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음악의 르네상스
** 10월9일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부산 청소년 교향악단의 창단 연주회가 박종혁교수(부산
시향 상임지휘자)의 지휘로 열렸다. 중학3년에서 대학 졸업반에 이르는 68명
의 싱그런 젊음들이 풋풋하면서도 야무진 앙상블을 들려줬다. 불과 몇해 전만
해도 어찌 감히 이런 정경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따금씩 서울예
고 실내악단이 내려오고, 서울의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부산에 와서 연주회를
갖게되면, 그저 부러운 눈초리로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
다.
1986년6월 초순, 박종혁(부산시향 상임지휘자). 박숙자(공연기획자), 한명희
(피아니스트), 김영희(바이얼리니스트), 필자 등이 모여서 청소년교향악단 창
단 준비를 시작할 때만 해도 과연 이 일이 성사될 수 있을는지 누구도 자신 있
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모아본 결과 적어도 60명 안
밖 규모의 교향악단을 만들 수 있는 청소년 자원이 있음을 확인하고 오디션 일
정을 확정 지었다.
오디션이 있는 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집으로 걸려온 몇몇 전화는 어떤 학교
가 오디션 참여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정보를 전해준다. 물론 예상했던 일
이긴 했으나 언젠가는 그들도 마음을 열게될것이라는 기대를 걸면서 휴일의
오디션 장소로 갔다. 오디션 응모자는 120여명이나 됐다. 희망이 생긴다. 첫날
은 현악기의 오디션이 실시됐다. 응모자들의 솜씨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넘어
서는 대견스런 내용들이다. 누구를 탈락시켜야 할는지, 그것이 문제가 될 정도
였다.
이렇게 해서 부산청소년 교향악단이 탄생했다. 서울 대구에 이어서 네 번째의
청소년 오케스트라로 출범한 것이다. 연습은 즉시 시작됐다. 그리고 뜨거운 여
름이 그들의 연습과정을 줄곧 지켰다. 지휘자 박종혁은 과로로 쓰러지면서도
"아이들이 너무나 예쁘다"고 대견해하며 연습 스케줄을 늦추지 않았다. 나머
지 운영위원들은 재부기업가들을 방문하면서 후원기금마련에 여름내 땀을 흘
렸다. 단장 김진재는 공장내 강당을 연습실로 새 단장하는 등 아이들의 연습
뒷바라지에 많은 배려를 했다.
부산 청소년 교향악단의 창단연주는 이 지역의 희망의 등불이 되리라는 기쁨
을 주었다. 음악대학 한곳도 없는 부산 실정에서 이 악단이야말로 이상적인 음
악의 수련장일 뿐 아니라 음악대학 설립을 향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 10월19일
일본의 고베 실내악단이 산업대학교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필자는
이보다 약 한달 전 부산에서 그들이 연주할 공연장을 사전 답사차 부산에 왔
던 지휘자 이와부찌 리우따로씨와 만나 꽤 많은 시간 음악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음악 월간지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일본 음악계의 거장
을 만나서 나눈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서 일본 음악계의 최근 동향을 알 수 있
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리우따로씨는 NHK교향악단의 악장을 10년 이상 역
임한 일본 현악계의 최고봉으로 존경받는 인물로서 동경대학 법학부와 예술
학부에서 수학한 엘리뜨이기도 하다.
고베市는 부산과 여러 면에서 흡사한 항구도시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무역항
이며, 4년전에는 포토피아라는 인공섬을 만들어 국제적인 Fair를 벌인 일본 경
제력의 상징적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퍽 낙후되어 마치 우리
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조했듯 "고베는 문화의 불모지"라는 오명을 감수해
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고베 실내악단이 탄생되고 그들의 연주기량이 국내외
무대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되자 비로소 고배 시민의 입에서 자조적인 표현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테면 고베 실내악단은 그들 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의 상
징적 존재로서 부상한 것이었다.
부산 연주회에서 이 악단의 완숙하고 세련된 음악은 객석의 탄성을 불러일으
키기에 충분했다. 16명이 연출해 내는 경묘한 앙상블은 과연 국제적 수준에 올
라있는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이 악단은 서울 대전 경주 부산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 네 곳의 순회연주를
줄곧 동행한 이상만씨(음악평론가)는 "이 사람들처럼 음악 앞에 진지하고 철저
한 사람들은 처음 봤다"고 경탄하면서 그 빡빡한 스케쥴에도 누구하나 불평 없
이 리더의 계획에 따랐을 뿐 아니라 異國의 풍물이 궁금해서라도 연주회가 끝
나면 호텔을 빠져나가 즐기는 시간을 가질 법한데도 단 한명 그런 단원을 보
지 못했으며, 정해진 시간에 취침, 정해진 시간에 연습, 스케쥴에 따른 단체 관
광 등 자로 재듯 행동하더라는 얘기를 들려준다. 따라서 오늘밤의 이런 훌륭
한 연주는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냐는 그분의 결론이었다.
한 두명 스타들의 재능으로 그 나라의 음악수준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보
다 많은 음악인들이 얼마나 음악 앞에 진지해질 수 있느냐는 데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고베 실내악단을 지켜보면서 또 한번 절감한다.
** 10월20일
청중을 생각한다.
오늘 저녁 시민회관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방송 관현악단의 연주회가 열렸
다. 아침에 들은 얘기로는 표가 많이 팔리지 못했다는 소식이다. 언뜻 4년전 로
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이 떠오른다. 그때도 회원권 판매가 부진해서 흥
행을 맡았던 동서문화회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 휴유증 탓인지 서
울에 그토록 뻔질나게 드나드는 국제 수준의 연주 팀이 부산엔 얼씬거리지도
않게 되고 말았다. 시민회관에 도착해보니 걱정했던 것보다는 객석이 꽤 메워
진 상태였다. 불과 한나절 동안 이 정도의 객석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실무자들의 땀흘리는 모습들이 떠오른다.
유명 음악인(단체)이 오면 시민회관 근처는 으레 차량홍수가 일어난다. 국내
음악인 연주회에선 눈 씻고 찾아봐도 못 보는 현상이다. 공연장 로비에 서 있
으면 일반 음악회(1년에 200여회나 열리는)에선 좀체 볼 수 없었던 얼굴들이
너무도 많다. 모두가 성장이고 상기된 표정이고 자신 있는 모습들이다. 그런
데 이런 음악회일수록 나오지 않아야 할 대목에서 요란한 박수가 터져나와 객
석과 무대의 김을 빼는 일이 많은데 는 실소가 나올 뿐이다.
청중은 음악의 옹호자이며 음악의 후원자이며 음악의 디딤돌이다. 청중이 사
는 한 장의 회원권은 음악진흥의 귀한 피 한 방울이다. 이 귀한 피 한 방울이
고르게 쓰여져야만 한다. 갓 태어나는 신인들에게, 제 목소리를 외치는 중견들
에게,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나선 매니저에게, 그리고 저명한 국제적 음악
에게 골고루 나눠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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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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