 창틀, 갈데 없는 선술집
치장이다. 이따금 대포 한잔 걸치러 해질녁에 들렸을 뿐, 식사를 위해서 그 집
을 찾기는 모두들 처음이다. 오래 전부터 이 집은 그 특유의 향미를 자랑하는
막걸리와 톡톡 쏘아대는 홍어로 이름이 높았지만, 역시 밤에만 찾았던 탓일
까? 낮에 앉은 그 자리가 왠지 익숙하지가 않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니, 벽면
엔 온통 문화행사 포스터 투성이다. 미술, 연극, 음악이 총망라되어 있었고,
벽 중앙엔 3월의 음악회 일정(日程)이 정성들여 쓴 글 솜씨로 게시되어 있었
다. 그리고, 조금 후. 주인이 잠시 일어나는가 싶었는데 그리그(Grieg)의 [페르
귄트]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것도 [오제의 죽음]부터 시작이다. 실내에 흐르
는 음량도 제법 컸던 편이니 갑자기 숙연해 진다. 그 음악이 흐르기 전, 우리
의 식탁화제는 법무부 장관과 보사부 장관의 거취(去就)에 관한 것이었고, 제
법 분위기도 크레센도를 향하고 있었는데 페르귄트의 오제의 죽음 한 소절이
일순에 입을 닫게 만든 것이다. 바야흐로 음악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 순간
이었다.

[탁주와 홍어]의 주인은 부산 화단(花壇)에서 중견으로 활동하고 있는 화가 ㅈ
씨다. 비혹 외양(外樣)은 허술하지만 실내의 분위기에서 문화의 냄새를 흠씬
맛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집의 문화적 냄새도 냄새려거니
와 다른 집에서 맛보기 어려운 한국의 토속 음식들을 여기서는 어렵지 않게 만
날 수 있다는 잇점 때문에 주당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부산엔 유명한 예술인이 경영하는 술집이 네 군데나 된다. [양산박]이라는 옥
호의 술집이 둘이며, [지리산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소설가 최화수가 최
근에 문을 연 [지리산 주막], 또 하나는 [탁주와 홍어]다. 수호지(水湖志)에 등
장하는 양산박이 부산에 둘이나되는 사연은 제법 길어서 여기에 다 소개할 처
지는 아니지만, 하나는 소설을 쓰는 윤진상이 운영하고 있고, 또 하나는 시를
쓰는 임명수가 주인이다. 옥호가 같아서 분간하기 어려워 부산 사람들은 [윤산
박]과 [임산박]이라는 별호로 부른다. 주인의 성씨를 붙인 것이다. 둘다 1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한동안 이들 양산박엔 내노라는 문화 예술인들이
단골로 출입해서 부산 문화의 스트레스 해소의 장(場)으로 애용되었고, 이를
소재로 삼은 최화수의 넌 픽션 [양산박의 사람들]이 {월간 동아}에서 주는 상
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두 양산박에서는 음악이 그리 중요한 몫을 차지하
지 않는다. 안주나 술의 종류도 평범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지리산 주막은 최
근에 문을 열었기에 아직 특징에 대하여 말을 붙일 계기가 아닌듯 싶으나, 여
기서는 음악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다해도 탁주와 홍어처럼 음악에
큰 비중을 싣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다.

홍어엔 막걸리가 필수적이다. 옥호를 [탁주와 홍어]라고 지었을 정도이니 이
집의 특징을 알만하다. 거기에 음악이, 그것도 서양의 고전음악이 버티고 있
다. 막걸리와 홍탁과 서양음악,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묘한 어울림이다.

난데없는 [오제의 죽음]으로 시작된 페르귄트는 우리가 점심을 끝낼 때는 [페
르귄트의 귀향]에 이르고 있었다. 입안에서는 홍탁의 그 앙살스러운 독기가 번
지고, 귀에서는 그리그의 서정(抒情)이 흐르는 별난 점심이었다. 다섯 개의 식
탁 중에 셋만 손님이 앉았으니 점심장사가 별 신통치 않았을 터인데, 주인장
화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의 공연 관람을 약속하고 있다.

양산박엘 갔을 때, 지리산 주막을 들렀을 때처럼 나는 또 어쩔 수 없는 생각에
빠진다. "예술가와 삶은 어떤 관계일까?" 점심을 끝냈다. "얼맙니까?" "이만원
입니다" 화가 주인의 대답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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