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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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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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음악메모(24)/1980년대의 부산문화


1980년대의 부산 음악문화는 量과 質에 있어서 나란히 비약의 나래를 활짝 폈
던 시기라고 해야겠다. 1975년을 고비로 연간 100회의 음악회를 갖기 시작하더
니 1980년에 들어서면서 200회로 놀라운 팽창을 보였고, 80년대 후반엔 300여
회의 개최 횟수를 기록했다. 이는 부산대를 비롯한 부산의 6개 4년제 대학의
음악과에서 매년 배출시키는 음악전공인구의 양적 증가와도 연관이 있으며,
연주 공간의 확대, 공연 메니지먼트의 활성화 현상과도 연계시켜 생각할수 있
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학교수가 전문 연주가를 겸하는 것이 관례이고 보면, 80년
대에 재부 각 대학의 음악과에서 해외유학 경험을 우선적으로 고과하여 교수
를 초빙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부산에 정착하게 된
몇몇 젊은 교수들이 단연 부산의 연주계를 이끌어가는 그룹으로 등장하게 된
다. 한명희(피아노)김영희(바이얼린)권혜령(피아노)조현선(피아노)장원상(테
너)신진범(소프라노)공정배(바리톤)등이 그들이고, 이미 70년대부터 부산 연
주계를 지켜온 나광자(피아노),장희순(소프라노)제갈삼(피아노)서심미(피아
노)배정행(바리톤)김문희(소프라노)등도 의욕적인 활동을 펴 80년대의 발전
을 굳건히 다졌다.

80년대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실내악의 붐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실
내악의 선두그룹은 [부산 트리오]이다. '84년, 한명희, 김영희를 중심으로 결
성된 이들은 2년 뒤 고재용(시향 첼로수석)을 합류시켜 지금까지 20여회의 왕
성한 연주활동을 펼쳐왔고, '85년엔 김영희를 리더로 하는 [부산 신포니에
타],'88년, 임병원, 이유미 등을 주축으로 하는 [뮤즈 실내악단],'89년, 정인호
를 리더로 한 부산 필하모니 챔버, 백원석을 중심으로 [부산 까메라타 합주단]
이 잇달아 창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도 이상근(전, 부산대 교수)이
의욕적으로 이끌어 왔던 [프로 무지카 실내 합주단]은 이교수의 정년퇴임과
동시에 해체되긴 했으나 레퍼토리의 확대, 견실한 앙상블의 제시로 신선한 자
극제가 되었고, 배종구(동아대교수)가 수년간 이끌고 있는 [동아 실내합주단]
의 꾸준한 역량의 신장도 실내악 중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내악의 양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질적 충실도엔 많은 문제가
상존하고 있어 90년대의 숙제로 넘어가야 될 것 같다.

80년대는 시립예술단에게 커다란 시련을 주었던 시대였다. 시향은 지휘자와
단원들의 갈등으로 두번의 몸살을 앓았다. 그 결과 '81년엔 시향의 해체라는
불행을 당했고, '88년엔 상임지휘자(박종혁)가 퇴진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시향은 올 11월, 소련 출신의 마크 고랜슈타인(44)을 상임지휘자로 기용하여
심기일전의 전열을 가다듬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가졌으나 관편성의 확대, 유
능한 주자의 확보, 전문 메니지먼트 제도의 도입 등 숱한 과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

한편, 시립합창단 역시 지휘자와 단원의 갈등으로 '89년 9월, 지휘자와 8명의
단원이 해촉되는 창립 이래 최대의 위기를 거치면서 여전히 난파선 형국을 면
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립국악관현악단은 상임지휘자와의 갈등 문제를 비교적
조용하게 해결하는 슬기를 보이면서, 국악과 서양성악과의 조우, 청소년을 위
한 무료 감상회, 무료 국악 강습교실, 빈번한 객원지휘 초청등 전향적인 모습
으로 국악의 대중화 작업에 적극 나서고 있어 90년대가 기대된다.

오페라 공연은 나토얀 오페라단(대표/단장/박두루), 부산소극장오페라(대표/
이창균), 부산시민오페라단(대표/배정행)등에 의해서 명맥이 유지되기는 했으
나 빈약한 재정문제, 전문 스탭의 부재, 뚜렷한 오페라 스타의 부재 등으로 작
품의 완성도가 크게 떨어져 관객의 급격한 이탈 현상을 보이긴 했으나, 소극
장 오페라가 비교적 순항을 거듭하고 있어 관심을 갖게한다. 그러나 이 지역
에 오페라다운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지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의 육성, 제정의
견실성, 레퍼토리의 확대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피아노와 성악에 의해서 주도되어 왔던 연주계가 80년대 후반부터 점차 악기
종류의 다양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우영(클라리넷,유학중), 성기열(더
블베이스,유학중), 고재용(첼로,시향수석), 이하룡(프루트)등이 자신, 혹은 제
자들과 연주회를 가져 관심을 모았으며, 특히 '89년엔 첼로 독주회만 9회가 열
려 이 악기의 인구 증가세를 실감케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른바 비인기 악기
의 활동은 침묵으로 일관되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된다.

서울 올림픽이 확정된 싯점을 전후로 동구권의 연주자와 단체들이 80년대에
부산을 찾은 것을 비롯해 외래연주가 풍성했던 거도 80년대의 수확일 것이다.
이는 민간 메니져들의 왕성한 활동의 결과에서 주목된다. 70년대의 외래연주
태반이 언론기관에 의한 것이었는데 비해 80년대엔 9할 이상이 민간 메니져들
에 의해 공연되었다.

[동서문화회] [부산예술협의회] [가은예술회] [부산예술회] [양석기획] [부
산예술기획] 등이 80년대에 발족된 민간 메니지먼트 조직이며, 특히 [부산예
술협의회(회장/박숙자)] 는 단순한 외래단체의 초청이나 기획에 머물지 않고
[부산트리오][부산신포니에타][부산청소년교향악단]을 창단시켜 산하 연주
단체로 육성하는 등 지역예술가의 지원에 적극적이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민간 메니져들의 경제적 운용능력이 취약하여 기획의 대부분(특히 외
래물)을 서울에 의존하거나 아예 대형 연주물을 유치하지 못하는 현실이어서
향후 기업차원의 참여가 기대된다.

'80년대의 가장 큰 숙제는 음악대학의 설립이었으나 끝내 미해결의 장으로 넘
기게 된 점이 못내 아쉽다.


                               1989년 12월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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