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오트마르 마가
20여 년 간 지휘봉을 잡았던 정재동씨가 물러난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후임지휘자 선정을 앞두고
동 악단의 지속적이고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 외국인 지휘자를 초빙한다는 원칙을 정한바 있었다.
이 원칙은 서울시장의 내락을 받았던 것으로 보도되었고, 이에 따라서 서울시향 단원들과 세종문
화회관은 지난 1991년 한 해 동안 서울시향을 지휘한 국내외 지휘자들을 대상으로 자체 평가를
실시하여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알도 체카토(58세, 이탈리아),
에밀 타바코프(41세, 불가리아),
미클로스 에르데이(헝가리) 등 3명으로 초청대상을 축소하고 그간 개별접촉을 가져왔었다.
그 결과 초청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에르데이를 적임자로 추천하여 시향자문위원회에 회부한 결
과 그의 초청이 확정 되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 과정에서 서울시는 "에르데이의 체류기간이 짧고, 연간 2억3천만 원의 경비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초청을 부결 시켰다. 보도에 따르면, 에르데이는 계약조건에서 주택 및 기사
딸린 차량제공, 파출부, 개인비서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수용할 경우 총 2억3천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것이 서울시의 설명이다.
서울시가 에르데이의 초청을 부결하면서 내놓은 대안을 보면, 연간 약 3천만 원 정도의 비용으로
국내 지휘자를 선임하고 필요에 따라서 우수한 외국인 객원지휘자를 초청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서울시향측은 "서울시가 제시한 부결 이유는 외국인 상임지휘자 선임 계획 당시에
이미 토의되었던 사항들"이라면서 이제 와서 뒤늦게 문제 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졸렬한 처
사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서울 음악계에서도 "서울시가 내놓은 값싼 객원지휘자의 초청
방안은 한마디로 전임교수 없이 시간강사로만 대학을 운영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고 나섰
다.
한편, 서울시향이 내 놓은 구체적인 반박자료에 따르면 "올해부터 수석지휘자로 초빙된 오트마
마가와 KBS 교향악단과의 계약조건이 연간 3회 내한하고 1회 체류기간은 한 달 정도라는 내용
과 비교하면 훨씬 긴 기간으로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상, 경향신문 8월 7일, 11일
자 인용)
서울시향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은 부산에도 적용되는 문제여서 결코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이미 한차례, 외국인 상임지휘자를 초빙한 경험이 있는 부산시향인지라 서울시향이 부딪치고 있
는 문제와 그 양상이 다소 틀릴지언정 장기간의 지휘자 공백 속에서 차기 수석지휘자를 목하 물
색하고 있는 부산시향의 입장에서도 사전에 이러한 문제들을 꼼꼼하게 짚어놓을 필요가 있다.
1989년, 부산시향이 외국인 상임지휘자를 영입한다는 원칙을 세웠을 때도 부산 음악계는 이를
찬성하는 여론과 반대하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었던 기억을 우리는 갖고 있다. 심지어 외국인
지휘자를 영입하고자하는 인사들이 사대주의자로 몰리는 상황이 연출될 만큼 당시 분위기는 험악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산시향 제5대 상임지휘자로 소련 출신 마크 고레슈타인이 초빙되었던 것
은, 비록 그것이 최선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대안이 없는 차선책이라는 사실에 부산 음악계와 시
(市)당국이 공감했기에 가능했다. 고렌슈타인 취임 이후 부산시향이 괄목할만한 음악적 발전을 보
여줌으로써 이 결정이 옳았다는 여론도 우리는 기억한다.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향이 상임지휘자 초청대상을 고르기 위해 국내외 지휘자를 대상으로 자체
평가를 실시한 결과 국내 지휘자 ㄱ씨와 ㅇ씨가 각각 19위와 20위로 채점되었다고 한다(경향신
문, 8월 11일자). 국내 지휘자에 대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음악적 신뢰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는 수치여서 씁쓸하다. 허지만 이것이 오늘날 우리 오케스트라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외국인 지휘자의 영입을 반대하는 인사들은
'의사소통이 어렵고'
'문화의 차이로 단원들과의 조화가 힘들어 투자한 만큼 성과를 얻기 힘들며'
'국내 지휘자 양성에도 역행하는 처사'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런 논리는 언뜻 보기에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초래될 수 있
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상황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갈 위험을 안고 있다. 부산시향의 상임
지휘자였던 고렌슈타인이 KBS 교향악단 객원으로 초빙되었다가 리허설 과정에서 발생한 심각한
의경충돌로 지휘를 포기한 사태나, KBS 교향악단의 길레센 지휘자가 단명으로 물러난 것이 그러
한 우려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을 한 차원만 높여본다면 그러한 우려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로 접어둘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충분히 극복된다
고 보아진다. 지휘자와 단원이 다루는 공통의 언어와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음악언
어이며 음악문화다. 세계언어(Universal Language)로서의 음악을 다루기에 그들 사이에 커뮤니
케이션의 장애는 지극히 작은 문제일 뿐이다.
