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파이프 오르간
부산에서 활동하는 크고 작은 앙상블 그룹이 상당한 수효를 헤아린다. 여기에
다 부산을 찾아오는 외국의 앙상블을 합치면 그 숫자는 대단한 것이 된다. 그
에 따라서 실내악곡 선곡의 폭도 점차 확대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1992년
을 예로 들어보면, 한해 동안 부산에서 연주회를 개최한 국내외 실내악 그룹
은 40개 단체에 이르며, 이들이 연주한 실내악곡이 100여곡에 달하고 있다.
1992년의 실내악 연주회와 연주곡목의 확대는 전례가 드문 것으로 분석되며,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목요문화 별책 부록 참조)
올해만 해도 <부산 신포니에타>와 <부산 챔버 필> 등의 국내 그룹과 카나다
의 <이무지치 드 몬트리올>이 공연을 가졌고,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챔버>
같은 세계의 유수한 실내악단이 내한 공연을 예정하는 등 실내악 그룹의 숫자
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내악 연주가 이토록 활기를 띄는 것은 세계
적인 추세이며, 이에 따라서 이 부문의 음악을 즐기는 수용인구도 괄목할 만
큼 증가하고 있다. 반가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실내악 연주곡목 가운데서도 비중이 큰 부문은 아무래도 바로크 음악일 것이
다. 작년에 부산에서 연주된 바로크 실내악곡이 20여곡에 달하여 전체의 20%
를 차지했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이 시대의 실내악 악기
편성에서 쳄발로(獨, Cembalo, 英, Harpsichord, 하프시코드)는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한다. 쳄발로에서 뜯겨지는 그 독특한 음색과 뉘앙스야말로 바로
크 음악에 대한 현대인의 연민을 자극해 주는 핵심이 된다. 그런데, 부산에서
연주되는 바로크 음악에서 쳄발로의 그 매력적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부
산의 주요 공연장에 이 악기가 없기 때문이다. 부산에 있는 쳄발로는 2대 뿐이
다. 그중 한대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으며, 또 한대는 대학에 있다. 문회회관과
시민회관엔 이 악기가 없다.
말할 나위 없이 쳄발로가 편성되어 있는 작품은 쳄발로로 연주되어야 한다. 쳄
발로를 제외시키거나 피아노 등으로 대체된다면 이미 그 연주행위는 정상을
벗어난 꼴이 된다. 한국의 청중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비발디의 <4계>도 쳄발
로가 편성되어 있다. 봄날의 그 화사한 환희와 여름의 지루한 권태가 이 건반
악기로 채색될 때 사람들은 계절의 맛을 실감나게 즐기게 된다. 그러나 부산에
서 꽃 피고, 천둥치는 비발디의 봄, 여름은 그 찰랑찰랑한 맛을 주지 못하고 있
다. 쳄발로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4일, 문화회관에서 내한 공연을 가진 카나다의 <이 무지치 드 몬트
리올>은 참으로 깔끔한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2년 전의 한국 공연에서 대중가
요 가수와 조인트를 갖는 통에 본령의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들이 이번 공연에
서 비로소 <세계적 악단>이라는 긍지를 되찾을 수 있었던 인상적인 공연이었
다. 그날, 비발디의 봄과 여름이 연주됐다. 쳄발로 없이. 결과는 역시 아쉬움이
다. 그 특유의 음색을 동반한 <바소 콘티누오>가 빠진데서 오는 아쉬움이다.
5월에 예정되어 있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곡목 속에도
<4계>가 들어있다. 메니져는 챔발로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뛴다지만 자신
이 없다는 표정이다. 작년 10월 10일, 문화회관에서는 양세완씨의 오르간 독주
회가 열렸다. 부산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오르간 음악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건
너가 전학년 장학생으로 오르간을 공부하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오르간 독주회를 가진 화려한 경력의 연주자 였다. 그러나 부산의 공
연장엔 어디에도 파이프 오르간이 없다. 양세완씨는 전자 오르간으로 그날의
독주회를 가졌다. 제아무리 훌륭한 전자 오르간이라 해도 파이프 오르간의 본
령과 같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차선이 될지언정 최선은 아니었던 것이다.
파이프 오르간이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절름발이 연주회는 너무도 많다. 대부
분의 종교 합창곡은 오르간을 요구한다. 메시아를 예로 들면 이해에 도움이 되
리라.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으니 합창단은 그 무거운 전자 오르간 끌고 다니
느라 막대한 경비와 노력을 헛되이 쓰게 된다.
1992년 한해, 부산에서는 모두 10회의 듀오 피아노 연주회가 열렸다. 듀오 피
아노 연주는 이제 음악회의 한 부문으로 확고한 뿌리를 내렸으며, 이에 따라
서 <부산 피아노 듀오 협회>와 <피아노포르테>라는 듀오를 전문적으로 연구
하고 연주하는 동인 그룹이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도
사리고 있다.
어느 공연장에도 동일한 피아노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피아노 듀오 연주는 가
급적 동질의 피아노를 조건으로 삼는다. 문화회관엔 대강당에 스타인웨이와
국산 피아노가 각 1대, 소강당엔 스타인웨이가 아닌 외국산 피아노 1대가 있
다. 시민회관도 사정은 비슷하다. 스타인웨이와 일본제 야마하, 국산이 각 1대
뿐이다. 경성대학 콘서트 홀도 예외는 아니다. 결과적으로 피아노 듀오에서도
최선을 선택할 방법이 없다.
쳄발로, 오르간, 피아노 등 주로 건반 악기에 관한 부산의 형편을 소개하였으
나,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가는 연주곡목의 폭에 대응하기 위해서 부산이 갖추
어야할 특수악기들의 항목은 얼마든지 있다.
1990년부터 음악계 일각에서 문화회관에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해야 한다는 논
의가 활발하더니 지금은 시들하다. 당국의 무반응 탓이다. 막대한 비용이 소요
되는 大事이기에 개인이나 민간단체에선 엄두를 차마 내지 못한다. 오르간 설
치의 최적지로는 역시 문화회관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이리저리 말을 건네 보
았지만 관에서는 어떠한 구체적 반응도 보여주질 않는다. 현재, 외국에 유학
하여 오르간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상당수에 달하며, 고신대학 종교음
악과와 천주교 음악원에서 매년 배출되는 전공자들이 수다하다. 그러나 그들
이 앉을 수 있는 오르간이 공연장엔 없다.
오르간이나 쳄발로 같은 특수한 악기들은 청소년들의 살아있는 음악교육을 위
해서도 긴요한 필수적 악기들이다. 실내악과 합창음악, 종교음악 연주회의 정
상화를 위해서도 이들 악기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게다가 저토록 계속해서
내한하는 유수한 외국 실내악 그룹에게 언제까지 이들 악기에 대한 구차한 변
명을 늘어놓겠는가?
쪼들리는 부산시 재정에 오르간이나 쳄발로가 무슨 가당치 않은 배부른 소리
냐는 이야기는 없기를 바란다. 지금도 완공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는 문화회관
의 당당한 모습에서 우리는 악기 문제 해결의 기대를 가져 본다.
곽근수 1992.4.21
*** 이 글은 1992년 봄에 쓴 것인데, 결과적으로 부산문화회관엔 오르간이 건
설되지 않았고, 그나마 몇년 전에 구입한 쳄발로는 관리부족과 조율 등의 문제
로 해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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