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할 때 촌티를 벗는다
9월과 10월, 부산에서는 2개의 오페라 공연이 있었다. 하나는 임진왜란 전승
(戰勝)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이상근(李相根)의 오페라 '부산성(釜
山城)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나토얀 오페라단의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이다.
늘 지적되어 왔고, 그러면서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는 오페라 공연의 볼상
사나운 모습들이 이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믿거라
하여 초빙한 타지역 관현악단의 망발(妄發)로 이번엔 아예 난장 맞은 꼴이 됐
다.
나토얀 오페라단(단장:박두루)은 지난 9월 26일부터 5일간 푸치니(Puccini)의
오페라 '라 보엠'을 부산 시민회관 대강당에 올렸다. 당초의 계획은 예년처럼
부산시향이 반주를 맡는 것으로 되었던 모양인데, 부산시가 임란전승 400주년
을 기념하는 오페라 공연을 비슷한 기간에(10월 5일부터 4일간) 주최하기로 결
정함에 따라 부산시향은 '부산성 사람들'의 반주를 맡게 되었다. 결국, 시향(市
響)이 무리한 연주일정을 들어 난색을 표하니 나토얀으로서는 다른 악단을 찾
아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저기 역량 있는 악단을 수소문한 끝에 [대
구 필하모닉 관현악단]과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과거 대구시향에서 활동했
던 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몇 사람들의 소개가 이 계약을 성사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게되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튀기 시작했다. 그
같이 '어처구니없는 오페라 반주'는 처음 들어봤다. 대구의 따로국밥이 유명하
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되 이같은 '따로 반주'는 난생 처음이다. 열창하는(그날,
무대 위의 가수들은 참으로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열창으로 임했다) 가수의
노래를 빛내주기는 고사하고 아예 훼방꾼이 되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음정,
박자, 어느것 하나 제 꼴을 갖춘 것이 없다. 아마도 이 공연은 부산 오페라사
(史)에 필히 기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페라단 관계자로부터 후에 들
어보니 대구·필에 지불한 게런티는 프로 악단(樂團)에 준하는 수준이라고 한
다. 돈은 제대로 챙기고 음악은 '따로' 팽개친 형국이다.
지방 음악계가 때때로 중앙의 사시권(斜視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상
당한 부분이 사람 탓이다. 제 몫은 철저히 챙기면서도 제 일은 뒷전인 경우가
많다면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기 마련이다. 대구·필이 출연료를 챙기는 열성
으로 반주 연습을 철저하게 챙겼다면 그와 같은 부끄러운 음악을 피할 수 있었
을 것이다. 원천적으로 그들의 음악적 역량이 라 보엠을 제대로 반주하기에 부
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최선을 다해
서 오페라 공연에 임했는가 ?" 하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부산에 내려와서 대
구·필이 들려준 음악 내용은 "역시 촌스럽구먼!" 이라는 비아냥거림의 소재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딱하다.
* * * *
대구에 시립 오페라단이 창설되고 첫 작품으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지
난 10월에(10월 8일∼12일) 무대에 올렸다. 연출과 주역(主役)의 일부를 외국
인으로 초빙하고, 국내 캐스트도 대구, 부산, 서울 등에서 고루 기용하였다. 부
산에서는 메조 소프라노 전연숙씨와 바리톤 이창균씨가 주역 급으로 참여했
다.
공연이 끝난 뒤의 평은 대체로 호의적이고 긍정적이다. 이번 공연은 대구의 40
대 중견들이 모처럼의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라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장로
급 성악가들은 무언의 격려를 보내고 실무는 40대가 맡았던 대구 시립 오페라
단의 훈훈한 세월이 부디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부산엔 언제나 시립
오페라단이 생기려나 ?
* * * *
유태계 소련인 지휘자 마크 고렌슈타인(Mark Gorenstein)이 물러난 뒤 후임
수석 지휘자를 물색하여 온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최근 러시아계 미국 지휘자
블라디미르 킨(Vladimir Khin)을 차기 수석 지휘자로 내정하고 12월 7일, 문화
회관에서 취임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다.
블라디미르 킨은 방콕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지낸바 있는 러시아 출신 지휘자
로서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소련 국립 오케스트라 지휘로 데뷔하였
다. 1976년에 카네기 홀에 데뷔하고,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부산시향은 그를 지난 9월에 객원 지휘자로 초빙하여 베버의 '오베론' 서곡, 베
토벤의 '3중 협주곡'(협연 : 토리 트리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1번을 연주
시켰고, 이때의 평가가 상대적인 우위(優位)를 차지하여 1993년, 1년간의 수
석 지휘자로 계약이 성립된 것이다. 계약기간이 1년간으로 그친 것은 킨을 부
산시향의 최종적인 수석 지휘자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반증이어서 이
제부터 그의 음악적 행보가 주목받을 것이다. 킨에게 제공되는 조건은 월 5천
불(미화)의 봉급과 아파트 제공이며, 킨은 1년간 6개월을 체재하면서 12회의
연주회를 지휘하게 된다.
한편, 부산시향은 지난 9월 새로운 악장 김복수씨를 맞아 그와 2년간의 계약
을 체결한바 있었다. 김복수는 배재중·고교를 졸업하고 서울음대 재학중 미국
으로 유학하여 줄리어드 음대 및 대학원을 연주부문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줄
리어드 재학시 도로시 딜레이 교수에게 사사하면서 전장학금을 받았으며, 최
고 연주상을 수상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줄리어드 현악 4
중주단의 멤버로 활약했고, 아스펜 국제 음악제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5·16
민족상 음악부문 특상, 서울대 및 대학원 콩쿠르 1위, 문교부 장관상 등을 받
는 등 다채로운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서울시향, KBS 교향악단, 오사카 필, 저팬·필, 캐나다 사스카툰 심포니, 시애
틀, 오마하, 워싱턴 네셔날, 볼티모어, 컬럼버스 심포니, 아스팬 심포니와 협연
하였으며, 줄리어드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사스카툰 심포니의 악
장(樂長) 및 동 청소년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되었고, 시애틀 심포니
와 볼티모어 심포니의 객원악장(客員樂長)을 거쳐 로스트로포비치가 예술감독
으로 있는 내셔날 심포니의 부악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콜럼버스 심포니의
종신악장으로 활동하던 중 부산시향으로 오게 되었다.
이로써, 부산시향은 수석지휘자와 악장을 모두 영입함으로서 약 1년간에 걸친
객원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출발을 향한 대오를 정비하게 되었다.
1992년 11월 23일 곽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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