파리의 야심찬 오페라 극장 바스티유를 지휘하고 통괄하는 감독이 정명훈이며,
영국의 명문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은 불과 30세의 오스트리아인 프란츠 벨저 뫼
스트이며,
파리 관현악단의 음악감독 세미욘 비슈코프(Semyon Bychkof)는 레닌그라드 출신 외국인이다.
오케스트라의 수준향상을 위해 외국의 저명한 지휘자를 초빙한 또 하나의 살아있는 예로 일본의
NHK 교향악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NHK 교향악단은 66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세계적
인 교향악단이다. NHK 교향악단 이름 앞에 세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만
큼 그들의 음악적 위상이 확고하다. 이들은 1926년 10월 5일, 일본 교향악협회 회원 40여명과
지휘자 고노예 히데마로(近衛秀여)가 제1회 예약연주회를 열면서 창단되었다. 그런데, 이 교향악
단이 오늘과 같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기까지엔 수많은 명지휘자들의 조련이 있었다.
볼프강 자바리쉬(Wolfgang Sawalisch)를 비롯해서
오트마르 스위트너(Otmal Suitner),
헤르베르트 브롬슈테트(Herbert Blomstedt),
로브로 폰 마타치치(Lovro von Matacic),
홀스트 슈타인(Holst Stein),
이고르 마르케비치(Igol Markevich),
샤를 뒤또아(Chales Dutoit),
세르주 보도(Serge Baudo) 등 명장들의 손을 거쳐 오면서 정밀하고 깔끔한 NHK 사운드를 만
들어왔다.
NHK 교향악단이 수년전부터 레이저 디스크를 매체로하여 마에스트로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는
것도 연주기량에 대한 그들의 자신감을 세계에 알리고자하는 야심찬 계획이다.
근래에 와서도 NHK 교향악단은 자바리쉬, 스위트너, 스타인, 브롬슈테트 등 명예지휘자를 중심
으로 폭넓은 연주 활동을 펼치는 한편 레코딩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일본이 이렇게
무섭게 투자하는 동안 한국 음악계는 지휘자를 육성하는 제도도, 의욕도, 투자도 거의 하지 않았
다.
기득권의 수성(守成)에 기울인 노력의 절반만큼만 투자했어도 오늘과 같은 상황은 면할 수 있었
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한데도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논리를 들이대거나 예산 절감을 앞
세운다면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서울시향의 어려움이 슬기롭게 극복되기를 주시한다. 일파만파(一波萬波)의 영향이 부산에
까지도 밀려들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부산시향은 차기 수석지휘자의 선임을 위해 금년 초부터 객원지휘자를 불러들여 자체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누라 알만(터어키 출신 미국인),
안톤 부라노브스키(체코 출신 독일 거주),
에밀 타바코프(불가리아),
다니엘 루이스(미국),
데이비드 부킨(우크라이나),
케네스 키슬러(미국),
데이비드 버크(미국) 등이 그간 부산을 다녀갔고 하반기에도 오디션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여
기에 기대와 희망을 일단은 걸고 있다.
국제화 시대의 오케스트라는 과감히 구태의 틀에서 벗어나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시민들의 참 사랑을 받는 악단으로서의 지향점이 되는 것이다.
1992년 8월 11일 곽 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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